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하다 Dec 08. 2022

넌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비난으로 들리나요, 칭찬으로 들리나요.

 “송현아, 너 어렸을 때 할머니 집 앞에 기억나니?”     


칠순을 앞두고 계셨던 아빠는 아파트가 들어선 낯선 고향땅을 바라보며 내게 물으셨다. 지난해, 아빠에게 아버지 같았던 큰 형님이 세상을 떠나셨고, 큰 아버지는 조부모님이 계신 선산에 함께 자리하셨다. 장례 때도 당연히 제가 모셔야 한다며 길을 나섰던 고마운 남편이 그날도 나와 우리 부모님을 든든히 지켜주었다. 아빠도 직접 얼굴을 뵌 적 없는 할아버지. 그리고 참 예쁘셨지만 내겐 아주 어린 시절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들로만 남아있는 할머니. 조부모님과 보낸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남편을 보여드리니 왠지 마음이 좋았다.   


 “할머니 집 안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동네는 잘 기억이 안 나요.”


생각해보니 우리 가족은 늘 차를 타고 할머니 댁 앞에 내려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차를 타고 외가에 갔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딸만 셋이었던 우리 가족이 환영받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나는 언니가 둘인 것이, 우리 집이 세 자매인 것이 왠지 모르게 참 자랑스럽고 좋았는데,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혀를 차는 안타까움의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던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내 기억 속의 삼십여 년의 시간 동안 시대적 분위기도 이렇게나 많이 변했는데, 아빠의 시간은 얼마나 더 많이 변한 것처럼 느껴지실까.      


 “여보, 내가 뛰놀던 동산이 없어졌어. 어딘지 모르겠네. 저긴 것 같은데 저건 동산이라기엔 너무 낮잖아.”  

   

 아빠는 손가락으로 저 편 어딘가를 가리키며 엄마에게 자주 들려주던 어린 시절 이야기 속 동산을 추억했다.      

 “동산이 낮아진 게 아니고 아빠가 커진 거 아니야?”   

    

나는 괜스레 헛헛하게 느껴지는 아빠의 마음을 웃음으로 채워보려 시도했다.    

  

 “그런지도 모르지. 참 신기하지. 그때는 정말 크고 높았던 공간이 지금 보면 작아 보이는 거 말이야.”   

   

아빠가 바로 주신 공감의 대답은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법한 이야기지만, 왠지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인 인생 선배의 덤덤함처럼 다가와 내 마음속에 묵직하게 자리했다.   

   

나도 생각했다. 초등학교 시절 한 바퀴를 돌면 200m 달리기 경주가 가능했던 운동장은 내게 너무나 커다란 공간이었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 보니 누가 학교를 미니어처로 만들어버린 느낌을 받았었다.

‘내가 그때보다 키가 많이 큰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크긴 컸나 보구나’ 생각할 때쯤 엄마가 던진 한 마디가 많은 생각을 불러왔다.      


 “대학 다닐 때는 캠퍼스가 그렇게 넓고 커 보였는데 이제는 작아 보이더라고. 과 동기들도 다 그렇대. 우리가 그때보다 키가 1cm라도 줄었음 줄었지 커지진 않았을 텐데 참 신기하지?”   

  

