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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비 Apr 22. 2023

전업주부가 되어 '나'를 찾았다.

최근에는 블로그 형식의 가벼운 글만 작성하곤 했는데 아주 오랜만에 호흡이 긴 글을 쓴다.

그동안 늘 머릿속으로 꼭 한 번은 다루고 싶은 주제였는데 오늘에서야 쓰게 되었다.  


보스턴에서 박사 후 연구원(일명 포닥)으로 일하게 된 남편과 함께 이곳에 온 후 어느덧 1년이 조금 더 되는 시간이 흘렀다. 남편과 함께 하기로 결정을 내리면서 나는 휴학을 통해 1년 남은 통번역대학원 석사 과정을 어쩔 수 없이 중단해야 했다. 동시에 진행 중이던 영어와 독일어 개인수업도 다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해야 했기에 수업이 줄어드는 것도 감수해야 했다. 초기 정착으로 분주했던 나는 지인들을 통한 통번역 일 의뢰도 곧 잘 거절하게 되면서 점점 일거리를 얻는 일도 드물어졌다.


대학원 동기들은 다들 졸업 후 시의회에 불려 나가 통역을 하거나 인지도 있는 에이전시에 취업하여 벌써 번역서를 내놓기도 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마치 나만 정체되어 있는 것 같은 감정이 시시때때로 나를 괴롭혔다.  


갑작스레 전업주부가 되어 점점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주변에 커리어를 탄탄히 쌓아가는 여성들을 볼 때 어김없이 시기심과 자격지심을 느끼는 내 모습이 낯설었고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만큼 나는 불안했다. 그럴 때마다 괜히 남편을 향한 말과 행동이 뾰족해졌다.


'생산성(Productivity)'이 없다고 느껴지는 모든 순간순간들이 내겐 고문이었다. 집안일을 하더라도 보람이 없었고, 쉬는 순간에도 마음은 불안하고 불편해서 요동쳤다.


미국에 있는 이 시간을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한 끝에 얻은 결론은 2세를 갖는 것이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2세를 계획하다니... 그 당시 생명을 갖는다는 의미에 대한 고찰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얼통당토 않은 이유로 시도했던 임신은 화학적 유산으로 끝이 났다.


임신조차 내 뜻대로 안 된다는 사실에 나는 절망했다. 그 순간이 미국에서 내가 경험한 가장 저점이었다. 내 감정선의 가장 최저점을 찍고서야 나는 나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그것은 '나는 나의 정체성을 무엇으로부터 찾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나의 정체성을 내 커리어에서 찾았다. 물론 커리어가 나라는 사람을 설명해 주는 한 부분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커리어 그 자체가 '나'는 아니다. 나는 그것을 몰랐다. 그래서 커리어가 사라졌을 때 나는 흔들렸다. 나의 모든 것들이, 나의 존재 자체가 흔들렸다.


내 문제의 근원을 직시했을 때 비로소 나는 내 가치관의 근간을 다시 세우기로 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스스로 물었다.


오랜 기간 크리스천으로 살아오며 늘 하나님과 이웃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해 왔다. 놀랍게도 그런 삶을 사는 데는 아무런 외적인 조건이나 능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나는 그동안 통역사라는 타이틀에 그렇게 목을 매고 살았을까? 스스로에게 '자아실현'이라는 말로 포장해 왔지만 그건 순전히 '타인에게 보이는 나'를 위한 것, 즉 타인의 인정 때문인 것이지 내가 추구하는 삶의 목적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이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라면 그것은 오늘이건 내일이건 언제든지 실천 가능한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누구보다 나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무지했을 뿐이었다. (테스형은 몇 수를 내다보고 있었던 걸까)


그렇게 나는 뿌리가 연약했던 나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

남보다 나을 것 없는 사람이지만,

그러한 바람대로 살고 싶은,

크리스천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기로 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내게 주어진 모든 역할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먼저 '주부'라는 역할을 사랑하게 되었다.

주부는 영어로 'homemaker' 다.

직관적으로 해석하면 다름 아닌 '집을 만드는 자'다.

옥스퍼드 사전 상의 의미로는 다음과 같다.

"person who spends their time looking after a home and doing housework" 

'집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이다.


'와'하고 감탄이 나왔다.

 

'집을 돌보고'


특별히 내 마음 깊은 곳에 와닿았다.

참 좋은 말이다.


집이 단순히 먹고 자는 공간이 아니라,

따뜻하며 마음에 쉼을 주는 공간이 되도록...

그렇게 집을 돌보고 싶다.


이러한 마음자세를 갖게 되자 집에서 하는 모든 활동들이 어쩐지 즐거워졌다.

식사준비를 하고 깨끗하게 청소를 하는 일,

집을 돌보기 위해 하는 크고 작은 일 하나하나가 모두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서 하는 일이 아니기에 지치지 않았다.

가령 남편이 나의 노력을 인정해 주길 바란다거나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안에서 기쁨을 느끼기에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고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남편이 나의 노력으로 조금이라도 미소와 활력을 되찾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조건 없이 누군가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기 위해,

지친 이에게 쉼을 주기 위해 무엇인가 해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나를 기쁘게 했다.


보답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남편도 나를 향해 애정 어린 고마움을 표시할 때가 잦아졌고,

그렇게 우리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친밀해졌고 또한 견고해졌다.

그렇게 서로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며,

서로를 그 자체로서 사랑하는 법을 조금씩 배우는 중이다.


나의 생각의 변화는 비단 집에서의 생활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가령, 교회에서도 사람들과 피상적인 인간관계만 맺을 때가 많았다.

이곳에서 그저 전업주부가 된 것 같아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에 대화를 피하고만 싶은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되니 불필요한 자격지심이 사라져 사람들을 대하는데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건강하게 잘 지내는지,

특별히 좋은 소식이 있는지,

별다른 고민이 있는 것은 아닌지...


타인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대화와 사귐은 더욱 풍요로워졌다.


그렇게 나는 이곳에서 전업주부가 되어

비로소 나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들을 사랑하는 법을

조금씩 배워나가는 중이다.


내 존재 자체로서 사랑받고 있다는 안정감이

내게 말할 수 없는 마음의 평화와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타인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기쁨과 보람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은 그때에

신기하게도 아기천사가 나와 남편을 찾아왔다.


조건 없이 이 소중한 존재를 사랑하는 그런 엄마가 되길...

오늘도 기도한다.


때때로 치열하게 일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더 이상 서두를 필요는 없다.

준비가 되어 있다면 기회는 언제든지 찾아올 것이라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저 성실하게, 준비된 사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면 된다.


신앙 안에서 다시 세워진 나의 뿌리를 보다 견고하게 하기 위해 매일 반드시 구별된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하루 30분에서 1시간은 꼭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데 시간을 할애한다.



그렇게 몸과 마음에게 양식을 주는 데만큼은 부지런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한창 감정의 소용돌이가 극심했던 시절에는 점심 끼니를 대충 때우곤 했지만,

내가 추구하는 인생의 목적을 향해 가기 위해 제대로 갖춰진 식사를 한다.

정성스레 요리를 해서 먹는 즐거움은 덤이다.



요리를 하며 생각하게 된 점은,

타인을 기쁘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많은 돈이 없어도, 말주변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약간의 시간과 정성만 필요할 뿐이다.


물론 먹는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죄인들과 병자들과 함께 떡을 떼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만큼 맛있는 음식을 두고 타인과 나누는 사귐과 교제는 소중한 것이다.


주부로서 내가 가진 작은 재능으로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크리스천으로서의 '나'로 사는,

그것이 내가 간절히 바라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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