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구우...... 이, 이게 어, 어떻게, 어떻게, 사, 사장님!”
“......누구여?”
“저 기원이 아빠에요. 기, 기원이 아빠요, 사장님.”
주연은 정례와 기원이 아빠의 만남 옆에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꼬장꼬장한 어르신이라고 해도 그리워했던 사람이 있었는가보네, 하긴, 개인의 과거를 타인이 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니. 주연은 혼자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러다 꿈뻑거리기만 하는 정례의 얼굴을 살피고는 대화를 거들기로 했다.
“어르신, 기원이 아빠시래요. 기억 안 나셔요?”
“기원이?”
“사, 사장님 그렇게 없어지시고, 제가 얼마나 흐흐흑......”
“사돈어른, 걱정 마세요. 어르신 기억이 자주 꺼지지는 않으시니께. 기억하시는데 쪼까 오래 걸리시는 것 같은디. 이따가 선재 만나기로 했담서요? 오늘 선재가 신약연구하는 제약회사 출장이라 자리에 없응께 이따 저녁에 어르신 얘기 물어보시고이? 근디 어쩌게 또 이러게 두분이 아신다요? 참 사람사는 일 한 번 신기하고만요."
그 때, 정례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기원이 아빠를 보며 말한다.
"기원이 아빠고만, 기원이 아빠. 어떻게 나를 찾았어? 찾지 말랑께."
"사장님, 이제 기, 기억이 나세요? 그렇게 가시면 어떡해요. 왜 여기서 이렇게 계, 계시는 거에요."
“기원이 아빠도 많이 늙었고만. 혹시 우리 영석이 소식은 아나?”
기원이 아빠는 주연을 슬쩍 본다. 주연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준다.
“사장님 없어지시고 어, 얼마 안 있다가 여, 영석이도 실종되었었어요. 얼마 뒤에 주, 죽었다고 연락 받았고요. 죄송해요, 사장님. 제가 여, 영석이 잘 챙겼어야 했는데 다 제, 제 잘못이에요.”
“......”
정례는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런 표정도 말도 없이 침대에 눕는다. 아들이 죽은 것을 안다고 했다가도 생전 처음 듣는 것처럼 안 들으려 하는 때도 있었는데 오늘은 어떤 속내인지 잘 파악이 되지 않는다.
“자네, 반갑네이.”
“사, 사장님. 이제 제가 모실께요. 치료받으시는 동안 제, 제가 사장님 계실 곳 알아봐둘께요. 사장님이 주신 가게들도 기원이랑......”
기원이 아빠와 정례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주연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 때, 누군가 주연을 부르는 소리에 주연은 뒤를 돌아본다. 현정이었다. 현정은 약효가 좋아 오늘 퇴원수속을 밟고 짐을 챙겨 나오는 중이었다.
“선생님. 저 이제 가요.”
“아이고오. 수고 참 많으셨어요, 어르신. 나 진짜 너무 좋고만요. 어르신 얌전빼고 양산 쓰고 거실에 앉아계셨던 것이 엊그제 같은디...... 인자 댁에서 편하게 쉬셔요잉? 참말 축하드린당께요. 맛난거 만들어서 조만간에 저희집에 초대할텐께 주변 정리되시는대로 또 보자고요. 들어가셔요.”
“정말, 정말 고마워요. 선재가 이모 닮아서 좋은 사람인가봐요.”
현정의 말에, 주연은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어보인다.
“엄마, 이제 가자. 선생님, 저희 가볼께요. 또 봬요.”
명주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매일매일이 요즘 같다면 그것은 천국이었다. 엄마의 치매가 완치 되어, 진오를 엄마에게 맡길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제 더이상 마음 졸일 필요가 없었다. 적성에 맞지 않는 마트 일도 그만하기로 했다. 틈틈이 이력서를 넣어두었던 곳 중 한 군데에서 출근해도 좋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비록 예전만큼 크고 좋은 직장도 아니고 월급도 훨씬 적었지만 과거 경력에 관련된 일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선재의 남자친구가 사장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마침 새로운 직장에 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출장 중이라 전화해도 못 받을 선재에게, 명주는 고마움의 메시지를 보낸다.
‘우리 지금 나가는 중. 너에게 신세 많이 졌다. 정말 고마워. 조만간 이모님이랑 같이 보자.’
현정은 고개를 들어 내리쬐는 햇살을 한껏 느꼈다. 환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볕을 쬐여본 것이 언제였나.
“엄마, 집에 가면 뭐하고 싶어?”
“밥짓고 청소, 빨래.”
“엥? 시시해.”
“난 너희들과 함께 일상을 보내는 일이 가장 좋아. 엄마가 그동안 너랑 진오에게 못해준 것들, 다 챙겨주고 할거야. 엄마는 그런 시시한 일들이 하고 싶었어.”
“아버지, 여기에요!”
선재와 기원은 식당에 미리 도착해 있었다. 기원이 아빠는 그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방긋 웃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누군가가 또 앉아있었다.
“아버지, 인사하세요. 여기는 해빈미술관 최관장님이세요.”
“안녕하십니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 네, 네.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관장님이 시간 내시기가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같이 모셨어요.”
기원이 아빠는 갑작스러운 낯선 사람의 등장에 당황하여 굽신거리며 악수를 했다. 선재는 기원이 아빠의 그림이 좋았다. 이 그림들이 병원 안에만 갇혀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우연한 기회에 신인작가 발굴에 관심이 있던 미술관장님을 소개받게 되었다. 선재는 몇가지 그림들을 소개했고,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화백님 작품은 몇 점 미리 보았습니다. 조심스럽지만, 듣기로 약간의 장애가 있으시다고 알고 있는데 오히려 그런 점이 예술적 표현에 더욱 도움이 되신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특함이 느껴졌거든요.”
“감사합니다. 어휴, 화, 화백님이라뇨. 저, 전 그냥 취미로 그린거라.”
“그래서 말인데, 괜찮으시다면 저희 미술관에서 선생님의 작품을 전시를 할 수 있을까요? ‘낯선 조각을 채우는’ 이라는 주제로 전시 프로젝트를 추진중이거든요. 화백님의 독특함이 충분히 그 조각을 채워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원이 아빠는 식사하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고, 소화제를 먹어야 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작품의 전시를 위해 몇 점 더 그림을 그리고, 틈틈이 비행기를 조립했다. 어느 가을, 해빈미술관을 시작으로 [경계선 지능장애를 가진 화가, 양영진]으로 여러 미술관에서 전시를 이어갔다. 이제는 기원이 아빠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기원이 아빠는 신인화가상을 받은 날, 자신의 이름이 적힌 상장과 비행기를 들고 정례의 작은 아파트에 갔었다. 노환의 정례는 조용히 숨소리 없는 잠을 자고 있었다. 기원이 아빠는 그 옆에 앉아 조용히 눈물을 떨어뜨렸다.
둘은 간단히 라면을 끓여먹고 산책을 나왔다. 야간의 선선한 바람을 쐬러 나온 손을 맞잡은 선재와 기원. 벚꽃이 눈처럼 날리는 그런 평범하고 드물게 한가한 날이었다. 구겨진 나무 옆, 공원의 낡은 벤치가 보인다. 그 옆에는 작은 버섯이 솟아있다. 둘은 잠깐 앉는다.
"선재야, 우리도 결혼할까?"
"그래. 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