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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Feb 14. 2022

아직도 출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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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꿈을 꾼다. 일을 그만둔 지 15년이 다 되어 가지만 직장에 가기 위해 모르는 길을 돌고 돌아 시간에 쫓기고 나 아무래도 늦을 것 같다 전화를 하려면 번호가 희미하게 보이지 않거나 순서가 바뀌어 몇 번을 누르고 또 누르다 잠이 깨는 찜찜하고 개운하지 않은 꿈을 아직도 꾼다.

 



 근무 스케줄 조정이 타 항공사에 비해 자유롭고 징계도 덜 했지만 출근 시간에 대한 압박이 항상 나를 괴롭혔다. 비행이라는 것이 매번 같은 시각일 수 없으니 새벽, 아침, 오후, 늦은 밤 등 참으로 시간대도 다양하게 비행기는 여기저기 출발한다. 처음 집을 함께 썼던 선배가 나에게 했던 말은 "너 잠 잘 자니?"였다. 잠이라면 어디에도 빠지지 않고 하루 종일도 가능했던 나였기 때문에 "물론이죠! 전 머리만 대면 잘 수 있어요."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밤 비행을 위해 해가 쨍쨍한 낮에 잠을 자야 하고 새벽에 일어나기 위해 저녁에 잠이 들기 위해 암막커튼을 쳐 놓고 안대까지 한 채 잠이 들려고 하면 온갖 잡생각에 머릿속이 그렇게 생생할 수가 없었다.


 회사 버스를 타면 교통상황에 따라 늦어도 괜찮지만 그 외의 교통수단은 모두 징계 대상이 되므로 항상 회사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시간은 다가오는데 잠은 오지 않고 설령 잠이 든다 해도 선잠이 들어 그놈의 픽업 버스 놓치는 꿈을 그렇게 꾸게 되니 그런 날은 푸석한 얼굴에 반쯤 넋이 나가 내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꼭두각시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날을 잡아도 꼭 그런 날엔 물, 콜라 같은 단순 메뉴만 찾던 승객들이 블러디 메리, 진토닉, 위스키 코크 등 희한하게 칵테일로만 찾아대 여기저기서 꺼낼라치면 손이 슬로모션처럼 움직여 옆 라인 동료와 스피드를 맞추지 못한 채 허둥대기만 한다. 저 멀리서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상황을 주시하던 부사무장이 무슨 일이냐고 손을 들어 올릴 땐 갑갑하고 미안한 마음에 다친 아이가 엄마라도 본 듯 눈물이 터질 것 같다. 눈치 빠르게 지원이라도 해주는 날은 다행이지만 인터폰으로 다다다다 변명할 새도 없이 폭풍 같은 잔소리만 하고 뚝 끊어버리면 괜히 빠르게 쭉쭉 치고 나가는 옆 라인 동료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내 평생 잠이 내 발목을 잡을 일이라고는 수업 시간에 그렇게 내려오던 고개와 가요무대뿐이다 생각했거늘 다른 곳도 아니고 직장에서 잠 못 자는 고통에 시달릴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서비스를 끝내면 몸은 노곤하고 내가 걸어 가는지 밀려 가는지 모를 극도의 피곤함 속에 앉아서 잠이 든 승객들을 보니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새벽 시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잠든 통로를 둘러보며 걸어갈 때면 빈자리에 몰래 앉아 담요라도 덮어쓰고 나 찾아봐라 하고 싶은 심정인지라 터뷸런스 때문에 전승무원 착석이라는 방송이라도 들으면 나도 모르게 '하느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럼에도 희한하게 휴식시간만 되면 잠이 오질 않고 눈이 말똥말똥해지니 정말 사람 미칠 지경이다. 하지만 가장 큰 위기는 착륙 순서를 앞두고 조용히 하늘 위를 몇십 분씩 선회할 때이다. 앉은 자세에서 정신을 차려 보려고 눈을 크게 뜨고 다리를 꼬집어도 보지만 비행기 엔진 소리마저 자장가로 들리니 내려오는 눈꺼풀은 막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버티고 버티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쯤엔 떨어진 고개가 이리저리 헤드뱅잉을 하거나 옆에 앉은 동료 어깨에 머리를 대고 잠이 들어 침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래서 잠을 못 잔 날엔 꼭 비행기 끄트머리 아무도 보이지 않는 자리를 누가 채갈세라 손을 번쩍 들어 지원하곤 했다. 언젠가 모 항공사 승무원이 착륙을 앞두고 거의 의식을 잃은 듯 잠이 든 사진을 누군가 찍어 올린 것을 본 적이 있다. 보기에도 망측스럽고 안전에도 문제가 있으니 승객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난 그 승무원의 어쩔 수 없는 눈꺼풀을 누구보다 가슴속 깊이 뼈저리게 공감할 수 있다.

 



 아이들을 키우며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 것이 힘들어 아이들보다 내가 더 주말을 기다린다. 나이 들면 아침잠이 없어진다는데 여전히 난 아침에 눈 뜨는 게 제일 힘들다. 그래도 같은 시간에 자고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잠을 설치거나 부담감을 가지는 일은 없다. 꿈속의 나는 여전히 큰 가방을 질질 끌고 헤매며 그놈의 다이얼을 누르겠다고 전화기에 눈을 갖다 댄다. 아마 시간이 훨씬 더 지나서도 그 꿈은 때때로 나를 괴롭힐 것이다. 마치 내 입에 붙어 잊히지도 않는 아이디 넘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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