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공식과 노가다가 필요한 베이킹
우리집엔 결혼할 때 엄마가 사준 광파오븐 기능을 갖춘 전자레인지가 있다. 전자레인지 크기에 오븐 기능이 추가된 것인데, 기능이나 크기가 일반 오븐과 비교하면 택도 없이 부족하지만 날 베이킹에 입문시켜줬고, 생각보다 너무 다양한 레시피를 소화할 수 있었다. 여러가지 쿠키에서부터 바게뜨, 브리오슈, 타르트, 케이크 등.. 큰 오븐 사야지 생각이 무색할 정도로 지난 1.5년간 나와 함께 열일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크기가 너무 작다보니 회전팬 위에 들어가는 원형 팬의 크기가 지름 20cm밖에 되지 않는다. 손바닥 두개로 다 안가려지는 크기다.
언젠가는 귀여운 붕어 마들렌 팬으로 붕어빵을 만들고 싶었다. 어머님이 보내준 찹쌀가루도 있었고, 쫄깃한 반죽 안에 슈크림을 잔뜩 넣은 미니 붕어빵을 만들기로했다. 구할 수 있었던 붕어 마들렌 팬은 30x25였는데, 그렇다면 내 오븐에 들어는 가지만 회전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도 일단 해보기로했다.
팬에 반죽을 담고 오븐을 돌린 순간, 회전판이 돌아가면서 턱, 턱, 둔탁한 소리가 난다. 팬은 오븐 크기에 딱 맞고, 회전판은 그런 사정을 모르고 돌리려다보니 팬이 오븐 벽에 계속 부딪히는거다. 그래서 회전판을 그냥 빼버렸다.
하지만 문제는 또있었다. 광파오븐에 회전판이 있는 이유는? 골고루 익히기 위해서다. 하지만 회전판을 빼버리니 안쪽 붕어만 부풀어오르고 바깥쪽 붕어는 잘 익지 않았다. 그래서 안쪽이 어느 정도 익으면 꺼내서 반대방향으로 넣어줬다. 오븐은 중간에 문 열면 온도가 내려가서 절대 안되지만 방법이 없었다. 살려야했다.
나만 그런진 모르겠지만, 베이킹을 유튜브로 공부하다보면 왠지 나도 똑같이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가득 찬다. 그래서 무모한 도전을 계속하게된다. 계속된 성공 행진으로 자신감을 얻은 나는 다음 타겟으로 초코딸기케이크를 선택했다. 투썸플레이스에서 파는 초코딸기케이크를 너무 좋아하는데, 왠지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유튜브를 찾아보니 비슷한 레시피가 하나 나오는데, 방법은 기존 케이크 만드는 시트를 만들고, 추가로 케이크 겉면을 둘러쌀 직사각형의 길쭉한 시트를 만들어서 케이크 겉면을 둘러주는 것이다. 그 안에 케이크 시트와 초코가나슈, 딸기를 쌓아올리는 방법이다.
케이크가 아무리 작다고해도, 그 주변을 둘러싸려면 꽤 길쭉한 직사각형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집은 최대 14x14 사각팬만이 들어간다. 그럼 시트를 잘라 붙여서 길쭉한 직사각형을 만들어야지. 14x14팬으로 구운 정사각형을 반으로 잘라 7x14짜리 시트 두개를 만들고, 이걸 이어 붙이면 7x28짜리 시트가 나오는데, 이걸로 둘레가 28cm인 원형을 만들었을 때, 그 안에 들어갈 시트의 크기를 구하시오.
학교 다닐때 원주율 공식을 이 때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노트와 펜을 꺼내들고 방정식을 풀기 시작했다. 둘레가 28cm인 원의 지름을 구했고, 그 지름에서 양쪽이 1cm 케이크 시트의 두께로 빠질 것이고, 그렇다면 바그 안을 채워야하는 원형 시트의 지름을 구할 수 있다.
사이징을 한 후에도 제누아즈가 끝까지 익지 않아서 들어올린 순간 왈칵 하고 초콜렛 반죽이 쏟아지는 등,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한 베이킹 흑역사가 존재하지만 어쨌든 완성은 했다. 도구가 부족하니 머리를 쓰게 되더라.