그랬다. 나도 느껴본 적 있는 기분이었다. 성인이 되어서 처음 마주한 공간이지만,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찾았을 때 받았던 너무도 다른 느낌. 지금까지는 크고 높고 거대한 이미지로 마음에 자리했던 공간이 세월이 흘러 다시 봤을 때 작아진 느낌이 드는 것은 나의 외형적 크기가 커져 상대적으로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가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이미 키가 다 자란 대학생이 느꼈던 커다란 캠퍼스가 세월이 흐른 후 그때만큼의 웅장함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과거 우리나라의 가장 높은 빌딩을 상징했던 63 빌딩이 지금의 고층 건물 형아들이 생긴 후 어린 동생이 된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현상인 걸까? 그렇지만 대상과 공간에 대한 감성적 인지 변화가 꼭 기술의 혁신이 가시화될 만큼 물리적 시간이 필요한 것 같지 않단 생각도 들었다. 매일 드나들던 어떤 공간이 어느 날 갑자기 아주 달라 보이는 경험을 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대학교 입학이 확정된 후 갔던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몇 주 사이에 한없이 작아져버린 교정을 느꼈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매일 갔던 학교. 내 신체적 크기의 변화나 시간의 흐름은 미약했을 텐데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 정을 떼는 시스템이 발동한 걸까. 어쩌면 ‘작다’라는 느낌은 ‘달라 보인다’, ‘낯설다’, ‘의미를 거두어 가다’와 맞닿아 있는 감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시절 캠퍼스라는 공간은 재학생들에게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사회에 나서기 전 나에게 ‘소속감’을 주는 대상이며 집보다도 훨씬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었다. 물론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은 고등학교 시절에도 집보다는 학교와 학원에 있는 시간을 훨씬 길게 만들긴 했지만. 그렇지만 대학 캠퍼스는 고등학교와는 다르게 ‘눈에 보이는 통제’가 사라진 곳에서 자율적으로 행동을 시작하는 곳, 내가 머물고 싶어 오래 머무는 곳이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전교생의 교실과 교무실 등이 자리한 본관 건물 한 동과 우리가 ‘강당’이라고 불렀던 실내 체육관, 이렇게 2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반면, 대학 캠퍼스는 전공 분야별로 건물이 다 달라서 나의 생활 반경이 커졌다고 느꼈고, 굉장히 넓은 세계로 나아간 기분이었다. 물론 내가 전공 수업을 들으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사회과학대학 건물이었지만, 다른 선택과목이나 교양과목을 듣기 위해 최대 도보로 20분 이상(순전히 나의 보폭과 속도다)을 이동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커다란 세계는 내가 듣고 싶은 과목을 선택할 때 ‘건물 별 이동 시간’이라는 중요한 고려 사항을 만들었다.


 비슷한 동네에서 비슷한 문화를 공유한 친구들과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학원을 가기 위해 바로 헤어지던 고등학교와 대학 캠퍼스는 달랐다. 전국에서 온 제각기 다른 고향의 문화를 가진 친구들과 만남이 이루어졌고, 우리가 느낀 ‘진짜 캠퍼스 생활’은 강의가 모두 끝난 늦은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동갑내기 친구들 아니면 한 두 살 차이의 타 학년생들과의 교류가 전부였던 고등학교와는 달리 대학교 캠퍼스에서는 훨씬 폭넓은 대상들과 다양한 인간관계가 형성되었다. 성적, 교우관계가 정말 큰 이슈였던 고등학생 시절보다 더 다양하고 복잡한 관심사와 해결과제가 주어졌다. 그래서 표면적으론 자유를 얻은 듯 보였지만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고 챙겨야 할 사항은 더 많아진 것 같았고, 우리와 타인이라는 집단의 구분도 더 명확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밥 한 끼를 먹을 때도 우리에겐 누구와 어떤 메뉴를 먹을 것인가에 대한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 선택에는 수많은 고려사항과 이해관계가 충돌했다.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문제지만 한동안 집단을 뜨겁게 달궜던 이슈와 인물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마무리되었다. 당사자들보다 더 권력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던 중재자에 의해 갈등이 봉합되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 무리를 이탈하기도 했고, 다른 더 커다란 이슈가 생기며 모두의 관심사가 옮겨지기도 했다.

     

거의 대부분의 친구들이 똑같이 한 학년 위로 진급하는 고등학교와는 달리 대학에는 휴학, 자퇴, 군입대 등 다양한 변수로 처음 같이 시작한 친구들이 인생의 속도와 방향을 달리하는 경험과 종종 마주했다. 대학 등록금이라는 무게는 누군가에겐 참으로 버겁고 힘든 숙제여서, 아르바이트와 취업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그런 개인의 사정은 다른 이들과 굳이 공유할 필요가 없는 사적인 영역이었다. 그래서 각자의 입장에서 서운함과 오해가 생기고 진실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이 오가기도 했으며, 성인이 된 우리들은 각자의 비밀이 더 많아진 거리를 둔 인간들로 변해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고3과 대학 신입생은 불과 몇 달의 간격을 두고 격변하는 주변 환경을 경험한다. 어찌 보면 취업 전 작은 규모의 사회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리고 사회를 경험한 수많은 성인들이 대학 캠퍼스를 낭만이 있던 젊은 날의 뜨거운 열정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그곳에 ‘순수’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우리’를 중시하는 공동체 문화는 때때로 개인주의를 억누르는 다소 부정적 개념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우리’의 개념은 어쩌면 영원히 사라질 수도 사라져서도 안 되는 의미일지 모른다.


