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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

내 안의 트라우마와 직면하다

by 몽도리

나는 이때까지 나만 힘든 줄 알았다. 우울했던 시기에 깜깜했던 터널 속 나 혼자 있는 줄 알았으니까. 그 옆에 나를 계속 바라보던 사람들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 터널 속에 들어가고 나오기를 반복하다 문득 내가 가장 불편해하는 진실을 직면하게 되었다. 다른 건 다 괜찮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미처 고치지 못한 우울의 잔재 두 개, 폭식과 과소비였다. 인지하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던 중, 부모님이 나를 데리러 오셨다. 긴히 할 얘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또 어른인 나를 혼낼 부모님을 탓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집 근처 카페로 데려가더니 내가 먹고 싶은 걸 시켜주시고는 내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충격적인 얘기를 하셨다. 아빠가 우울증에 걸린 것 같아서 병원에 데려가고 싶다는 것과 엄마 아빠 둘 다 액팅아웃 증세가 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결정타 아빠의 자존심이자 우리 가족의 지금까지의 암묵적 비밀이었던 빚 내역.

나는 빚 내역을 내 눈으로 보면서 귀로 설명을 들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귀에 꽂혀 피가 되어 흘렀다. 원래는 부모님의 노후 자금이어야 했던 작은 돈이 몇 년 간 오빠와 나, 동생의 교육 뒷바라지에 굴려지고 굴려져 커다란 눈덩이가 되어 부모님을 짓누르고 있었다. 몇 억에 달하는 돈, 파산 신청과 개인 회생을 하려고 생각도 했던 엄마는 자책을 했다. 아빠 몰래 한 교육 투자였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우리에게 교육적으로 투자하는 것을 반대하셨다. 엄마는 그런 아빠와 매번 언쟁을 벌이며 우리 학원비에 돈을 부으셨다. 이제 엄마 아빠 앞에는 거대한 빚과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자식들, 그리고 앞으로 지원을 더 받아야 하는 막내가 전부였다. 더군다나 외할머니가 갑자기 편찮으시기 시작하셨다. 파킨슨 병이었다. 내 아픔을 유일하게 정확히 이해해 주시던 외할머니는 어릴 적부터 내 편이셨다. 그런 할머니께서 아프기 시작했는데 나는 이기적 이게도 엄마가 걱정됐다. 엄마도 정신과에 아빠를 끌고서라도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할머니까지 아프셨다. 참고로 할머니는 공황장애도 가지고 계신다. 나는 벅찬 현실에 눈물이 났다.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막막했다. 고시원으로 돌아가 가만히 그 카페에서 엄마와 나누었던 얘기를 되짚어 보았다. 엄마는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으며 내 손을 잡고 물었다. "몽돌아, 엄마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정말 이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엄마 좀 도와줘. 어떻게 해야 해." 처음이었다. 엄마가 무너지고 내 손을 잡고 이렇게 울며 도와달라고 한 게. 나는 순간 나만큼이라도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엄마의 탓이 아니라 오빠와 내 탓이라고, 아니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니 자책하지 마라고. 빚은 우리가 꼭 갚으면 안 되냐고. 물론 엄마는 우리에게 빚을 물려줄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단호히 말했다. "갚을 거야. 이번 생에 다 갚는다는 기대는 버린 채." 나는 밀려오는 내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엄마를 다독였다. 그리고 아빠를 안심시키기 위해 따로 얘기해 보겠다고 하고 학원을 가고 싶어 하지만 빚으로 인해 못 가는 막내 동생 뒷바라지를 그 자리에서 약속해 버렸다. 내 앞가림 하나도 못 하던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싶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어학원에서 번 돈 중 오만 원을 매달 동생에게 주고 있다. 동생 영어 공부도 틈틈이 시켜주고 고등학교에 대한 궁금증도 한 시간 넘게 답해주었다. 동생은 고교학점제로 바뀐 사회에서 1학년을 내년에 맞이할 상황이었다. 불안함도 많고 막막함도 많아 보였다.

