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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것이 세상을 구한다

by 배가본드

있잖아. 되게 촌스러운 질문인데, 사는 건 뭘까?


나 이런 질문 별로 안 좋아해. 다 자기 경험으로 말하는 거고 무엇 하나 틀린 것도 없는데, 내가 암만 깊이 생각해서 말해 봤자 장님 코끼리 만지기밖에 더 되냐고. 어떨 땐 그런 물음과 대답 자체가 삶에 대한 이해도를 서로 앞다투어 뽐내는 듯한 느낌도 있어서 그런 담론에선 도망치고 싶어져.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거야.

어쩌면 삶이란 평생 귀여움을 찾아다니는 여정은 아닐까?




일단 읽으러 들어왔잖아. 그니깐 내 얘기 끝까지 들어 봐. 우린 모두 귀여운 아기로 태어나잖아? 그러니까 어릴 때는 귀여운 걸 굳이 찾을 필요가 없어. 그냥 거울만 봐도 되고, 꼭 그러지 않아도 귀여운 것들은 어린이의 세상에선 사방팔방에 수두룩 빽빽이야. 아동도서의 그림에도, 어린이 만화에도, 심지어 교과서에도.


이젠 청소년이 됐어. 빠른 애들은 그때부터 연애하기도 하는데 걔들이야 귀여운 그 사람을 찾았으니 그런 거고, 그게 아니면 애니메이션이든 아이돌이든 반려동물이든 소품이든 귀여운 걸 찾아 나서지. 반에 한두 명은 공부에만 목숨 거는 애들이 꼭 있지만 그런 애들도 역시나 방구석에 귀여운 인형들 하나 가득 짱박아 놓고 있는 거 알잖아?


성인이 되면? 이제 본격적으로 귀여운 사람을 찾아 연애를 시작하지. 연애는 결국 '나한테 제일 귀여운' 사람을 고르는 것이기도 해. 실제로 연인한테 '귀엽다' 이거 궁극의 애정 표시인 거 알지?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에 빠지고, 연인이 되고, 밀어를 속삭이고, 관계를 갖고, 이 모든 거 다 본능적 귀여움 추구 행위야. 결혼도 세월이 얼마가 지나든 내게 영영 귀여울 바로 그 사람과 하는 거잖아. 연애나 결혼을 안(못)하는 가장 큰 이유도 서로에게 한없이 귀엽고 또 귀여운 그 한 사람을 아직 못 찾았기 때문 아니야? 꼭 그것 하나만 이유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귀여움을 느끼는 대상은 늘 존재해. 귀여운 사람, 귀여운 개, 귀여운 휴대폰, 귀여운 음식, 귀여운 식물, 귀여운 그림, 귀여운 글씨, 귀여운... 귀여운...


자, 결혼했어. 이젠 아이를 낳으려고 해. 왜 낳고 싶을까? 결국 ‘귀여운’ 아이를 낳고 싶기 때문 아냐?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손자 손녀 사랑이 각별한 것도 이젠 늙었다고 무시하고 말도 안 들어서 더는 안 귀여운 자식과는 달리 손자 손녀는 귀여우니까. 그렇게 사람은 늙어서도 귀여움을 찾야. 귀여움은 즐겁고, 귀여움은 안온하며, 귀여움은 아무도 해치지 않으니까.




여기서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 의외로 이 귀여움이라는 게 그게 아니었으면 뭘로도 불가능했을 엄청난 평화를 가져다줄 때가 있어. 흔히 농담처럼 하는 '귀여우니까 봐준다'는 말도 있지만, 아닌 게 아니라 진짜 귀여워서 봐주기도 한다고.