대학 시절의 우리에겐 ‘아무리 그렇더라도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잘 지내야 하지 않겠니?’라는 강한 유대와 소속감에서 기인한 공동의 가치가 다소 선명하게 조금 더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싸움보다는 화합이 예쁘고, 양보를 해도 대단한 걸 잃지 않으며, 끝까지 이기적이면 스스로 부끄러워지던 공간. 서로 아주 미워하다가도 진심이 터져 나오는 어느 날을 겪으면 의외로 정말 깨끗하게 앙금이 털어지기도 했던 마지막 순수의 자리.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캠퍼스를 다시 찾았을 때, 한 때 나의 온 마음을 차지했던 그 공간이 작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쩌면 삶의 치열함 속에서 그 시절 우리의 바탕을 채우고 있던 순수의 가치가 더는 세상에 작용하지 않는다는 걸 피부로 느낀 탓은 아닐까. 절대 하찮지 않았을 그 시절 나의 고민과 갈등 상황, 그리고 그것을 해결해가던 과정이 더는 내게 큰 문제도, 택할 수 있는 좋은 문제 풀이의 방법도 아님을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엔 오랜만에 마주한 어른들이 “정말 예전 그대로이십니다.”라는 인사가 그저 나이 들어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전제로 한 ‘외모적 젊음 유지’에 대한 기분 좋은 칭찬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한때 나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했던 누군가가 ‘넌 여전히 그대로구나.’라고 말할 때 거기에 담긴 의미는 더 깊은 것이었음을 알리는 신호가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지독히도 빈말을 못해서 사회생활에 정말 부적합한 캐릭터였다. 조금씩 세월이 흐르며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나중에 밥 한 번 먹어요.”라고 먼저 말을 건네는 것은 정말 어렵다. 좋은 관계의 시작을 위해 상대의 장점을 찾아내 가벼운 칭찬으로 인사를 건네려 하지만, 없는 장점을 거짓으로 지어내진 못하는 편이다.


예전에는 “더 예뻐졌네.”라는 인사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 사이에 흔한 인사라고 생각했었고, 내 기억 속 모습보다 더 좋아 보이지 않는 사람에겐 그런 인사를 건넬 수 없어 다른 인사말을 찾으려 애쓰기도 했다. 그런데 나이가 더 들고 나니 지금의 나를 과거의 나보다 더 추켜세우는 인사보다도 “정말 그때 그대로구나.”라는 말을 종종 듣기도 하고 나도 상대에게 건네기도 한다.  


과거의 한 시절을 나와 함께 좋은 추억으로 간직한 사람. 그런 이가 오랜만에 마주한 나를 보고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에게 내가 주었던 좋은 기억과 의미가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는 소중한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니 뭉클해졌다.      


지난해, 20년 전 대학 동기였던 친구에게 SNS를 통해 안부 인사가 왔다. 누군가에겐 너무도 미안한 이야기지만 내 선택적 기억력은 “나 너랑 언제 뭐 했던 누군데 기억 나?”라는 수많은 메시지에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꽤 많다. 그런데 이번에 연락을 준 친구는 정말 반가웠고, 종종 생각했었고, 꿈에도 나온 적이 있던 그 시절 나와 아주 친한 친구였다. 내가 연락처를 물어 메신저에 등록했고 프로필 사진에는 멋진 의사 선생님이 된 친구가 있었다. 나와 같은 신문방송학과를 선택했었지만 학교를 떠나 수능 시험을 다시 보고 다른 길을 선택한 친구였다. 내 기억 속 가장 많은 나이의 그 친구는 22살이었는데 환하게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현재 그 친구의 사진을 보고 느낀 나의 첫 감정은 ‘하나도 안 변했네. 그대로구나.’였다.     

 

아마 대학시절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을 어디선가 찾아낸다면 우린 아주 어리고 촌스럽고 지금과 많이 다를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 친구와 함께 했던 내 기억 속의 그는 밝고 잘 웃고 정말 선한 얼굴을 한 착하고 긍정적이고 열심히 사는 좋은 친구였다. 그 순수한 시절을 같이했던 내가 좋아했던 친구가, 20여 년을 소식도 모르고 못 보고 지냈던 친구가 그때와 똑같다고 느꼈던 나의 마음은

‘여전히 너를 참 좋은 사람으로, 고마운 사람으로, 보고 싶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어.’

라는 뜻이었음을 깨달았다.      


