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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긍정 오뚜기 Feb 02. 2024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오묘한 감정과 긍정적인 사고

 알바를 시작한 지 딱 한 달이 되었다. 손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늘었고 포장을 하는 날에는 손끝에서 피가 났다. 하지만 다음 달에 있을 입금일과 이 일을 그만두면 이 조건의 다른 알바를 구하는 건 더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그만둘 수가 없었다. 기본 9시간에서 12시간씩 공장에서 일하면서 나는 매일마다 힘들다고 생각하면서도 매일마다 새로운 것을 배웠다. 일을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이 무엇이 부족한지가 눈에 보였고 다른 사람들 말처럼 내가 세상물정을 너무 모르는 건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같이 일하던 분은 내게 스물한 살이면 놀고 싶지는 않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놀고 싶다고 대답했다. 주말도 있고 한 달에 한 달씩 휴가도 있지만 12시간씩, 때로는 야간에 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복지도 좋고 돈도 셌다. 한 달을 더 하겠다는 근로 계약서를 쓰고 난 후 그렇게 일하면서 자존감이 낮아지고 죽을 듯 힘들다 생각하면서도 그만두지는 못하는 나 자신이 보였다.


 주말이나 휴가 때는 내 돈은 물론 부모님 돈 쓰는 것 또한 꺼려졌다. 한 달에 한 번 가게 된 미용실도 물가가 올라서 일반 커트가 기본 만 이천 원은 넘어섰다. 가격이 그보다 조금이라도 싼 곳을 찾아가면서도 돈 아까워하는 내 모습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 돈도 많이 벌면서 왜 그렇게 아끼냐는 동생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일하고 돌아와 매일마다 짜증을 내며 집안일을 할 때 계속 불평하는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리고 주말마다 내가 찾아서 하게 되었다. 일하고 들어와서 집안일까지 하면 얼마나 짜증이 나는지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동생은 아직까지 그 기분을 모른다. 더군다나 사춘기가 와서 한 마디도 안 지고 사사건건 따지려 든다. 예전 같았으면 대판 싸웠을 것을 이제는 그게 에너지 소모적인 일인 것을 알기 때문에 차분하게 이 싸움을 빨리 끝낼 방법을 찾는다.