'다롱이'라는 아이가 있었어. 고등학생~대학생일 때 데리고 있던 아이였지. 하루는 김장을 하려고 국내산 통마늘 한 아름을 베란다에 널어놓고는 다롱이만 집에 두고 다들 각자 어디 나갔다 왔어. 그런데 도대체 그 높은 곳에 어떻게 올라간 건지, 널어놓은 마늘 다롱이가 다 까먹어 버리고 온 집구석을 아무리 박박 닦아도 마늘 냄새가 진동했어. 그 층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거기서부터 마늘냄새가 날 정도였어. 다롱이는 다롱이대로 샴푸로 빨고 빨랫비누로 빨고 하이타이로 빨고 바디워시로 빨고 치약으로 빨고 암만 빨고 빨고 빨아도 온몸에서 마늘냄새가 빠지질 않았어. 다롱이 죽도록 혼나고 그날도 다음날도 침대 밑에 숨어서 다롱아 불러도 안 나오고 밥을 줘도 안 나오고 눈이 빨개져서 울고 있는 거야. 그러고 있는 다롱이가 어찌나 귀여운지 마늘이고 나발이고 다 됐으니 침대 매트리스를 들어내고는 고개 돌려 외면하는 다롱이를 안아 올렸어. 그러니까 다롱이가 낑낑 울면서 내 겨드랑이에 코를 파묻는데 거기서 누가 혼을 낼 수 있어.

다 롱 이

12년 전 외국에서 살던 때, 옆집에 미국인 노부부가 골든 레트리버랑 살고 있었어(그 아이의 이름은 '큐'였어). 하루는 동네 마트에 갔다가 그 부부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날 저녁 자신들의 집에 와서 식사 안 하겠냐는 거야. 함께 집으로 갔지. 그런데 문을 여니 큐가 혼자 있는 사이에 벽지는 뜯어 놓고, 쓰레기통은 엎어 놓고, 화분은 다 깨 놓고, 책이란 책은 다 찢어 놓고... 집이 무슨 폭탄을 맞은 것 같았어. 그런데 아니 이 큐라는 놈이 글쎄, 폐허 속에서 죽은 척을 하고 있잖아? 쿡쿡 찔러도, 겨드랑이를 간지럽혀도 꼼짝도 안 해. 30kg도 넘는 늘어진 큐를 주인 할아버지와 둘이서 들고나가서 동네 쓰레기 모아놓는 곳에 눕혀 놨어. 들어와서 창문으로 멀리 내다보니 큐가 일어나서 온몸을 포르르 털고 누구 아무도 없나 확인하고는 이젠 됐다 싶었는지 집으로 총총 걸어와서 현관에 털썩 앉았어. 대문을 여니 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꼬리를 흔들어 대며 댕청하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헤헤거리며 말하는 거야. "난 아무것도 몰라요." 레트리버의 종특 같은 거지. '나름 심혈을 기울여 머리를 굴려 대지만 + 그게 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함.' 어쨌든, 이렇게 되니 그 부부가 큐를 혼내지 못하더라고. 이렇게 큐도 귀여움으로 혼나는 걸 면했어. 다롱이와 차이가 있다면 큐는 다분히 고의적이었다는 거지만, 중요한 건 둘 다 귀여움으로 한 가정에 몰아칠 피바다를 막아냈다는 거지.

골든 레트리버 (from pixabay)

진화학자들에 따르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시절부터 인간은 귀여워지는 모습으로 진화했다고 해. 갈수록 입과 턱이 덜 튀어나오고 얼굴의 굴곡도 완만하게 해서 아기 때의 모습을 최대한 유지하고, 얼굴의 크기도 작고 귀엽게 만드는 쪽으로 진화했다고. 진화가 아무 이유 없이 되진 않아. 그럼 왜? 간단해. '이렇게 귀여운 나를 사랑으로 감싸 주지 않을 거야?' 이거지. 실제로 원시 시대에는 아기가 지금만큼 안 귀여웠고 진짜로 아기를 많이 잡아먹었다잖아. 암만 먹을 게 없어도 아기가 행성파괴급으로 귀여웠다면 그랬을까? 작고 귀여운 생명을 학대하는 건 어지간해서 쉽지 않아. 갓난 송아지를 보면 쇠고기는 먹고 싶지 않아진다 하잖아. 진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확실히 공룡 시대나 매머드 시대보단 귀여운 것들이 많아졌어. 심지어 맹수도 아기들은 천사야. 생존의 관점에서 귀여움이란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어린 생명들에게는 세상에 외치는 유일한 호소야.