조부모님과 큰아버지를 뵙고 난 후 외조부모님을 찾았다. 두 곳 사이의 거리는 차로 2-30분 남짓이라 외할머니 기일을 맞아 찾은 부모님의 고향이었다. 환갑이 넘으셨어도 여전히 위트가 넘치며 만날 때마다 우릴 편하고 웃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외삼촌과 숙모를 뵈었다. 외삼촌에게는 당신의 첫 조카인 나의 큰언니가 아주아주 큰 의미다. 오죽하면 군대에서 휴가 나왔을 때 제일 먼저 조카를 보러 오셨을까.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삼촌은 나를 만날 때마다 큰언니의 4-5살 시절, 초등학생 시절 이야기를 하며 얼굴 가득 사랑이 흘러넘친다. 너나 둘째도 예뻤지만 너네 큰 언니랑은 비교도 안된다고 대놓고 말하는 첫 조카에 대한 사랑이 왠지 삼촌을 20대 청년으로 돌아가게 하는 타임머신 같아서 거기에 탑승하는 것이 난 참 좋다.   

   

남편이 얼마 전 시부모님의 연애시절 흑백 사진을 컬러로 한 땀 한 땀 변환했다. 기분이 참 이상했다. 색감이 입혀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그 시절이 왠지 내 기억 어딘가에 자리한 듯 성큼 마음속에 걸어 들어온 것 같이 몽글거렸다. 너무 멋지다고 했더니 남편은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부모님과 아기였던 큰언니가 찍은 흑백 사진을 정성 들여 컬러로 변환해주었다. 갑자기 그 사진이 떠올라 외삼촌에게 보여드렸다. 내 휴대폰 속에 들어있는 그 사진을 보는 삼촌의 얼굴은 정말 찐 리액션이었다. 휴대폰 화면 속으로 빨려갈 듯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확대하며 언니를 바라보는 삼촌의 눈빛과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 저렇게 많이 사랑했구나. 지금도 저렇게 소중하구나. 그러더니 삼촌이 한마디 하셨다.


 “80살이 넘는다 해도 얘는 나한테 늘 다섯 살이야.”   

   

이제 고등학생이 되는 나의 조카를 떠올려봤다. 변성기가 와서 다른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기는 말을 처음 시작했던 때 세상에서 1번이 이모라고 했었다. 주책맞게도 2번으로 밀려난 ‘엄마’인 둘째 언니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렇게 조카가 예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조카를 그저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내게 평생 한없이 주기만 한 존재인 둘째 언니의 얼굴도 떠올랐다. 나에게도 내 조카는 여전히 4-5살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다. 가장 예쁘고 소중하다고 느꼈던 시간인 걸까? 엄마도 아빠도 나를 아직 그 시절 아기로 보고 계실 거라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엄마 아빠를 30대의 젊은 엄마 아빠의 모습으로 기억하지 않는데, 왜 내리사랑하는 어른들은 아이를 나이 들어서도 아이로 기억할까.      


‘왜 나를 아직도 아이처럼 대하나요? 내 나이에 아직도 이런 말을 들어야 해?’


원망이 터져 나오던 순간들에 죄송함 한줄기가 흘렀다. 생각해보니 마치 오래된 연인에게

“왜 처음 만났을 때와 달라졌어?”라고 서운해하고 마음 아파하는 모습이 어른과 아이 사이에도 나타날 수 있는 감정일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고쳐서 쓰는 거 아니라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들 하는데, 또 사람만큼 쉽게 변하는 존재도 없는 것 같단 생각도 종종 든다. 상황이, 환경이, 지위가 사람을 참 쉽게 변하게도 한다.


“넌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공격적으로 사용한다면 그 안에는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네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던 너의 모습이 그대로라는 최악의 평가일 수 있다. 혹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너무도 쉽게 변해버리는 그 성질이 그대로라는, 변화무쌍한 기회주의자에 대한 비난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좋은 의미로 사용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사랑과 존중을 담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말 그대로네요.”라는 말을 듣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남편과 서로에게

“당신은 처음 만났던 그때 그대로예요.”라고 말해줄 수 있기를, 우리가 그렇게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작아지거나 낯설어지는 순간이 오지 않기를 꿈꿔본다. 하루가 지나면 더 많이 사랑할 테지만 이보다 더 사랑할 순 없을 거라 느꼈던 그 처음처럼 늘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꽉 채우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세월이 오래 지난 후에, 내가 그에게 그런 사람이었다면 참 감사한 삶이었다 생각하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특이한 남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