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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Aug 09. 2024

그가 나라를 대표하길 바라는 이유

"신사 숙녀 여러분, 다음은... 대한민국에서 온, 우 상 혁입니다!"

"우~~~"


우. 외국 관중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높이뛰기 국가대표 우상혁. 우리나라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한 선수. 사람들은 그에게 '스마일점퍼' '프로즐겜러'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다. 비장한 모습으로 경기에 나서는 보통의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경기 도중 내내 싱글싱글 웃고, 리듬에 맞춰 박수를 치고, 성원을 이끌어내고, 화답하는 그의 경기 모습은 마치 응원단장이나 레크리에이션 강사에 가깝다.

어릴 때. 올림픽 유도 결승전. 상대는 세계최강의 일본 선수. 우리나라 선수는 지고 말았다. 같이 TV를 보던 이들이 말했다. "에이, 금을 따야지 은이 뭔 소용이야!" "은메달 100개면 뭐 하냐, 금메달 하나가 이기는데" "비싼 비행기값 들여서 저기까지 가서, 저거 다 우리가 내는 세금 아냐?"


그때의 분위기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선수란 곧 국가고 선수의 패배는 바로 국가의 패배였다. 올림픽 결승까지 가서 은메달에 그쳤다(?). 그야말로 대역 죄인이 따로 없었다. 그럴 때 선수가 하는 말은 늘 "성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죄송합니다"였다.


난 이주일의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금메달을 못 딴 선수가 "죄송합니다" 하는 건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죄라도 졌나. 사람들이 그 선수에게 금덩어리 맡겨서 메달로 만들어 오라고 했는데 금덩어리를 잃어버리기라도 했나. 사람들이 그 선수에게 해 준 거라곤 기껏해야 TV 앞에 앉아있었던 것 빼곤 모르겠는데. 은메달 100개도 금메달 하나만 못한 기이한 한국식 셈법으로 은메달의 가치를 폄훼할 자격은 누가 준 것일까. 은메달이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잘하는 사람인데 그러는 이들 중 세계는커녕 반에서 2등이라도 해 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도쿄 올림픽 높이뛰기 결선에 진출한 우상혁 선수의 모습은 생소했다. 국가대표라 하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어떤 사명감이나 비장함도 없다는 듯 싱글벙글, 벙글싱글. 경기 도중 계속 스스로에게 말하고, 소리치고, 칭찬하고, 격려했다. 성공하면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우와앗! 상혁아 잘했다!" "상혁이가 최고다!"라고 소리 질렀고, 실패하면 "상혁아, 잘했다!" "괜찮다!"라고 경기장이 떠나가라 외쳤다.


이 재미있는 선수의 모습에 신기해하다가, 갑자기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자신에게 늘 요란하게 외치는 말들, 스스로를 칭찬하고, 스스로를 응원하고, 스스로를 감싸고, 스스로를 격려하는 그 모든 말들은 어쩌면 우리가 먼저 그에게 주었어야 할 말이 아니었을까.


사람의 진심은 그를 보는 이들까지 모조리 덩달아 진심되게 만든다. 스마일점퍼 우상혁, 프로즐겜러 우상혁,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한 나라를 넘어 국적도 이름도 모르는 한 사람, 순전 그 한 사람 자체를 응원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게 진심의 놀라운 힘이다.

화면 출처 : 한성윤의 스튜브 잡쓰, KBS 스포츠

올림픽 주 경기장 하늘에 태극기가 걸리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며, 우리나라 선수가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서 꽃다발을 안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자랑스럽고 뿌듯한 일이다. 우리가 이렇게 일등 국가의 국민이라는 우월감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스스로에게 한량없이 진심이던 그의 모습, "저 즐거운 동양 선수는 누구입니까?"라고 묻던 이가 몇 분도 되지 않아 그의 진심에 감화되어 "우! 우! 우!"를 외치게 만드는 우상혁 선수의 그 모습이야말로 황금색 메달보다 더 빛나는 모습, 세상 사람들의 눈앞에 내보이고 싶은 모습이다.


우리가 지난번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을 이젠 거의 기억하지 못하듯, 그만큼의 시간이 더 지나면 이번 올림픽 메달리스트들도 어차피 기억하지 못한다. 여기서 국제대회 우승을 위해 개인에게 엘리트 코스를 밟게 하고 국가와 국민을 표상하게 해서 금메달 개수가 하나 늘어난다면 그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실체조차 모호한 국위의 선양에 금메달 하나가 실제로 기여하는 건 어느 정도일까. 그보다는 자신이 꿈꾸는 일을 즐겁게, 꾸준하게 해 온 이 한 개인의 모습을 나는 세계 사람들의 눈앞에 더욱 보여주고 싶다.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작은 나라는 이토록 자신의 일에 진심인 멋진 사람들이, 멋진 개인들이 살고 있는 나라라고.


며칠 전 공중파 중계에서 한 방송인이 "우리가 원했던 색깔의 메달은 아닙니다만..."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오직 비교와 경쟁만이 삶의 추동력이던 구시대의 멀지 않은 과거 기억이 되살아났다. 메달 수가 곧 국력이라 외치며 황금색 메달에만 환호하던 낡은 생각이 이제는 막을 내리고 삶의 질적 가치를 존중하며 과정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시대가 열렸다고 나는 한동안 생각해 왔는데, 아직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금메달 선호. 그건 어디 붙어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최빈국 시절 그렇게라도 자존감이 필요했을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올림픽뿐 아니라 어떤 경기에서든, 선수의 국적이 무엇이든, 그 한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불사르는 인간에게 갈채를 보낼 줄 아는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자본과 결탁한 엘리트 체육정책에 부화뇌동해서 우승자만 스타로 만드는 데 동참하지 않고 각 종목이 지닌 고유한 기술, 불꽃 튀는 명승부와 사람의 몸이 만드는 동작의 오묘함. 그 자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을 가지고 싶다.


도쿄 올림픽에서 메달 획득에 실패하고 "하늘을 높이 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라고 말했던 우상혁 선수. 그가 이번에 어떤 결과를 낼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2024년 8월 11일에 그가 파리의 하늘을 날고 착륙해서 남길 한 마디를 우린 잊지 못할 것을. 메달 수상자가 누가 되든 파리 올림픽 남자 높이뛰기를 본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가장 오래 남을 울림은 생드니 경기장 하늘에 메아리칠 '우! 우! 우!'일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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