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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Jan 08. 2024

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저렇게 된다

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저렇게 된다!


순간 머릿속의 퓨즈가 휙 나갔다. '저렇게'는 바로 나였다.


상황은 이렇다. 어느 겨울날 나는 쪽방촌 독거 어르신 연탄 나눔 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고, 얼룩진 옷을 입은 채 언 손을 입김으로 녹여 가며 연탄을 수레에 실어 나르고 있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그걸 하러 나가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집에서 하릴없이 TV를 보거나 책을 보다 졸거나, 둘 중 하나였을 테지. 그러고 있기 싫어서 나갔다가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와 함께 지나가던 어머니한테 이 말을 듣고 말았다.


(사진 출처 : 강원일보 2019.1.25.)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그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첫 직장 입사 때 그룹 신입사원 연수. 장미꽃 열 송이씩을 나눠 주고 제한시간 내에 돌아다니며 한 송이당 5천 원에 팔아 오라는 임무를 받았다(나중에 알았는데 이 교육의 목적은 '나를 지우는 연습'이라 한다).


그때 장미 한 송이 값은 그 정도는 아니었기에, 이걸 5천 원에 팔려면 처음 보는 사람한테 죄라도 지은 것처럼 온갖 아쉬운 소리를 총동원해야 했다. 나는 어린이의 손을 잡고 가던 여성분에게 장미꽃을 내밀며 사 달라고 사정했는데, 이때 어머니가 아이에게 하신 말씀도 그거였다.


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나중에 저렇게 된다.


잊었다 싶던 기억은 그렇게 우연한 계기로 다시 살아난다. 사람이 뭔가를 영영 잊는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단지 그 자신이 잊었다고 생각할 뿐.


제삼자 입장에서도 이 광경을 목도한 적이 있다. 최근에는 대형마트 먹거리 시식대에서 일하고 계시던 중년 여성 앞에서 누군가가 자기 아이에게 "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저렇게 된다"라 하는 것을 보았고, 이삿짐센터의 트럭에서 물건을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누군가가 "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저렇게 된다"라고 하는 걸 보았다. '저렇게'가 된 사람에게 위로랍시고 어설프게 입을 뗐다가 내가 그걸 들었음을 알면 그 사람의 마음이 더 안 좋을 테니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지나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살다 보면 상반된 감정이 절묘하게 교차할 때가 있다. 무수한 '저렇게'를 보면서 나만 당한 일이 아님에 안도해야 할까, 이 말이 공기처럼 흔함에 아쉬워해야 할까. 동시에 떠오른 그 두 느낌이 상쇄되어 결국 무표정이다.

(사진 출처 : pixabay)

그 어머니들께서 아이에게 가르치려 하셨던 교육 내용의 타당성을 입에 올릴 자격은 나에게 없다. 그분들은 단지 소중한 아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었을 뿐이다. 단 하나의 문장만으로 전혀 모르는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잘못된 것으로 만드는 고도의 언어 압축 능력을 이야깃거리 삼아 보았자 어차피 그분들께 닿지 못할 테니 크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되짚어 보고 싶은 건 그 말을 듣는 순간의 내 머릿속이다. 한참 지나 생각해 보니 그때 마음이 편치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그 말을 듣기에 합당한 사람이 아님을 내심 항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실제로는 그런 말까지 들을 정도로 학교를 못 다닌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과, 내가 원래 연탄을 나르고 노상에서 꽃을 파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 그 두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데 화나는 지점이 그거면 진짜로 연탄을 나르고 꽃을 파는 게 업인 사람은 그런 말을 들어도 된다는 걸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는 그 하나를 빼고 내가 그 어머니들과 다를 게 무엇인가. 그것보단 이 세상 누구에게도 그 말은 온당하지 않고 나 역시 예외일 수 없다는 게, 번지수를 잘못 찾은 말이 아니라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말이라는 게 올바른 생각의 방향은 아닐까. 그렇게 오랜 세월 삐뚤어진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나의 문제가 뭔지도 몰랐던 내 헤아림의 부족, 그 미숙함을 이제야 고백한다.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예쁜 말은 듣기에도 좋지만, 그런 이들의 내면에는 예쁜 말이 있기 전에 예쁜 마음이 있다. 나는 말 예쁘게 하는 기술만 탐냈을 뿐 그걸 위해 예쁜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함을 알지 못했다. 새해맞이 목표에 말 예쁘게 하기가 있었던 적은 있어도 마음 예쁘게 먹기가 있었던 적은 없다. 글쓰기에서 글솜씨라는 건 없고 생각 솜씨만 있을 뿐이라고 믿어 왔지만 말에서도 말솜씨란 건 없고 예쁘게 생각하는 솜씨만 있을 뿐임을 나는 알지 못했다.


오늘은 한겨울의 추운 날. 가끔 겨울이 봄보다 따뜻할 때가 있다. 추울 때 더 잘 느껴지는 따뜻함 덕분에 겨울 전체가 따뜻한 계절이 되기도 한다. 거기에 나도 하나를 보태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이 만든 1인분의 따뜻함 속에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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