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어보지 않고 판단하면 아이가 아파요.
"물은 얼마 만에 줘야 돼요?"
다육식물의 매력에 흠뻑 빠진 나는 수중 채널에 이어 다육식물을 담은 두 번째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게 되었는데, 내 영상을 보고 다육이를 키우게 된 지인이 질문했다. 일주일에 한 번, 이주일에 한 번.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다육식물을 처음 키워보는 사람에게 단순히 기간을 특정해서 말해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육이가 죽었어요."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관수 주기는 다육식물의 종, 환경, 화분의 크기, 흙의 구성 등을 고려해서 결정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다. 계절에 따라서, 다육식물의 현재 상태에 따라서도 물을 주는 방식과 양은 달라질 수 있다.
지금 보다 더 초보 다육맘이었던 나를 떠올리며 질문자와 나 모두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 흙의 수분을 측정할 수 있는 간단한 기기를 선물했다. 건전지로 작동하는 버튼이 달린 금속 막대의 형태인데, 화분의 흙속에 깊이 찔러 넣고 버튼을 누르면 들어오는 불빛의 색깔로 수분의 상태를 알 수 있다.
빨간색이면 물이 부족해서 줘야 할 때, 초록색이나 푸른색이면 물이 충분한 상태. 참 신기하게도 살짝 찔러 넣으면 빨간색이지만, 화분 바닥 가까이 깊이 넣으면 초록불을 보일 때가 많았다. 겉만 마르고 속은 아직 수분을 간직한 상태란 뜻이다. 이런 때 물을 더 주면 과습이 되어 다육이에게 안 좋을 수 있다. 초보자 시절엔 애정이 뿜뿜 할 때라 뭐라도 해주고 싶어 물 주기가 너무 하고 싶은데,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베란다에 나가 다육이를 들여다보던 나에겐 그린라이트가 반갑지 않았다.
그래서 베란다에서 다육이를 키우던 초기에 수분 측정기는 나와 만나는 일이 많았다. 화분 하나만 찔러보아선 안됐다. 같은 베란다에서 살고 있고, 똑같이 구성한 흙을 사용했지만 수분 측정기는 때때로 아이들마다 다른 색의 불빛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알아내기가 참 어려웠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금속 막대기의 판결보다 내 눈과 감각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흙의 겉면을 보고, 나보다 경험이 많은 이들의 노하우를 습득하면서 물을 주기 전에 수분 측정기 선생님의 빨간불 컨펌을 받던 나는 언젠가부터 그를 찾지 않게 되었다.
키핑장으로 이사를 온 후 내 다육식물들을 소개하는 영상을 촬영하게 되었다. 자식을 키워보지 않은 내가 감히 부모님의 위대한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내가 기르는 생명을 타인에게 소개하는 일이 이런 것인가 조금은 느끼는 시간이었다. 촬영한 영상을 보니 내 다육이들이 예쁘다는 소리를 어찌나 반복적으로 많이 하는지, 그리고 조금 시들해 보이고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아이를 소개할 때면 나에 대한 자책이 폭발했다.
'로즈흑법사'라는 이름의 다육이는 블랙에 가까운 짙은 브라운색 잎장의 꽃 같은 아이다. 장미처럼 고혹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에 흑마법을 부리는 마법사의 능력까지 가진 것 같은 이름까지 더해져 매력적으로 느껴지던 아이를 나는 법사님이라 존칭 했다.
그런데 8월에 촬영한 다육이 소개 영상 속 로즈흑법사는 처음 집에 왔을 때보다 얼굴이 절반 정도 크기로 작아져 있었고 같은 아이가 맞나 싶게 달라져 있었다. 나는 구독자들에게 내가 너무 부족해서 우리 법사님이 쪼그라들었다며, 다른 아이들은 키핑장으로 이사온 후 다 예뻐지고 건강해졌는데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고 속상함을 표현했다.
그런데, 영상 업로드 후 반가운 댓글이 달렸다. 몇몇 친절한 구독자들이 로즈흑법사가 속해있는 에오니움 속 아이들은 겨울 생장형이라 원래 여름에 휴면을 한다며, 가을이 되면 다시 활발하게 성장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육이들은 크게는 여름 생장형, 겨울 생장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흔히 하형 다육, 동형 다육 이라고도 부른다.
얼굴에 하얀 분가루를 바른 '두들레야 속'이라고 분류되는 아이들이 겨울 생장형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얀 얼굴이 겨울왕국 엘사와도 잘 어울려서, '하얀 애들은 여름엔 쉬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며 여름에 잠시 못나져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로즈 흑법사도 겨울 생장형이었다니!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여태까지 죄책감을 가지며 노심초사했던 나의 마음이 편해졌다.
