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도도한 현

by 따바라중독자

요즘은 바쁘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아이의 방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큰 소리와 별 볼 일 없는 연주실력에 아이는 나를 그다지 자주 꺼내보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아이는 오케스트라에 입단했다. 월요일 저녁마다 연습실에 사람들이 모이는데 들리는 소리들로 미루어보아 전공자들은 아닌 것 같다. 첼로도, 호른도, 플루트도, 다른 바이올린들도 소리들이 삐걱거린다. 이런 소리의 악기들이 모여도 오케스트라가 되는구나. 훗. 그래도 다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열심인 것을 보면 대단하다.


커튼이 열리고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사람들(나의 아이, 아줌마, 할아버지, 학생, 선생님)의 손에 함께 연주되었다. 물론 아마추어들의 연주솜씨는 보잘것없으니, 뒷자리에 전공자들의 도움이 있었다. 사람들은 참 희한하다. 이런 실력으로도 무대에 서겠다고, 엉망인 채로 연주를 하면서도 나름대로 엄청나게 노력한다. 나를 제대로 연주하려면 최소한 수년은 걸린다. 나는 어려운 악기이다. 웬만큼의 연습시간이 매일 받쳐주지 않는다면 연주할 용기가 나지 않을 텐데 잘하지 못해도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들 한다. 그래서 아마추어 연주자를 응원한다. 아마추어들의 손에 쥐어진 나 같은 악기들은 다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이는 연습한 대로 집중하였다. 긴장의 숨소리와 식은땀의 습기가 느껴졌다. 아이의 힘찬 활질이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 잘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틀리지 않았다. 그래 좋아. 소리가 곱지 않아도, 비브라토(바이브레이션)가 잘 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나의 아이에게만큼은 스트라디바리우스 (스트라디바리 가문에서 만든 악기, 명장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가 만든 현악기를 지칭)이니까 나는 너의 손끝에서 가장 효과적인 울림을 주도록 해볼게. 아이의 첫 번째 공연은 무사히 완성되었다.




다른 아이들은 책만 보아도 시간이 모자랄 고등학생 시절, 나의 아이는 공부보다 나를 더 좋아했다. 아침 7시 20분 등교, 밤 11시 40분 하교. 악기를 연주할만한 시간이 없었을 텐데 아이는 방법을 찾아내어 나를 매일같이 연주했다. 아이는 다들 공부하고 있을 저녁자율학습 시간에 현악부라는 핑계로 매일 음악실에서 2시간씩 나를 연습했다. 고등학생이 공부를 안 하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저녁시간의 음악실, 아이의 학교 음악실은 최신식으로 꾸며진 곳이었다. 그랜드 피아노와 초대형 TV가 설치되어 있었고, 여러 가지 유명 앨범들도 구비되어 있었다. 현악부를 위한 악기실이 따로 있었고, 선생님 방에는 키보드가 있어 음악실은 아이에게 천국이었다. 매일같이 와서 나를 꺼내어 연습하다가, 갑자기 피아노를 치겠다고 그랜드 피아노의 무거운 건반에 더욱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신의 연주실력에 대해 실망도 하다가. 훗. 얘는 그냥 다 틀린다.


아이는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이 온 친구라는데, 아이는 이 친구에게 같이 나를 연주하자고 권했다. 친구는 흔쾌히 같이 하겠다고 한다. 친구는 대학에서 부전공으로 나를 계속할 수가 있었고, 아이는 아예 다른 전공을 택하여 나를 자주 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방학 때마다 실력이 늘어난 친구에게서 나에 대해 학습했고,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이는 결혼과 출산을 하며 나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졌다. 그러다 아이의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가고 나서야 저렇게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단원이 될 수 있었다. 부끄러웠던 아이는 아무에게도 공연한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멀리 있는 그 친구에게만큼은 얘기하고 싶었다. 아이와 친구는 진심으로 함께 즐거워했다. 아이는 친구에게 얘기했다.

"너 은퇴하고 나서 우리 꼭 같이 오케스트라 하는 거다? 지~인짜 약속!"

