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직장들은 지방발령을 낼 때는 쥐도 새도 모르게 밀실 진행하고 발령일이 코앞에 닥쳤을 때 갑작스럽게 통보해 버린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당사자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이유가 제일 크다. 심지어 굴지의 대기업들도 이런 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회사는 참 비정하다. 공무원이 되기 전의 직장에서 나 역시 그런 상황이 되었고,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지방 소도시에 토요일 부랴부랴 가서 당장 월요일부터 있을 곳을 정해야 했다. 괜찮은 방 알아보고 고를 시간도 없었고, 이사철도 아니라서 매물 자체가 거의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낡고 허름한 방 하나를 계약할 수밖에 없었고, 이사를 하던 그날은 하루 종일 새 집을 청소해야 했다. 건물도 오래 된 건물이었지만 그 집에 사셨던 분은 집을 좀 험하게 썼던 듯했다. 욕실 벽에는 시커먼 물곰팡이와 벌건 녹물로 얼룩 투성이었고, 벽지는 누구랑 무슨 칼싸움이라도 한 건지 곳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얼룩들로 가득했으며, 방은 온통 담배 냄새로 찌들어 있었다.
나는 그전까지 청소를 그렇게 힘들게 해 본 적이 없었다. 장기간 방치된 곳곳의 묵은 때를 제거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그야말로 중노동이 따로 없었고, 진짜 코딱지만 한 원룸을 정리하고도 몸살이 나서 주말 내내 끙끙 앓아눕고 말았다.
이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구나.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깨끗하고 먼지 하나 없는 집에서만 살아왔다. 그런 나에겐 집이 깨끗하다는 게 너무나 당연했다. 그 뒤에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엄청난 노력이 있어야 그 당연한 상태를 지킬 수 있음을 나는 몰랐다. 그게 없으면 며칠도 못 가서 집은 돼지우리가 되고 썩어 문드러진다는 사실을 나는 그날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
이제는 안다. 삶도 그렇다는 것을. 자기 삶을 오랫동안 망가지지 않게 유지하는 그 자체가 엄청난 노력이 들어가는 일임을. 겉으로는 큰 변화가 보이지 않기에 눈에는 띄지 않지만, 그 노력을 멈추는 순간 나는 바로 넘어지고 내 삶은 곧바로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을.
아침에 억지로 일어나서 출근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과 억지로 만나며 또 하루를 버텨내고, 밀려오는 우울증과 싸우고, 혼술을 하며 슬프고 분해서 몰래 울기도 하고, 다음날 출근해서 또 억지로 웃고... 그런 삶에서도 어떻게든 스스로 행복을 찾아보려 하는 게 한국사회 다수 사람들의 일상이다.
그런데도 무슨 성취나 업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타인의 삶을 쉽게 말하며 "열심히 안 살았지?" "저 나이 되도록 뭐했을까?"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 낸다는 것을 너무도 가볍게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한 공무원 시험 유명 강사가 강의 도중 수험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냉정하게 이야기합시다. 정신교육 간단하게만... 여러분들 열심히 안 살았죠? 열심히 살았으면 여기 있을 수 없을 가능성이 높아요. 열심히 살았으면 어디 대기업을 취직했거나. 솔직하게, 그렇죠?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인터넷으로 그 소식을 접했는데,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잃었다. 다수에게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역대급의 엄청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걸까. 현장의 수백 명, 거기다 인터넷으로 함께 듣는 수만 명까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면 과거의 나 같은 케이스도 그 중에 수두룩하지 않았을까? 그 많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그렇게 보기 쉽게 가지를 쳐내고 단순화해서 그만큼씩이나 명확한 입장을 가지게 된 것인지 나는 정말로 부럽기만 하다.
아마도 절실한 마음으로 정신 차리고 공부하라는 정도의 뜻을 전하고 싶었을 테지만, 수험생들에게는 절대로 건들지 말아야 하는 지점이 있다. 열심히 살았으면 대기업에 갔을 텐데 열심히 안 살았으니 현 위치가 공무원 시험 준비생 아니냐는 건, 당신들이 살아온 과정 따위는 난 모르겠고 지금 여기 있는 것만 봐도 뻔하다는 말 아닌가. 정신교육은 오히려 수험생들보다 자신이 더 필요할 것 같은데, 그냥 차라리 수업만 했으면 좋겠다.
나는 웨이크보드 타기를 좋아한다. 웨이크보드뿐 아니라 수영, 스쿠버다이빙, 수상 낚시 등 내가 좋아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물을 끼고 있는데, 물에서 하는 모든 것들은 기본적으로 '버티기'이다. 사람은 절대로 물을 이기거나 정복하지 못한다.
바다에서 웨이크보드를 타던 어느 날, 어딘가에 생각이 우연히 닿는 순간 깨달음이 찾아왔다. 파도치는 바다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필요한지 알면, 멀리서 보기에 멈춰 있는 누군가의 삶을 보고 열심히 안 산 것처럼 추단해 버리는 것이 얼마나 생각 없는 행동인지도 알게 되지 않을까. 우리 사는 이 세상을 '고해(苦海, 괴로움의 파도로 가득한 바다)'라 부를 수 있다면, 그 안에서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그것부터가 하나의 커다란 성취가 되진 않을까.
사람의 현 위치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그보다는 궤적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내가 믿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게 현 위치 말고 궤적을 보고 파악하려면 한 사람 파악하는 데만도 꽤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누군가는 나에게 "쯧쯧, 그래 갖고 어느 세월에 그 많은 사람들을 파악하려 하시오?"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묻는 사람처럼 해서 어느 누구도 파악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몇 안 되는 사람일지라도 좀 더 잘 파악하는 게 수십 배는 낫다는 나의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다른 이들의 삶을 그런 관점에서 보고 싶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우리 삶을 그렇게 보아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