이런 생각도 해 봤어. 여기서 진화가 계속되어서 다들 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온누리에 평화가 깃들까? 내가 창조주였다면 아예 만물을 아기로 만들어 버렸을 텐데. 하지만 이렇게 되면 누가 진짜 아기고 누가 아닌지 알 수가 없으니 다들 만나자마자 민증부터 까는 신세가 되고 개나 소나 나이 속여대고 그를 이용한 온갖 사기와 보복이 난무할 테니 배가본드 놈이 잘못 만든 세상은 오래전에 꽥 멸망했겠네.

부엉이의 새끼와 호랑이의 새끼

생각해 봐, 우린 자신도 모르게 노력 많이 하지 않아? 스스로 귀여워지려고. 우린 모르지만 아는 거야. 이 귀여움의 힘을 말이야. 그런데, 자신이 귀여워지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어. 귀여운 걸 많이 보는 거지. 우리들의 마음은 늘 긴장과 미움과 스트레스로 가득해. 그 소란스러운 마음을 보송하게 해 주는 건 바로 귀여운 것들이야. 귀여움을 찾는 건 갈수록 웃을 일이 줄어드는 세상에서 내 마음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야.


무슨 사이비 교주가 떠드는 소리 같아? 정말 그럴까? 실제로 부부가 당장 헤어질 듯 싸우다가도 아기 배시시 웃는 걸 보면 까맣게 잊는다잖아? 아기가 안 귀여웠다면 육아에 지친 세상 부부들 몇이나 남아났을까? 그뿐이 아냐. 온갖 선동, 저격, 갈라치기, 거짓, 과장으로 오염된 유튜브에서도 한편에는 귀여움 콘텐츠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도 이 때문이야. 오죽하면 아기 자는 숨소리, 강아지 헤헤거리는 소리, 고양이 고르릉 소리 ASMR까지 있겠어. 귀여움을 추구하는 건 우리 유전자 속에 코딩된 종족보존 본능이야.


하루 날 잡아서 작정하고 찾아봐. 우리가 일상에서 귀여운 것을 찾는 행동들을 우리도 모르게 얼마나 많이 하고 있었는지. 귀여움 찾기 아니면 내가 귀여워지기, 나는 그 둘 빼면 남는 게 없던데. 어제도 직장에서 일한 거 빼면 소품샵 들어가서 이것저것 골라 담고, 빵집 들어가서 사지도 않을 귀여운 빵을 한참 동안 보고, 서점 들어가서 귀여운 책을 찾아 킥킥 웃고, 동네 어귀의 귀여운 간판 앞에서 멍 때리고, 이젠 집에 들어와서 귀여움에 대한 글을 쓰고 있고. 본능에 아주 충실한 하루를 보냈어.


이건 어때? <오늘 발견한 귀여운 것> 정도로 사진첩 폴더를 만들어 보기. 휴대폰에 귀여운 것들이 모이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고, 세상에 귀여운 것들이 얼마나 많이 숨어있는지 아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귀여움 추구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었는지 알고 놀라기, 그것도 나쁘지 않아.

오늘 발견한 귀여운 것

결국 우리 삶은 귀여움을 찾는 여정이야. 세상도 앞서가는 이가 따라오는 이를 귀여워하는 상황의 반복이고. 20대 눈엔 10대가 귀엽고, 30대 눈엔 20대가 귀엽고, 40대 눈엔 30대가 귀엽고, 어르신 눈엔 자식이 몇 살이든 아기로 보이듯, 나보다 어린 게 귀여워 보이는 건 어쩌면 우리들 언젠간 모두 죽고 없어도 세상은 세세연년 이어지게 하려는 창조주의 의도적 설계인지도 몰라. 아기가 어른한테 아이고 귀엽다 하는 이런 역방향 귀여움이라면 글쎄, 그 자체도 괴상하고 진화학적으로도 별로 의미 없지만, 가끔은 아기한테 '헤헤 아저씨 귀엽다' 이 말 들어도 의외로 나쁘지 않을지 몰라. 최소한 거기엔 어떤 미움도 섞여있지 않잖아. 그걸로 된 거지.


그러니까 일어나 움직이자고.

우리는 오늘도 귀여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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