"그래~ 당연하지~ 꼭 같이 하자~^^"


세상이 코로나로 뒤덮이고 나는 다시 아이방 한쪽에서 자리를 지키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는 나를 잊지 않는다. 꺼내어 보지 않아도 눈길이라도 준다. 쓰윽 손길이라도 스친다. 아이의 두 번째 공연은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두 번째 공연이 있다면 그때보다는 조금 덜 떨고, 더 잘할 수 있겠지. 나는 너의 스트라디바리우스이자 과르네리이다. 나는 항상 너를 기다린다. 내 자리의 습도와 온도를 맞춰주지는 않는 무던한 너이지만 언젠가 너의 빛나는 연주를 위해 나는 현들을 무리 없이 제자리에 잡아두고 있을게.



"원장님, 저... 한 시간만 일찍 퇴근해도 될까요? 네, 감사합니다."


연주회가 있는 날이다. 1주일에 한번,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서 수개월 동안 연습했다. 끼긱끼긱, 바이올린 소리라는 것이 이럴 수도 있었다. 모자란 실력으로 어쨌거나 반복이 거듭되어 손가락도 어쩔 수 없이 끌려와 제 자리를 짚긴 하는 그런 곡들을, 무대 앞의 수많은 눈과 귀들 앞에서 풀어놓아야 한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전공이 아니어도, 무대에 설 수 있다니. 저기 관객석 중간에 우리 가족이 보인다. 엄마, 아빠, 언니, 오빠, 조카들까지 다 왔다. 부끄러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남편이 친정식구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갑자기 다 안 하고 싶다. 휴......


중학교 시절, 공부도 잘하고 집도 부자라서 유명했던 몇몇의 친구들이 학교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학교 잔디밭에 보면대를 놓고 서서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모습이었다. 악기를 목에 받치느라 턱을 들고, 악보를 보기 위해 눈을 내리깐 도도한 그 자세를 동경했던 나는, 그 친구들이 연습을 할 때마다 넋을 놓고 구경하곤 했다. 그때 당시에만 해도 현악기는 부잣집 아이들만의 것이라 평범한 나와는 다른 세계의 악기라는 생각이었음에도,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바이올린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방학과제는 다음의 음악을 듣고 표현하기입니다."

- Keys to imagenation

- Reflection of passion

- Within attraction

- Santorini


중 2, 미술 선생님은 야니의 팬이셨던 것 같다. 나는 이때 야니의 음악들을 처음 들어 보았고, 이것은 서태지나 윤상, 나비야 정도로 알고 있던 나의 좁아터진 음악 세계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그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Within attraction(5분 17초부터)'에서 바이올린을 그냥 가지고 놀던 '카렌 브릭스'라는 흑인 바이올리니스트였다. 흑인 특유의 바운스와 바이올린이라는 도도한 악기가 어우러져 어떻게? 어떻게 저렇게 하지? 무슨 악기를 저렇게 숨 쉬듯 연주할 수 있는 거지? 심지어 진지하고 엄숙하다는 편견이 있던 심포니에서, 빨간 드레스를 입고 자연스럽게 몸을 흔들며 장난스러운 눈빛과 몸짓을 주고받으면서도 정확한 음을 짚어내었다. 너무도 자유분방한, 그러나 해야 것은 기꺼이 하는. 가능한 것을 보여주되 예의바르게 틀을 깨버린 카덴차를 보았다. 소름이 끼치고 몇 날 며칠 머릿속에서 그 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나는 바이올린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렌 브릭스, 내겐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야니 유튜브 Within attraction 캡쳐본)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는 보통 네다섯 살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을 한다고 한다. 나는 17살에 처음 바이올린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현악부에 가입하여 파트장을 맡아 음악실 키를 선생님께 받았다. 선생님들은 수순대로 자연히 같은 동문의 학교를 선택한 줄 알지만 사실 이 학교에 현악부가 없었다면 현악부가 있는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것이다. 나는 우수한 학생들이 모인다는 이 고등학교를 성적을 위해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내게는 그런 건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카렌 브릭스'가 되고 싶었으니까.


나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친구를 꼬드겼다. 피아노 실력이 이미 수준급이고 공부도 잘하던 얌전한 내 친구는 흔쾌히 나와 함께 현악부에 동참했다. 지금 친구는 멀리 있지만, 언젠가 우리는 나중에 꼭 같은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되는 것이 꿈이다. 바이올린은, 시작이 늦었어도 전공하고 싶을 정도의 매력이 있는 악기이다. 너무 어려워서, 잘 안되어서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래도 결국 그 앞으로 나를 이끄는 힘이 있는 악기이다. 어릴 때에는 전공하지 못하는 현실이 슬프기도 했지만 전공이 아니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내가 잊지만 않는다면 바이올린은 항상 내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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