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2 감독님이 걸어주신 마법의 주문
연기자가 된 후 필모그래피가 쌓여갈수록 어떤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을 받는 일도 많아진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한다지만 사실 난 더 아픈 손가락, 엄청 아픈 손가락, 조금 아픈 손가락 다 있다. 어떤 작품이 배우의 기억에 더 또렷이 남는 이유는 다양하다. 정말 힘들어서, 현장이 좋아서, 대중적으로 사랑을 많이 받아서, 작품을 통해 맺은 인연이 소중해서, 어떤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받아서 등등 그건 좋은 이유일 수도, 잊고 싶을 만큼 아파서일 수도 있다.
내가 출연한 작품 중 물리적으로도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고 마음으로도 가장 사랑했던 현장, 그래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 2013~14년에 걸쳐 tvn에서 방송되었던 [감자별]. 당시 시청률은 정말 불운했지만 지금도 종종 이야기되고, 나이 어린 친구들도 나를 감자별 배우로 알아보고 인사하는 경우가 많아서 나는 그 작품이 시대를 잘못 만난 가슴 아픈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시트콤의 거장이신 김병욱 감독님께서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신다며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을 때 그 떨리던 마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배우가 된 후로 멋진 작품들을 볼 때마다 연기자 선후배님들, 제작진의 노고와 실력에 감탄하고 박수를 보냈지만, 질투가 나거나 ‘내가 저걸 해야 했는데’ 같은 생각은 정말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건너 건너서라도 같이 일해본 경험이 있는 지인조차 없는 김병욱 감독님의 작품은 본방 사수하면서 내가 그 안에 속해있지 않다는 것이 엄청나게 큰 슬픔으로 다가온 날이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나 자신도 잘 이해가 안 되는 감정이었다. 아마도 감독님과 나중에 만날 인연이어서 그랬었나 보다.
그때만 해도 나는 아직 청춘 로맨스를 연기하고 싶은 욕심을 갖고 있었던 때였고, 미혼인 내게 두 아들의 엄마 역할을 제안하시며 감독님께서 걱정하셨지만 정말 상관없었다. 나의 어떤 모습 때문에 선택해주셨냐고 여쭤보았는데, 그냥 방송에서 날 볼 때마다 ‘저 사람이랑 언젠가는 한 번 같이 일해야지.’ 늘 생각하고 계셨다고 말씀하셨다.
마치 오랜 짝사랑 상대가 사실은 날 좋아하고 있었단 말을 들은 것처럼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서 나는 착한 남편 도상이의 아내, 규영이 규호의 엄마 ‘노보영’으로 10개월을 살았다.
김병욱 감독님 작품은 현장이 힘들다고 알려져 있다. 가족 시트콤이라서 등장인물도 많은 데다가 웃음 코드와 감독님 특유의 서사와 감정을 살리려면 디테일이 많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야외 촬영은 그 주 대본 분량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뀌었지만, 세트 촬영을 하는 금요일 토요일은 아침에 출근했다가 다음 날 뜨는 해를 보며 퇴근하는 것이 루틴이었다. 그 당시 세트장이 많이 열악해서 감독님도 정말 많이 고생하셨다. 나도 당연히 체력적으로 피곤하고 힘들었다. 그런데 정말 정말 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감독님의 대본이 좋았고, 노보영과 그 가족들을 사랑했고, 화면 속에 담긴 우리가 참 좋았다.
감자별은 120부작이었는데 보통 1회가 2가지 메인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주의 대본이 나올 때면 보영이네 가족 중심 에피소드가 몇 개 있나 제일 먼저 체크했다.
많이 알려져 있듯이 김병욱 감독님 작품의 대본은 최종고가 감독님 손에서 완성된다. 감독님은 배우의 특기나 그 배우가 좋아하는 것을 대본에 반영해주시기도 하고 배우의 장점이 보일 수 있게 대본을 만들어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그냥 극 중 캐릭터의 대사라도 그것이 그냥 대사가 아니라 내게 건네는 따뜻한 응원인 것 같아 뭉클할 때도 많았다. 잊지 못할 회차가 참 많지만, 그중에서도 예언과 같은 두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싶다.
