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8시는 공부시간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남편은 즉각적인 만족을 찾는 유형의 사람이다. 유튜브는 그에게 끊임없는 자극을 선사한다. 잠깐만 켜도 그의 관심사에 대한 너무나 많은 영상들이 쏟아져나오니 2-3시간 넘게 유튜브만 보는 일도 많았다. 게다가 컴퓨터로 보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작은 핸드폰 (한달 전까지만 해도 갤럭시 7 사용자)으로 보려니, 나중엔 눈이 벌개지고 피곤해서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잠드는 일이 많았다. 거의 매 순간을 생산적인 활동으로 채워가는 내 입장에서 이해가 되진 않아서 “유튜브 좀 그만봐” 이런 시정 요청들을 해왔지만 얼마 가지 않아 포기했다. 일단 효과가 없었고, 내 친구들을 포함한 많은 직장인들이 집에서 유튜브나 인스타 아니면 티비를 보면서 저녁 시간을 보낸다는 점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 뒷켠에 걱정은 있었다. “저래서 논문 언제쓰나?”
물론 내가 남편에게 “돈은 내가 벌게, 여보는 배부른 학자해”라고 말했지만 백수가 되라는건 아니었다. 배부른 학자하려면 제대로된 학자가 돼야지. 그리고 이 걱정은 우리 어머님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어머님은 남편을 20년 가까이 키워봤고, 딱히 하란다고 하는 애가 아닌걸 알기 때문에 걱정만 할 뿐, 내색은 하지 않는 상태였다. 그렇게 2년이 지났고, 그 동안 나는 남편에 대해 많은 것을 익혀나갔다.
일단 남편은 눈 앞의 자극에 약하다. 공부해야지라고 생각했다가도 눈 앞에 핸드폰이 있으면 유튜브를 켜서 본다. 내가 이 점을 나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잘 활용해왔는데, 예를 들면 같이 책을 읽고 싶으면 남편 옆에 책을 한 권 무심히 던져놓는다. 그럼 남편은 5분 내로 핸드폰 내려놓고 읽는다. 또, 내가 꼬막 비빔밥을 먹고 싶으면 꼬막을 사놓는다. 냉장고 열때마다 꼬막이 보이면 남편은 꼬막 해감하고 삶아서 꼬막 비빔밥을 해준다.
또한 남편은 완벽한 준비가 필요한 사람이다. 준비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매우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성향 때문에 내가 오해하고 싸운 적도 많았는데, 예를 들면 연애때부터 남편은 나와 새로운 활동을 하거나 새로운 장소에 가는걸 제안하지 않았다. 같이 등산하는걸 그렇게 좋아하는걸 보면 분명 활동적인 사람인데, 여기 가보자, 저기 가보자 이런 말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새로운 활동들을 제안하곤 했는데, 유독 캠핑을 가자고 하면 싫은 티가 역력했다. 처음엔 이유를 모르니 많이 싸웠었고, 그럼에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한강 잔디밭에서 시작해서 글램핑, 당일치기 캠핑, 1박 2일까지 점차 난이도를 높여갔다. 결국 신혼여행을 7박 8일 캠핑갈 정도로 남편이 오히려 캠핑을 더 좋아하게 됐다. 알고보니 남편은 캠핑하려면 준비할 것도 많고, 계획해야할 것도 많으니 압박감을 느꼈다고한다. 나는 빠뜨린게 있으면 가서 사거나 어떻게든 되겠지 (실제로 수건이 없어서 옷으로 머리 말린 적도 있었다) 마음 편한 스타일인데, 남편은 그런 불상사를 방지해야한단 생각으로 준비하니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이다. 대책 없는 스타일인 나랑 살면서 남편은 그 “대책 없음”에 익숙해졌고 지금은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도 많이 줄었다. 나중에는 신혼여행도 7박 8일 캠핑할 정도로 좋아하게됐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뭔가 공부를 하려고하면 남편은 모든걸 갖춰야한다. 아이패드도 있어야하고, 충전이 되어있어야하고, 중국어 공부를 하고 싶을 수도 있으니 이어폰도 있어야하고, 차도 한잔 준비가 되어야하고. 그 준비가 귀찮고 부담스러우니 무한히 미뤄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눈 앞에 준비가 되어있고, 다른 자극이 없으면 바로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 심지어 오랫동안 집중해서 한다.
2022년 새해가 된 기념으로, 우리 부부에게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남편도 함께 꾸준히 할 수 있도록 남편의 성향에 맞게 설계해야했다. 그래서 나는 매일 평일 8시부터 중국어 공부하고, 독서하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다. 이 때, 8시부터 10분동안은 온전히 준비시간이다. 마음의 준비든 (?) 공부에 필요한 준비든, 공부를 시작하고 자리를 이탈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준비물을 챙기는 시간이다. 그리고 8시 10분부터 중국어 n분, 독서 n분, 단 순서는 원하는대로 매일 바꿀 수 있다는 규칙이 있었다. 남편도 꾸준히 공부하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았던 사람이니 내 제안을 매우 반겼다. 그럼 n분을 몇분으로 할까?
내가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새로운 습관을 들이고 싶다면 심리적 거부감 (psychological resistance), 우리말로 하면 부담이 적은 수준에서 시작하라고 했다. 매일 아침 조깅이 목표라면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준의 시간, 예를 들면 10분이나 15분으로 목표를 정하라는 얘기다. 여기에서 착안하여 15분으로 결정했다. 중국어 15분, 독서 15분. 총 30분만 하고, 그 이후에는 원하는 활동을 하면 된다.
1월 3일부터 시작했고, 이번주로 3주차를 마무리했다. 총 15일간 우리는 단 하루 빼고 매일 8시 공부시간을 가졌다. (그 하루 결석의 이유는 집 앞 새로 생긴 술집에서 전과 막걸리를 먹고 취했기 때문이다. 즐거웠으니 가치있는 결석이었다.) 그리고 단 하루 빼고 매일 총 공부 시간은 1시간을 넘어갔다. 예상대로, 한 번 시작하면 멈추기가 더 어려웠다. 중국어든, 독서든 일단 시작하면 30분이 넘어가다보니 보통 9시반 ~ 10시에야 공부를 마쳤다.
긍정적인 변화는 더 있었다. 모멘텀이 생기다보니 공부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에도 공부하는 자세가 갖춰졌다.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통 점심시간에도 일하다보니 다른 활동할 시간은 아침 운동시간 밖에 없는데, 운동하면서 중국어 라디오를 듣고, 새로 배운 표현들을 카톡에 저장해놨다가 저녁 공부시간에 복습한다. 근무 시간에 비교적 여유 시간이 많은 남편은, 틈나면 책을 읽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책을 많이 읽다보니 영감이 생기는지,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스스로 올해 6월까지 지금 연구 중인 논문을 완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오늘 주말 아침에도 우린 차를 마시면서 어제 각자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보통 소설 1권, 비소설 1권 혹은 그 이상 여러가지 책을 동시에 읽는데, 나는 비소설 중에선 다정한 유전자가 살아남는다를 읽고 남편은 Selfish Gene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있다. 마침 진화라는 주제를 다루는 책들이라, 같이 얘기해보기 좋은 주제였다. 결혼하기 전에 나는 독서 스터디를 다녔었는데, 그 때 기억도 난다.
나중에 아이가 생겨도 이 습관이 계속되길 바란다. 저녁 8시가 되면 아이도 스스로 그림책을 가지고 우리 곁에 앉는 그런 풍경을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