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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바라중독자 Sep 11. 2023

24 재회

         


 병원 진료가 없는 수요일, 선재는 장도 볼 겸 오랜만에 남자친구 기원이 운영하는 마트에 놀러갔다. 선재는 미리 장을 보고 나서 정신없어 보이는 기원에게 눈짓만 한 후 사무실에 들어가 믹스커피에 뜨거운 물을 붓고 앉아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어, 이모.”

 “선재야, 지금 뭐 허냐?”

 “기원이 만나러 왔어.”

 “너 동기 누구 영동병원에 있다겠지?”

 “어, 근영이가 거기 있지. 왜? 이모 어디 다쳤어?”

 “아니, 내가 아니고, 어르신이 죽 드시고 싶다 해갖고 죽 끓여놨더니 순식간에 그것을 엎어갖고 병원에 와부렀어야. 첨에는 안 그라시드니 점점 말짓을 헌다. 어찌냐.”

 “많이 안 다치셨데? 내가 전화해놓을께.”

 “이, 그려. 뻘겋고 해서 무섭어 갖고 얼마나 다친건지는 모르겄어. 안 그러던 분이 그라니까 오히려 내가 놀라 자빠질 뻔 혔어. 심장이 으디 튀어나가버리는 중 알았당께. 뜨겁도 않은가 소리도 없이 그 발로 집 밖으로 나갈라고 슬리퍼를 신겄다고 혀서 가죽이 다 벗겨져가꼬...... 식겁혀. 아고 심장이여.”

 “알았어. 이모. 어르신 성함 알려줘.”     


 선재는 영동병원에 근무하는 동기 근영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어르신이 빠르게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전화를 끊고 커피를 홀짝이는데, 누군가가 기원에게 굽신거리더니 급히 뒤돌아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 아줌마인가보지? 그 골치아프다는.’


 선재는 한숨을 내쉬는 기원의 표정을 보았다. 기원과 눈이 마주쳐, 너도 참 힘들겠다, 씽긋 미소를 날려주었다. 기원은 선재를 바라보며 포기한 듯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참 착한 사람이다. 그리고는 이내 직원의 부름에 저쪽으로 뛰어가버린다.      


 선재는 할일없이 커피를 들고 어슬렁거리며 사무실 밖에서 사람들 일하는 것을 구경하러 나갔다. 무겁겠다, 열심히들 일하시네. 눈을 돌리니, 물류 창고 뒤쪽에 아까 그 아줌마가 택시를 잡지 못해 안절부절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선재는 문득 그녀에게 다가가 뒷모습에 말을 걸었다.    

  

 “저기, 바빠보이시는데 괜찮으시면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네? 아, 그럼 신세를...... 선재야!”

 “명주야! 너 여기서 일해?”

 “어? 어......”


 몹시 당황한 듯한 명주의 모습에, 선재는 서둘러 말했다.     

 “명주야, 너 엄청 급해 보이니까 우선 내 차 타.”

 “그, 그래. 그럼 부탁할게.”

 “어디로 가면 돼?”

 “영동병원.”

 “영동병원?”     


 선재는 알 수 없는 불안한 예감에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명주는 초조한 얼굴로 아무말 없이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주는 자신의 요즘을 이런식으로 알게하고 싶지는 않았다. 명주가 내킬 때 스스로, 아무렇지 않은 척 선재에게 말하려고 했었다. 잘나가던 내가 마트에서 채소포장이나 해,라고. 그런 상황이라면 자존심따위 상할 일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선재의 차를 얻어타고, 못난 모습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들켜버린 것이다.          


 선재 역시 명주를 힐끗 보았지만 선뜻 질문을 하기가 힘들었다. 명주는 그날 카페에서도 불안해 보였다. 뭔가 말 못할 힘든 일이 있나보다, 짐작만 할 뿐. 힘든 시간을 이겨내는 것은 스스로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제3자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선재는 잘 알고 있기에 그랬다. 그렇다 하더라도 선재는 명주와의 묵은 우정의 힘을 믿고, 용기내어 물었다.     


 “명주야, 무슨 일 있어? 누가 병원에 계셔?”

 “......엄마가 다쳤데. 나 엄마랑 살아. 예전처럼.”     

 명주는 엄마처럼, 윙크를 찡긋하며 별 것 아닌척 밝게 웃어보이지만 눈 끝에 슬픔이 서려있었다.     

 “너 원래 엄마랑 되게 잘 지냈잖아. 근데 어디 다치셨데?”

 “어. 화상같아. 죽을 엎으셨나봐.”

 ‘!!!!’     


 선재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럼, 이모가 모시는 어르신이 명주 어머님이라는 말인가? 명주 어머님이...... 치매? 선재는 숨이 막히고 발작적인 기침이 나왔다. 엄마가 아빠에게 맞던 그 새벽처럼.      


 “선재야, 너 괜찮아?”

 “콜록, 콜록, 콜록...... 허억 콜록, 콜록. 콜록! 콜록! 괘, 괜찮...... 콜록! 콜록!! 괜찮아. 1분만 콜록, 콜록!”  

   

 선재는 눈물이 났다. 왜, 왜! 태어나서 내게 처음 칭찬해주었던 어른인데, 내게 처음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여주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집밥을 해주었던 어른인데, 정떨어지는 부모를 대신해 나를 진심으로 도와주려던 분이었는데, 치매라니. 선재는 기침을 하며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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