'내 잘못이 아니었어.'
더운 여름이 지나자, 로즈흑법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폭풍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제 예쁜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그때 구독자님이 따뜻한 댓글로 그 아이가 겨울 생장형이라는 걸 알려주지 않았다면, 아마 여름은 로즈흑법사에게도 나에게도 괴로운 시간이었을 거다. 여름에 휴면하는 겨울 생장형 다육이들은 상대적으로 물을 줄이고 좀 더 서늘한 곳에서 쉬는 시간이 필요한데, 나는 아이가 걱정되는 마음에 물도 더 많이 주고 햇볕도 더 많이 보여주려 했을지도 모르니까.
로즈흑법사의 다름을 알지 못해서 걱정하고 자책하던 내 모습처럼, 삶의 곳곳에 존재하는 내가 고민하는 수많은 문제와 걱정거리 중에는 그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되거나, 그 다름을 인지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오해가 상당히 많겠단 생각이 들었다. 상대의 다름을 인지하지 못하고 내가 아는 방식으로 해결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쩌면 관계나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드는 일도 있었을 거다.
시간을 두고 마음을 조급하게 갖지 않으면 나의 구독자님들처럼 그 다름을 친절하게 알려주며, 내 잘못이 아니라 원래 그런 것이라고 알려주는 귀인이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구독자님처럼 굳이 알려주지 않더라도 조금 더 여유를 갖고 내가 로즈흑법사와 오랜 시간을 보냈다면 나는 가을이 오면서 아이가 여름에 쉬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내년 여름부터는 그 아이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평안을 얻었을 것이다.
문득 수많은 인간관계에서 어쩌면 나는 누군가에게 로즈흑법사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분가루를 칠한 두들레야 속 다육이들처럼 누가 봐도 ‘저 아인 동형 다육이일 거야’라고 예상되지 않아서, 여름에 시들어있으면 이상해 보였던 아이.
살면서 참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라는 표현이었다. 반전 매력은 좋은 표현이기도 하지만 서글픈 말이기도 했다. 나는 원래 내가 이런 사람이라 이렇게 행동하는 것뿐인데, 나를 그들 맘대로 규정 지어놓고는 원래의 내 모습이 반전이라고 했다.
내게는 로즈흑법사를 미리 키워본 경험이 있던 구독자님들이 그 아이가 원래 여름에 쉬는 아이라고 말해주어 둘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풀어줄 수 있는 조력자가 있었지만, 외로운 인간 로즈흑법사들에게는 그런 조력자가 없는 경우가 있다. 아니, 어쩌면 조력자가 아무리 그 아이의 원래 성향에 대해 얘기해주려고 해도 상대가 자신의 판단만 고집할지도 모르겠다.
"내 맘 같지 않은 사람이 많아."
학창 시절엔 맘이 안 맞는 친구가 있으면 같이 지내는 시간을 줄이면 됐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니 그것이 불가능해졌고, 세상에 이렇게나 내 맘과 다른 사람이 많다는 것을 세월이 지날수록 더 많이 느끼게 된다. 문득 다육이 화분에 꽂는 수분 측정기처럼 사람 마음 측정기가 있다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뭘 줘야 할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빨간 불, 초록 불 정도의 신호는 읽을 수 있도록.
너무 막무가내로 지금은 과학적으로 빨간불인 상황인데 아니라고, 초록불이니 물은 필요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서, 그런 때 이것 보라고 내밀 수 있는 금속 막대기가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았다. 이 막대기가 고장 났다고 생각한다면 네 막대기를 들고 와 보렴. 하고 말할 수 있게.
그런데 생각해보니 여름에는 로즈흑법사의 화분에서 빨간불이 들어오더라도 물 주기를 좀 더 참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반드시 수분측정기에만 의지하는 게 정답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다육이 선생님에게 듣는다. 수분측정기는 수분의 상태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능력이 전부다. 그 빨간불은 물이 부족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 물을 줘야 하는 행동까지 이어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까.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상대에 대해 선입견을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맞는 방식으로 다가가는 것이 상대를 건강하게 꽃 피울 수 있게 하는 길이라는 걸 차가워진 기온에 활짝 핀 로즈흑법사를 보며 생각한다. 사시사철 푸른 내 이름 속 소나무도 참 좋지만, 일 년 중 시들하고 쉬고 싶은 계절이 있는, 알려진 것과 다르게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다육이가 난 왠지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