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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Apr 17. 2022

안녕하세요? 믿고 거르는 INFP입니다.

전에는 혈액형이었던 것 같은데, 이젠 MBTI다. 처음에는 재미로 하는 성격 테스트로 생각했는데, 점점 이걸 맹신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게 느껴진다. 심지어 기업의 채용에서도 MBTI를 묻고, 특정 유형을 예시하며 그 유형들은 아예 지원 불가라고 명시하는 판이다.


나의 MBTI를 사적으로 궁금해하는 사람도 가끔 있었지만 정작 나는 별 관심이 없어서 귀찮아하다 이제야 해 봤다. INFP다. 기업들이 '믿고 거른다'는 그 INFP. 내가 취준생이 아닌 게 다행이다. 아이고 아버지 어머니, 저를 일찍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흑흑 기쁘다).


다행히 좀 일찍 태어난 덕분에 나 자신이 MBTI로 불이익을 당할 일이 당장은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게 왜 문제인지 최대한 많은 목소리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림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유일한 정보는 본인의 응답뿐


MBTI는 몇 개의 질문에 '매우 그렇다, 그렇다, 보통이다, 그렇지 않다, 전혀 그렇지 않다' 등으로 답하면 16개 유형 중 하나로 결과를 알려준다.


여기서 치명적인 문제는, 피검사자의 응답만으로 모든 게 결정된다는 점이다. 결국 모든 피검사자의 메타인지 능력이 만점이라서 자신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개인차는 있지만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지 못한다. 가령 '나는 계획을 체계적으로 세우고 실천한다', '나는 타인의 말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라는 질문에 자신은 <그렇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객관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은 늘 있다(이것들은 모두 실제의 MBTI 질문이다). 결국 MBTI로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는 건 '그 사람이 생각하는 그 사람의 모습'뿐이다.



유형별로 단점만을 부각한다


MBTI 16개 성격 유형 저마다 장단점이 있지만 우리는 특정 유형의 단점만 잘라내어 주목한다. 이렇게 되면 MBTI는 그 사람에게 가장 맞는 것을 찾아서 주려는 도구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사람을 분류해서 배제하는 도구가 되어 버린다.


기업의 채용뿐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에서도, 누가 뭔가를 뛰어나게 잘했을 때 "역시 MBTI가 ○○○○라서 그런지 이런 건 정말 잘하네"보단 누군가와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역시 MBTI ○○○○는 별 수 없구먼." 거의 이게 되지 않던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다지만  사회적(social) 사람만 있는  아니고 사회적이지 않은(unsocial) 사람도 얼마든지 있는데, 나는 인간도 아닌가 보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은 있다. 저명한 고대 철학자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라~"라고 했으니 다들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내가 "요기 보세요, 잉간은 사회적 동물이에영" 이러면 다들 "아니 저놈이 오늘 어디서 뭘 잘못 먹었나?" 할 것 아닌가?



턱없이 비현실적인 가정, '1인 1페르소나'


어떤 사람도 하나의 자아로 살아가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 가족들과 함께일 때, 집에 있을 때, 직장에서 일을 할 때,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할 때, 누구도 똑같은 모습으로 살지 않는다. 잠옷 바람으로 슈퍼에 라면을 사러 가지 않고 직장에 출근하지도 않듯, 다중 페르소나는 여러 역할을 하며 사는 현대인에게는 당연한 모습이다.


그런데 MBTI의 테스트 문항과 결과 산출방식을 보면, 이 테스트는 모든 응답자의 페르소나는 단일함을 가정하고 있다. 애초에 기본 가정부터 잘못되어 있는 이 테스트를 우린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



MBTI조차 이젠 하나의 스펙이 되었다


그렇잖아도 가뜩이나 힘든 취준생들은 챙길 게 하나 늘었다. 실제로 며칠 전에 모 대기업의 자기소개서 양식을 우연히 봤는데, 4개 문항 중 하나가 <자신의 MBTI유형을 말하고, 장단점을 서술하시오>였다.


취업 관련 사이트에서는 MBTI의 어떤 유형이 유리한지 관심이 치열하고, 첫 글자가 외향적 성격을 뜻하는 'E'일 때 크게 유리하다는 것은 많은 기업들의 채용 결과들을 볼 때 이미 정설이다. 아예 특정 유형은 지원 불가로 못 박은 곳도 수두룩하다.


(사진) MBC 뉴스 보도, 2022.3.22.



그렇다면, 나중에는 이렇게 되지 않을까


이제 취준생들은 기업이 원하는 MBTI를 경험칙으로 예상하고 그에 맞춰 지원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기업들이 선호하는 결과가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자연스레 필요로 할 것이며, 각 목표 유형별 MBTI 족보와 모범 답안이 난무할 것이다.


기업에서 하는 말은 늘 똑같다. "그냥 참고용일 뿐이며, 크게 의미 없다." 그런데 면접이 무슨 카페에서 떠는 수다도 아닌 이상, 자기소개서든 면접이든 기업이 지원자에게 의미 없이 요구하는 정보는 없다.



한국MBTI연구소를 비롯, 국내외 전문가들조차도 MBTI를 채용에 활용하는 데는 입을 모아 부정적인데도 마치 무슨 획기적인 리트머스 시험지라도 나온 것처럼 온 나라가 열광 중이다. 외국에서는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하는 MBTI가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주목을 받는 것은, 무엇이든 단순하게 갈라쳐서 계량화하는 한국사회의 취향과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게 갈라치기와 단순화를 계속하면서 우리 사회는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셰익스피어를, 얼마나 많은 빌 게이츠를, 얼마나 많은 아인슈타인을 잃어버려야 할까?


만약 그들에게 필요한 게 아이작 뉴턴이 아니라 나사 한 개라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혈액형별 성격 분석의 상위 호환쯤 되는 MBTI가 기업의 인재 채용에까지 도입되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젠 아예 또 하나의 시험처럼 되어 버린 풍경에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의 장점에 주목하기를 어지간해서 못하는 한국사회 특유의 고질적 문제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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