감독님이 연출하신 세월만큼이나 인연을 맺은 배우들이 많아서 감자별에는 특별 출연한 게스트들이 많았는데, 감자별 100회에는 특별 게스트로 김혜성 배우님이 출연했다. 그리고 보영이가 중심인 에피소드였다. 뭔가 100이라는 숫자가 주는 꽉 찬 의미의 숫자에 내 이야기, 그리고 명작 하이킥의 스타 혜성 배우님의 출연이 내심 뿌듯하고 감사했다. 그리고 그 에피소드의 내용은 가끔 외롭고 힘든 날 떠올리면 나를 눈물 고여 웃게 만든다.
(스포 주의)
보영은 수작업으로 만든 단 하나뿐인 꽃병이 깨진 상태로 배달된 걸 보고 택배 기사 혜성에게 항의하고, 혜성은 회사에 배상을 요청하겠다며 크게 화를 내고 물건을 가지고 돌아간다. 다음날 접착제로 조각난 꽃병을 붙여온 혜성을 보고 보영은 황당해하지만, 혜성은 하나밖에 없는 거라고 해서 붙여왔다며 오히려 화를 내면서 물건값이라고 돈 봉투를 건넨다.
어느 날 주차장에서 된장을 깜빡하고 안 사 왔다는 보영의 통화 내용을 들은 혜성은 보영에게 화를 내며 어느 브랜드 된장이 필요하냐고 묻고 마트에 된장을 사러 간다. 괜찮다는 보영의 말을 듣지 않고 마트에 간 혜성은 보영이 말한 브랜드가 없자 그 된장을 구하러 꽤 먼 곳까지 가서 된장을 사 오고 또 화를 낸다.
길거리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보영 앞에 혜성이 갑자기 나타나서 배달해야 하는 택배 상자도 던져버리고, 소매치기를 붙잡아 난투극 끝에 가방을 찾아준다. 없어진 거 없냐고 살펴보라고 화를 낸다. 휴대폰이 없는 것 같다고 하자 또 화를 내며 소매치기를 쫓아가서는 기어이 폰을 찾아다 준다. 택배 유니폼이 다 찢어져서 걱정된 보영이 변상해주겠다고 하니 혜성은 회사에 가면 널린 게 유니폼이라며 됐다고 화를 내며 돌아선다.
분명히 자신이 손해를 입으면서 나를 도와주고 있는 것 같은데 계속 화를 내는 혜성을 보영은 잘 이해할 수 없지만, 하얀 얼굴의 화만 내는 청년에게 보영은 어느새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
며칠 후 택배가 와서 반갑게 나간 문 앞에 다른 기사님이 서 있다. 혜성에 관해 물어보니 회사를 그만두었단다. 걱정하며 보영이 회사에 전화해보니 나를 돕는다고 택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해고되었다고 한다. 여태까지 회사에서 배상해준다고 했던 모든 것이 혜성의 개인 돈으로 처리된 것이었단 사실을 알게 된 보영은 마음이 복잡하다. 전화를 받은 택배회사 직원이 혹시 혜성이가 화를 많이 냈냐며 걔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화를 많이 낸다는 말까지 해서 더 그랬다.
혜성의 연락처를 물어 전화를 걸었다. 밥을 사주며 감사 인사를 하면서 물어봤다. 왜 그렇게 나한테 잘해줬냐고. 혜성은 대답을 해주지 않고 또 화를 버럭 냈다.
밥을 먹은 후 잘 가라는 인사를 하고 돌아선 보영의 등 뒤에서 혜성이 소리쳤다.
“예뻐서! 예뻐요. 최고로.”
보영의 입가에 미소가, 눈에는 눈물이 그렁 맺혔다.