최근에는 머리보다 노가다로 끝낸 일이 있었다. 남편의 직장에는 남편을 도와주는 군인 조교들이 9명 있는데, 모두 똑똑하고 착해서 남편이 워낙 예뻐한다. 그 전에도 몇번 베이킹해서 나눠먹으라고 보낸 적이 있지만, 이번엔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고 싶었다. 크리스마스인데도 부대 밖을 나가지도 못하고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못느낄테니, 조금이라도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레시피는 루돌프 쿠키와 레드벨벳 쿠키. 각 14개정도 만들기로 했는데, 쿠키는 주로 팬에 들어가면 어느 정도는 퍼진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내 작은 팬에 4개만 넣어도 쿠키들이 서로 붙을 수 있다. 실제로 이 끔찍한 일이 일어난 바 있기 때문에 실패를 용납할 수 없는 크리스마스엔 엄격하게 쿠키 3개씩만 넣었다. 총 14개씩 2개 쿠키를 만들려니 28개를 구워야했고, 한번에 3개씩만 구울 수 있다면... 그렇다. 총 10번을 구웠다. 게다가 루돌프 쿠키는 중간에 꺼내서 뿔도 박아줘야했기 때문에 총 15번 오븐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쿠키를 구운 것이다.
그럼에도 루돌프 쿠키와 레드벨벳 쿠키는 매우 순조로웠다. 사실 대성공이었다. 모양도 예쁘고 맛도 너무 좋았다. 자신감이 붙은 나는 "왠지 2개는 아쉬워"하면서 다른걸 만들어볼 궁리를 했다. 트리 머랭 쿠키가 있던데. 머랭만 올리면 돼서 어렵지 않아보이고, 색소도 있으니까 해볼까? 대충 레시피를 쭉 읽어보고 밤중에 머랭을 치면서 남편을 시켜 막대과자를 사오라고했다.
생각보다 쉬웠다. 머랭도, 색깔도, 심지어 내가 어려워하는 깍지짜기도 꽤 예쁘게 나온 것 같았다.
예쁘게 팬닝하고 오븐에 넣기 전, 다시 한번 레시피에서 몇도에 얼마나 구워야하는지 찾아봤다.
100도에 90분? 100도에 90분?? 90분???
믿을 수 없어서 9분을 잘못쓴건가, 하는 생각으로 다른 레시피를 찾았다. 100도에 120분??? 또 다른 레시피를 찾았다. 이번엔 오븐을 열고 구우라고?
90분을 굽는다면 한번에 3개만 구울 수 있는 내 팬에 팬닝되지 않은 내 나머지 머랭 반죽들은 모두 죽어버릴게 뻔하다. 90분은 기다릴 수 없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는 내 오븐은 100도 기능이 없다. 110도가 최저온도다.
작년부터 베이킹을 조금씩 해오면서 느낀건 베이킹은 조금이라도 온도가 안맞거나 비율이 안맞으면 망하는데, 이건 망했구나 싶었다. 그래도 일단 구워는 봐야지하는 생각에 110도에 맞춰서 90분을 돌려봤다.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갔는데, 어느 순간부터 고소한 달고나 냄새가 났다. 꺼내보니 이런 모습이었다.
산불 현장인가?
머랭 쿠키는 저온에서 말리듯이 굽는게 포인트인데, 내 오븐은 저온이 안되기 때문에 그냥 불가능한 레시피였다. 레시피는 꼭 끝까지 읽어야한다.
먹어보니 탄 맛은 나도 바삭하고 고소하니 맛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남은 반죽을 보니 머랭이 다 죽어서 짤주머니가 고꾸라져있었다. 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빛이라도 보게 해주자는 마음으로 대충 팬닝해서 110도에 60분정도 구워봤다. 그 후, 얘들은 픽을 바라는 모습으로 오븐 위를 차지하고있지만 나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결국 트리까지 선물하는건 실패했고, 루돌프와 레드벨벳 쿠키만 예쁘게 포장해서 전달해줬다. 루돌프 뿔이 자꾸 떨어져서 그것도 신경쓰이는 포인트였으나 막상 조교들이 먹을 땐 몇개만 떨어지고 대부분 잘 붙어있다고 했다. 쿠키 10판 구운 보람이 있었다. 남편이 조교들이 먹는 사진을 보내줬는데, 포장을 뜯는 눈에 정말 크리스마스의 기쁨과 설렘이 선했다. 그 때 한 조교는 이렇게 외쳤다고한다. "이게 크리스마스지!!!"
내년엔 미국에 이사가면 왕 큰 오븐이 있을테니 이 처절함도 끝이겠지만 이 작은 오븐의 문을 열때마다, 쿠키를 3개씩 키울때마다 느꼈던 뿌듯함은 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