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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바라중독자 Aug 28. 2023

22 사랑받는 사람



 “이모, 나 왔어.”

 “잘 댕겨왔냐. 춥제? 언능 와서 밥묵자.”


 어느새 흰머리가 드문드문 숨어든 주연은, 늦게 귀가한 선재를 위한 밥을 차린다. 선재의 엄마가 되어주기로 다짐했던 그 날의 기차역, 그 후로 주연은 진짜엄마보다 더 희생적인 엄마가 되어주었다. 마치 원래 선재의 엄마였던 것처럼 주연은 선재를 위해서 살았다. 주연은 아침마다 새벽부터 일어나 뜨끈한 밥을 짓고, 들기름향을 풍기며 나물을 무치고, 개운한 국물도 준비했다. 


 아침의 포근함에 취한 채 문틈 사이로 깨끗한 공기에 전해져 오는 새로 지은 밥냄새, 그것에 선재는 괜히 눈물이 났었다. 집이란 이런 것이었다. 마치 명주네 집 식탁에서 김이 폴폴 나던 김치볶음밥처럼. 포근함, 고소함, 달근함, 나른함 그런 감정들이었다. 새벽까지 뺨맞는 소리가 들리는 곳은 집이랄 수 없었다. 선재는 고소한 밥냄새에 다시 태어난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새로운 아침, 나의 보호자가 차려주는 밥상과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사랑받는 사람. 그런 지극히 평범한 일을 선재는 20살 중반에야 처음 겪어보았다. 선재는 그 날의, 조건없이 온전히 보호받는 그 기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선재는 식탁에 앉아 오늘도 선재를 위해 늦은 저녁을 준비하는 주연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주연은 외모와는 다르게 집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작은 고양이와 강아지, 만화 캐릭터의 피규어들, 작은 소녀인형들, 다양한 솜인형들이 놓여진 패브릭소파.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듯한 인테리어의 집이었다. 주연도 한참 예쁠 시절에 휴게소에서만 지내다보니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하나 생각해본 적 없이 지내고 있었다. 선재와 그곳을 떠나기로 했던 날부터, 주연 역시 자신의 인생과 자신의 취향에 대해 생각하느라 마음이 들떴었다. 선재는 주연이 자신을 구했다고 생각했으나, 주연은 선재가 자신의 고생스러웠던 친조카라는 미안함과 동시에 오히려 지지부진한 인생에서 자신을 끄집어낸 구원자같다고 느꼈던 것이다.      


 주연의 새 집에 들어온 첫날, 폭신하고 향기나는 침대에서 팔을 뻗고 누운 선재는 멍했다. 자신의 인생이 믿어지지 않았다. 집에서는 맡아본 적 없었던 밥짓는 냄새, 따뜻함이 배인 집의 분위기와 밝고 다양한 조명, 믿음직한 누군가가 같은 공간에 있어주며, 불안하지 않게 몸을 누일 곳이 있다는 것. 이것이 정말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맞는 건지 현실감이 없었다. 선재는 하얀 바탕에 잔꽃무늬가 있는 보드라운 솜이불을 쓰다듬었다. 행복했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갑자기 누군가 들어와서 네 집도 아닌데 왜 여기 있느냐며 내쫓을 것만 같기도 했다.      


 “선재야, 자냐? 방 맘에 드냐, 어찌냐. 걍 내 하고 싶은대로 해봤는디.”

 “이모...... 정말 좋아요. 고맙습니다......”

 “애기가 별 말을 다 헌다. 우리, 여그서 재미나게 살아불자. 인자 여가 니 집이여. 나 혼자 삼서 돈쓸데가 없어가꼬 이 집도 수퍼서 우유사득기 현금주고 샀당께. 너는 아무 걱정도 말고 인자 공부만 혀. 알았냐.”

 “네, 이모. 이모가 내 은인이에요.”     


 선재는 이런 주연의 희생에 대해 실망을 주기 싫었다. 구질구질했던 자신의 인생도 싫었다. 이제는 좀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보고 싶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선재는 주연이 해주는대로 모른척, 뻔뻔하더라도 원래 엄마는 주연이이모다, 주연이이모가 내 엄마다, 엄마를 실망시키면 나쁜 아이다,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해본 적 없던 공부도 열심히 했던 것이다. 선재는 의사가 되고 페이닥터로 취직했던 곳의 월급을 모두 주연이 이모에게 주었다. 현금이 두둑히 든 흰 봉투를 큰 손에 건네받은 주연이 이모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흘렸고, 선재를 꽉 안아주었다.      



     

 “이모, 허리는 괜찮아? 다음주부터는 그 집으로 또 가는거야?”

 “이. 오늘까지 현옥이가 가고, 인자 담주부터는 내가 다시 가야제.”

 “이모. 치매할머니들 돌보는거 안 힘들어? 이제 일하지 말고 편하게 살아요. 내가 잘 벌잖아.”

 “아야. 맨날 집에서만 있으믄 뭐더냐. 뎁데 병나야. 움적거리던 사람은 움적임서 살아야제.”

 “그래도, 노처녀가 다 큰 애 키운다고 고생했잖아요. 난 이모가 좀 놀았으면 좋겠는데.”

 “나 가는 집 할매는 얌전빼고 앉아만 있어가꼬 한나도 안 힘들어. 나 가믄, 이미 얼굴에 허옇게 화장 다 하고 소파에 가만히 양산쓰고 앉아있당께. 말썽도 안 부려야. 쪼까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이. 그라도 할매가 옹삭스랍게 안 혀서, 나는 갠춘해. 별시런 할매들도 많단디.”

 “다행이네. 이모가 좋으면 해야지.”

 “그려. 나가 하기 싫어지믄 그 때 니 돈 쓰고 살라니까. 허허헝.”

 “알았어. 이모. 내가 열심히 일해서 이모 다 줄께요.”

 “아따~ 처녀가 애 하나 잘 키워서 노났네이~ 신나부러~!”

 “하하핫. 이모. 나 밥 다 먹었어. 들어가 쉴게.”

 “오야. 우리 선재 밥 잘 묵고, 잘 쉬고, 돈 많이 벌어부러라~”

     

 씻고 자리에 누운 선재는 명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선재도 명주도, 서로에 대한 반가움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선재는 명함만 주고 나온게 약간 후회가 되었다. 명주의 웃는 얼굴이 전과는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웃음 끝에 걸린 미적지근한 우울, 그것은 겪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기에 선재는 분명 명주에게 무슨 일이 있을거라고 예상했다. 전화번호라도 물어보고 올껄. 바보같이.   


 동또로롱도동, 동또로롱도동.

 "어. 집에 왔어. 아직도? 왜? 아이구... 그 아줌마도 참. 알았어. 잘 마무리하고 조심히 들어가."


 지역에서 꽤나 큰 마트 여러곳을 운영하고 있는 선재 남자친구의 전화였다. 일하다 아이때문에 자주 업무자리를 이탈하거나 실수가 잦은 직원이 있어서 꽤나 골치가 아픈 것 같았다. 오늘도 그 직원의 계산실수로 발주가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아직 퇴근을 못 했다고 했다. 선재도 병원을 운영하다 보니 사람쓰는 일이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자르기도 애매하고 난처한 상황일거라는 것이 짐작되었다. 선재는 다음주 수요일에 병원진료가 없으니 오랜만에 남자친구에게 놀러가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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