100화 에피소드를 처음 읽었을 때 99회 동안 노보영으로 살았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보영의 남편 도상은 정말 자상하고 착하고, 보영 역시 도상을 많이 사랑한다. 그렇지만 가끔은 이 사람이 나를 무서워해서 말을 잘 듣는지 사랑해서 잘해주는지 잘 모르겠다. 보영은 원래 똑 부러지고 늘 자기 일을 알아서 잘 해왔던 사람이지만, 그래도 남편에게만큼은 위로도 칭찬도 받고 싶은데 말썽꾸러기 두 아들의 엄마로 산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어느새 난 이 집안의 중심인 강한 엄마, 빈틈없는 아내가 되어버린 것 같다.
“당신은 귀여운 거고 섹시한 건 처제지.”
어떤 상처가 될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그 말을 내뱉는 남편을 보며 보영은 마음 한구석에 차갑게 통과해버리는 바람을 느꼈다.
노보영이라는 이름보다 규영이 규호 엄마라는 호칭이 더 익숙해진, 절대 나쁘진 않지만, 가끔 헛헛함을 느끼던 어느 날. 이상한 방식의 슈퍼맨이 눈앞에 나타났다. 늘 소리 지르고 화를 내면서도 나를 위해 뭐든 해주려 하는 너무도 서툴고 조금도 계산하지 않은 꾸밈없는 날 것의 기이함이 오히려 마음의 벽을 허물어버렸다.
내게도 저런 티 없이 순수한 시절이 있었던가 생각에 잠겨 잠시 타임머신이라도 탄 기분이었다. 택배 일을 그만둔 혜성에게 연락을 한 건 빚진 마음을 갚고 부담을 덜기 위함도 있었지만, 사실 그 고운 청년이 왜 그렇게 내게 슈퍼맨처럼 행동했는지 그 이유가 진심으로 궁금했기 때문이다.
끝내 대답해주지 않고 돌아선 등 뒤로 그가 내뱉은 그 말 “예뻐요”. 내가 요즘도 살면서 가끔은 보고 듣는 말. 옷을 사러 간 매장에서, 친구들 모임에서, SNS 댓글에서. 그렇지만 그날 혜성이 말했던 “예뻐요”는 세상에 수많은 예뻐요 중에 아무 대가 없이 표현한 가장 솔직한 진심의 표현이었고, 가장 큰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으며, 어쩌면 이제 다시는 못 볼 거란 마지막이라는 거대한 의미 앞에 머리를 이겨내 버린 마음이 터져 나와 할 수 있었던 말이었겠지.
보영이는 정작 내가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한 청년이 내게 선물해준 그 소중한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거다. 노보영이라는 한 사람이 사랑받기 위해 그 어떤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존재만으로도 아름답게 빛나는 사람이라는 걸 믿게 만들어 준 그 순간을.
감자별이 끝나갈 때쯤 내 생일이었고, 감독님께서 보영이가 스쿠버다이빙에 푹 빠져 매일 집에 안 가는 에피소드를 만들어주셨다. 사실 작품 막바지라 모두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고 수중 씬은 모니터가 안 되다 보니 아마 스텝들은 빠른 진행이 어려운 이 소재가 별로 반갑지 않았을 것 같다. 당시에 나는 다이빙을 정말 사랑했지만, 실력은 전혀 없고 진지하기만 한 초보자였는데 그때가 내가 다이빙하는 모습이 방송에 처음 나온 아주 소중한 경험이었다.
다이빙풀에서 촬영하는 날이 내 생일이었다. 수중 씬 촬영을 끝내고 수면 위로 올라왔는데 규영이 역을 맡았던 아들 배우 단율이가 하얀 케이크에 촛불을 붙여 내가 올라오는 자리에 쪼그려 앉아있었고, 모든 스텝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생일 축하 장면이다. 감독님께서 적어주신 카드에는 ‘아름다운 바다에서 함께 유영하는 멋진 짝을 만나길 바란다’라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병욱 매직이 그로부터 5년 후에 일어났다.