나는 엄마와 했던 얘기를 오빠와 동생에게 하지 않았다. 엄마가 부탁한 것도 있지만 이기적 이게도 내가 기댈 수 있는 형제에게는 숨 쉴 공간을 주고 싶어서였다. 나는 엄마와 얘기한 다음 날, 아빠와 술 한 잔을 기울이며 아빠를 다독였다. 아빠한테 감사함과 사랑을 전하고 설득도 해보았지만 병원은 가지 않으신다 하셨다. 대신 아빠가 원하는 대로 주말에 가족 캠핑을 가기로 했다. 아빠는 나랑 얘기한 후 안정되어 보였다. 엄마는 아빠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고 하셨다. 이때까지 그런 적은 없었다고 하면서 말이다. 나에게 고민을 다 말하고 나서 엄마는 들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한 고민을 털어놔서 후련하다고 말이다. 짐을 주고 싶진 않았는데 미안하다고까지 했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뭐든지 혼자서 다 감당하려는 사람, 강인해서 내가 닮고 싶던 사람. 그런 사람이 내게 도움을 청하고 내 손을 잡고 울었다. 나는 감정적으로 굴면 안 된다. 더 강해져야 한다. 강해져서 이제는 부모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언제까지 응석 부리는 아이로 남을 수 없다. 동생 뒷바라지도 해야 하고 꿈도 이루고 싶다. 한 바탕 폭풍들이 나를 치고 지나간 후, 나는 내 진로를 더 구체화시켰다. 국제문화교류 전문가라는 범위에서 '국제교류 코디네이터'란 직업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학원 업무도 수월해지기 시작했다. 지나간 폭풍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그날 학교를 가고 강의를 다 듣고 학원 가서 무사히 수업을 하고 아빠한테 전화해서 잘 지냈냐고 물었을 때, 그랬다는 답을 듣는 것 자체가 평온이라는 걸 깨달았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나는 우울의 바다에 빠져 익사할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삶이 더욱 소중해졌다. 내가 존재함으로 인해 소중해지는 것들이 너무 많다. 내 가족, 가족의 행복, 내 꿈, 친구들. 답답해서 숨구멍이 막히기 직전, 기가 막히게 같은 동기이자 절친이 서울 여행을 제안했다. 자신은 최애의 콘서트를 보러 갈 계획이니 숙소를 잡아 하루는 함께 놀고 하루는 각자 시간을 보내자는 거였다. 결과적으로 내 감정의 폭풍은 정신없이 길을 잃고 웃고 떠드는 서울 여행과 함께 싹 씻겨 내려갔다. 같이 가자고 한 스무 살 절친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겠다. 마음이 미친 듯이 요동치다 갑자기 고요해졌다. 나는 그 고요한 마음을 처음 느껴보았다. 그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더 열심히 살기 시작했는데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하던 일들이 수월해지기 시작했다. 그럴 만한 시기이기도 했다. 학원 업무도 4달째에 접어들고 있었고, 번아웃이 오기 전 절친과 서울여행도 다녀와서 자존감도 높아진 데다가 그리고... 모르겠다. 내 안의 무언가가 변해 있었다. 사실 알고는 있었다. 가족들의 힘듦과 그들 개개인의 우울을 말이다. 그저 이 정도로 심해질 줄은 몰랐고, 외면하고 싶었다. 그러면 내 우울이 낫지 않을 것만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직면하고 나니까 오히려 내가 뭘 해야 할지 선명해졌고 처음엔 아팠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실체와 맞서 싸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상담선생님과 병원 선생님께 부부 클리닉 상담센터를 추천받아서 엄마에게 전했고 어떻게 할지도 함께 상의했다. 그리고 동생에게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그들이 많이 아팠다는 것을 몰랐다. 모르고 싶었다. 이제는 봤고, 알고 있다. 더 이상 외면할 수도 없다. 그러니 내가 변할 수밖에, 내가 더 단단해질 수밖에. 나는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위로와 행복을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많은 욕심들을 내려놓았다. 완벽주의, 고집, 무리한 성장 등 말이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그중에 열심히 살겠다는 마인드를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다 지나갈 것을 안다. 과거 내 힘듦도 다 지나가고 볕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간문제일 뿐이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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