 가장 좋은 방법은 어느 정도 져주는 것이다. 동생이 잘못한 점은 확실히 잡아서 말하고 동생이 하는 말 중 맞다고 생각되는 것은 인정해 주는 것이다. 물론 가끔은 기강을 잡는 게 도움이 될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이 시기의 내 동생은 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서울 게 없는 그 나이임을 말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과거에 저러지는 않았나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내가 현재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가끔은 이렇게 내가 타인만 먼저 생각하다가 내가 힘든 건 누가 생각해 주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스스로보다 타인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는 것은 장단점이 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지만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가 지쳐가고 있는 것이다. 집안일은 누구에게나 끝이 없다. 나 또한 그것을 경험하면서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밤까지 일하러 나가는 부모님 앞에서 힘든 티를 내기도 싫었고 고작 이 정도로 힘들어하고 싶지 않고 싶다는 오기도 생겼다. 하지만 일하다 다친 손끝은 설거지를 할 때 다시 아픔이 되살아났고, 청소기를 돌릴 때는 알바할 때 했던 실수들과 혼났던 일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공장에서 청소를 하는 것조차 서툴렀던 나는 이제 한 달이 다 되어가자 슬슬 조바심이 났다. 솔직히 알바를 시작하기 전부터 걱정했던 부분이었다. 스스로 알바를 찾아보던 때에 내가 지원을 해놓고 면접은 못 간다고 다시 문자를 몇 번이나 보낸 것은 도망치고 싶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격은 급한 데다 동작은 느리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일머리가 없는 게 최악이라고 했고, 나는 인정하는 사실이었기에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고 도전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 때 우울증에 걸려 어리석은 짓을 했을 때 나는 이미 내가 스스로를 놓아버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때 내가 동작이 빠릿빠릿하기를 하냐고 상황판단이 빠르기를 하냐고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대체 뭘 하고 살 수 있겠냐고 하면서 내가 계속 특목고 입시 학원을 다니길 바라셨다. 느리더라도 그나마 해둔 게 있으니 공부라도 하라는 말이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맞는 말이라서 더 아프게 다가왔다. 그때는 내가 정말 커서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될까 봐 불안감에 떨면서 다 끝내고 싶었다. 성인이 되었다고 그 불안감을 다 떨쳐낸 것은 아니다. 다만 직접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서 버티는 법을 배워가고 있을 뿐이다. 학점을 높게 받고 토익 점수가 높았지만 학교에서 지원해 주는 단기 파견에서 자비를 보태야 하는 부분이 생겼고 그 당시 돈이 없었던 나는 포기 각서를 쓰고 앞으로 2년 동안 어떤 해외에도 학교의 지원으로는 못 가게 되었다. 엄마는 하필이면 그때 대출금을 갚아야 한다고 내게 있던 적금을 빌려가셨고 나는 그때 공장 알바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되든 안 되든 직접 부딪혀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마다 그만두고 싶다. 예상을 했지만 나는 일을 하다가 실수가 잦았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일을 마치고 녹초가 된 상태에서도 메모장에 실수했던 부분을 기록하고 주말이 되면 그 내용을 A4용지에 보기 좋게 정리해서 읽고 또 읽었다. 주변 사람들은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그랬지만 나는 내가 지적이나 비판에 유독 취약한 성격임을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에러를 줄이려고 한 것이다. 그게 효율적인 것이라 생각했고 그 결과 에너지는 더 깎였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내가 일을 잘한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일을 못하고 융통성이 없다고 했다. 한 달이 지나도 여전히 혼나기도 하고 가끔은 칭찬도 받지만 나는 더 이상 이에 대해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할 때 열심히 하고 쉴 수 있을 때 최대한 효율적으로 쉬고, 무엇보다 내 멘탈을 관리하는 법을 구축시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결과 일할 때는 무표정을 유지했고 사람들과의 교류도 거의 없었다. 아빠는 내게 일하는 곳에서 인맥을 쌓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그게 도움이 된다고 했지만 나는 일하는 것만 해도 진이 다 빠졌기에 상관 쓰기 싫었다. 아빠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걸 다 잡을 생각이 없다. 동시에 모든 걸 다 잘하려는 것은 내게 있어 욕심이다. 나는 느린 사람이니까. 대신 나는 포기는 잘하지 않는다. 한 달이 다 되어가자 주변에 한 달만 하고 힘들어 나가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고비가 왔다. 교육을 받았지만 여전히 실수가 나왔고 정신을 더 차리려고 하면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현장에서는 내가 세상에서 마음이 가장 단단한 사람이라고 되뇌면서 억지로 미소를 지었고 집에 가서 샤워를 하며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누군가는 나에게 고작 알바하는데 그렇게까지 하냐고 말했다. 다른 누군가는 내게 힘들 거라고 이 알바를 하지 말라고 권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나보고 대단하다고 했지만 엄마 말처럼 이 세상에 12시간씩 일하는 알바생이 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아주 많다. 나와 함께 일하는 분들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밤에 맥노날드나 의류 매장 안을 바라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나만 이렇게 힘든 것이 아닌 게 사실이다. 어쩌면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었는데 나만 늦은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게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나는 당장 실수를 더 줄이고 주변의 비판과 지적, 그리고 뒤에서 나에 대해 하는 말들을 대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실수를 하고 나면 주변 사람들이 다 나를 하찮게 볼까 노심초사하는 습관 때문에 몸에 무리가 가서 자주 아팠다. 그 결과 일을 하지 못하는 나의 손해였고, 나는 아픈 것이 너무 짜증이 나고 서러웠다.


 감기약과 장염약을 먹고 버티며 일하는 것에 대한 불쾌함은 이제 견딜만한 것이 되었다. 손끝에서 흐르는 피도 밴드와 휴식으로 멎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계속 일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픈데도 알바에 가야 하는 때에 정말 그만두려 했었다. 순간의 감정에 치우친 행동이었다. 이에 이를 눈치챈 엄마는 화를 냈고, 나 또한 화를 내면서도 밖으로 나가 약국으로 향했다. 주말이라 병원은 문을 다 닫은 상태였고, 응급실을 가기에는 돈이 아까웠다. 그리고 응급실을 갈 정도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심하게 아픈 딱 짜증 나는 상태였다. 하지만 약을 먹고 결국 나갔고 나는 그날 계속 실수했던 부분을 극복하고 일을 더 잘하게 되는 계기의 날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어떤 사람들은 알바를 한다고 사회 경험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가는 곳은 일은 힘들지만 사회 경험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스스로 깨닫는 게 많아질수록 더욱더 불안해지고 무섭지만 그와 동시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이걸 지금 경험하게 되어 참 감사하다고. 10년 뒤에, 회사에 진짜 입사하고 나서 이걸 처음 경험한다면 그때는 정말 모든 걸 놓고 싶어질지 모른다고. 혹여나 미래에 그런 일이 있게 되더라도 지금의 경험으로 극복해 내는 법을 버티는 법을 통해 이겨낼 자신이 생겨남에 다행이라고. 그런 생각과 함께 고등학생 때가 떠올랐다. 외국어 고등학교를 뛰쳐나오고 가출을 하고 한창 방황을 하며 귀중한 시간을 날렸던 그때 내가 더 열심히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망상과 함께 그 시간은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그 시간 덕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복잡하다.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는 게 너무도 많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나도 모르는 자신감이 생겼다. 어떤 일이 닥쳐와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적어도 이제부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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