남편을 처음 만났던 투어에서 남편은 얼굴 전체를 가리는 풀페이스 마스크(full-face mask)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도 지금은 남편에게 교육을 받아 사용하고 있고 우리 부부는 이탈리아 OCEANREEF라는 풀페이스 마스크 장비 회사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풀페를 쓰면 코로 숨을 쉴 수 있고 커뮤니케이션 장비를 통해 수중에서 말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사실 남편을 만나기 전부터 풀페에 대해 알고 있었고, 교육을 받으라는 주변의 권유도 있었지만 난 그냥 풀페를 쓴 모습이 안 예쁘다고 생각해서 기능성을 떠나 배울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패션의 완성은 얼굴인 것처럼 장비의 완성도 얼굴이었던 것인가!!! 처음 본 풀페를 쓴 남편은 정말 정말 멋져 보였다.
풀페는 그 당시 어색한 우리 사이에 아주 좋은 대화 주제였다. 이것저것 관련된 질문을 하고
“저 강사님한테 교육받을래요. 언제 가르쳐주실래요?” 어떻게든 한국 가서 만날 기회는 있겠구나 싶었다.
투어 둘째 날 오전쯤이었던 것 같다. 다이빙 중에 바닷속에서 남편이 다가와서 귀에다 대고 뭐라고 말을 했다. 통신장비가 없더라도 풀페를 쓴 사람이 크게 말을 하고 듣는 이가 집중하면 단어를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근데 너무 갑작스럽게 다가와서 한 말이라 나는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했다. 엄청 알아듣고 싶었는데.
그래서 귀를 가리키며 못 알아들었다고 수신호 했는데 남편은 그걸 너무 시끄럽다고. 귀 아프다고 이해했다고 한다. 수신호는 간단해야 하기에 ‘아니, 안돼, 아파, 안 좋아’ 등 부정을 나타내는 표현이 하나의 손동작이다.
‘안 들려요’를 ‘귀 아파요’로 인지한 현재 남편, 당시 이 강사님은 너무 민망해져서 스윽 멀어졌다고 한다. 너무 걱정이 된 나머지 내가 먼저 귀국한 후 바닷속에서 후배를 붙잡고 몇 번이고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질러보면서 귀 많이 아프냐고 실험해보았단다. 하…이 깜찍한 사람.
나중에 연인이 되고 나서 그때 내 귀를 아프게 한 거 같아서 너무 신경이 쓰였다길래 전혀 아니었는데, 정말 뭐라고 했는지 궁금했다고 물었다. 그랬더니
“예뻐요!”라고 했다는 거다. 미쳤었던 것 같다고. 그런데 그 말을 그때 안 하고는 견딜 수가 없는 상태라 머리로 몸이 제어가 안 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나한테 가서 그 말을 내뱉고 말았는데 내가 시끄럽다고 해서 깨갱 하고 돌아왔다고.
감자별 100회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남편을 만나기 5년 전에 촬영했던, 그때도 내가 공감할 수 있었던 그 이야기는 2019년의 송현에겐 어쩌면 더 마음을 울리는 한마디였던 것 같다. 인사치레로 듣는 예쁘다는 말도 예전보단 줄어들었고, 나 자신도 내가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던 내면의 힘이 많이 나약해진 날들이 의미 없이 흘러가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연인이 되기로 한 다음 날 그와 무려 5시간이나 통화를 했는데 무엇이 날 무장해제시켰는지 너무 빨리 내 안의 어두운 이야기를 상대에게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던 남편이 내게 말했다.
“송현아. 넌 지금 그대로 완벽해. 최고야. 나한테.”
그 말을 듣고 정말 오랫동안 엉엉 울었다. 갑자기 제어할 수 없는 서러운 울음이 치고 올라와 부끄러움도, 상대의 당황스러움도 배려하지 못한 채 목놓아 울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싶었는지 그때까지 나도 몰랐었다.
무언가를 해야지만, 어떤 사람이 되어야지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내가 세워둔 기준에 맞지 않아서 스스로를 인정해주지 않고 나 자신을 덜 사랑하면서 나는 그동안 참 많이 외로웠던 것 같다.
감독님 감사합니다. 5년 전 마법의 주문을 걸어주셔서.
남편님 감사합니다.
너무 늦게 택배기사님이 아닌, 미혼일 때 바다에서 함께 유영하는 짝으로 나타나 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