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최근에 난 여러 가지 일을 겪었다. 할머니가 아프시다는 것과 아빠와 엄마 부모님 두 분 다 액팅아웃을 할 정도의 우울을 가지고 계시다는 걸 직접 확인하는 것, 거기에다 엄마가 내게 우리에게 투자한 교육에 대한 비용이 만들어낸 어마어마한 빚 내역을 보여주시면서 내 손을 잡고 울면서 무너져 내렸다. 나는 앞에서 괜찮은 척 엄마를 위로하고 자책하지 마라고 다 내 탓이라고 했다. 엄마와 나는 아빠의 우울을 낫게 하기 위해 아빠가 예전부터 바라던 가족끼리의 캠핑을 갔다. 가서 나는 처음으로 가족들이 단합된 모습을 보았다. 행복했다. 색소로 만든 캠프파이어 불꽃이었지만 잔잔한 그 모습으로 불멍을 하는 건 최고였고, 오빠가 새로 장만한 전기장판 있는 텐트는 아늑했다. 캠핑용 의자에 앉아서 불어오는 바람을 있는 그대로 느꼈다. 온도도 세기도 딱 알맞았다. 힐링이란 게 이런 거구 나하고 느낀 순간이었다. 우리는 웃으며 서로를 위했다. 오빠는 우리가 추울까 봐 전기장판 옆에서 계속 보초를 섰고 엄마와 아빠는 서로가 우울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웃긴 얘기를 했다. 그냥 행복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나는 그들이 무척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다음을 기약하며 끝난 짧디 짧은 캠핑 후, 나는 창문도 없는 내 한평 남짓한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재충전된 기분으로 학업, 학원 업무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며칠은 기운이 넘쳤다. 그래서 무리한 것일까... 갑자기 번아웃이 왔다. 납득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캠핑도 다녀왔고, 가족들 분위기도 좋았고, 무엇보다 부모님이 행복해 보여서 좋았는데.' 알고 보니 이건 '심리적 반동'이었다. 너무 좋은 시간을 보내다 그냥 나 혼자 덩그러니 있는 고시원으로 돌아오니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데다가 나는 이제까지 앞만 보고 또 달리고 있었다. 원장님이 주시는 추가 시간 업무와 학업을 동시에 하느라 매일 밤을 새우고 부모님, 할머니 걱정에 그 외 여러 가지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다행히 최근에 할머니는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아무 이상 없다는 소견을 받았다. 나는 긴장이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내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이 덜덜 떨리고 과호흡이 왔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원래 가던 병원에 갔는데 약이 늘었다. 우울이 깊어져서 공황증세가 나타난 거라고 하셨다. 나는 고시원으로 돌아가서 침대에 파묻혀 엉엉 울었다. 힘들었는데 힘들다고 할 수가 없었다. 나만 힘든 거 아니니까. 내가 힘들어서 응석을 부리면 우울한 우리 아빠는 무너질 거니까. 엄마도 이젠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빠, 엄마, 할머니께 전화를 드릴 때 엄청 밝은 척을 했다. 스스로를 가증스럽게 느낄 정도로 말이다.
철저하게 숨기고서 나는... 그 반동으로 충동적으로 자해를 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내 팔 안쪽에는 쓰라린 흔적이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아무 번호로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정작 전화를 걸고 할 말이 별로 없었다. '내가 왜 힘든 거지. 지금 왜? 그럴만한 이유도 없는데.' 영양가 없는 상담사와의 전화를 마치고 나서 나는 한 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찬찬히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게 뭘까.' 내가 현재 원하는 게 뭔지 생각을 해보니 첫 번째로, 나는 작년과 같이 이맘때쯤 우울증 악화로 인해 대학을 자퇴했었다. 그게 반복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두 번째, 나는 변하고 싶었다. 위험이나 위기가 닥칠 때 회피라는 방어기제 말고, 승화를 쓰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가 계속하던 것처럼 내면의 비판자가 하는 말을 받아들이면서 나 자신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머릿속 생각들, 자해로 나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정상적인 트라우마 반응이라는 것을 말이다. 작년 이맘때쯤, 그리고 18살 때 이맘때쯤, 즉, 2학년이 되기 전 나는 포기를 했다. 모든 걸 놓아버렸다. 내 루틴, 일상, 내가 이뤄온 모든 걸 던져버렸다. 그리고... 이후에 더 힘들어졌다.
나에게 이미 두 번이나 겪은 지옥을 다시 선사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새로 산 원서 그리고 내 가장 좋아하는 책인 'The Let Them Theory - Mel Robbins'의 가장 앞 장에 다짐을 적었다. No.1 Rule. No Matter what others say, I won't let myself say bad words against me. Never. Fuck the inner critics. 그러고 나서 '시험공부 안 하냐, 너는 부모의 짐이야. 넌 아무것도 못 해. 등'의 말을 해대는 '내면의 비판자'에게 육성으로 욕을 퍼부었다. '네가 뭔데 내가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걸 분류해서 말하고 지 X이야. 네가 뭔데. 네가 내가 힘들 때 내 옆에 있어 봤어?' 그러고 나니 후련해졌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에게 더 이상 해를 가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그 안에 비판적인 말도 넣으니 그게 목표가 되었다. '내 삶의 궁극적인 목표 : 성숙한 사람 되기'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방을 치우고, 샤워를 하고 도서관에 와서 공부를 시작했다. 내가 원했기 때문이다. 난 과거의 힘듦과 내면의 비판자가 하는 말에 잡아 먹혀 무기력하게 누워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난 나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단계 발전한 것이다. 그러자 이전에는 손을 대기 싫었던 것들이 순조롭게 되기 시작했다.
이제 내 삶의 중심에 무조건 '나'를 두기로 했다. 자, 그럼 쓸데없는 비판은 남이든 나든 용납하지 말자. 그것부터가 시작이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그들의 입으로 씨부리는 것들은 우리가 어쩔 수 없다. 그럴 때는 'Let them = 그러라 해.'로 분리시키고 소음으로 치부해라. 그러고 나서 스스로에게 환청처럼 들려오는 안 좋은 말들에는 욕을 하며 하나하나 반박하라. 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만큼은 그렇게 싸워서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나를 괴롭히면 구해줄 사람이 나밖에 없다. 그리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은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이다. 스스로를 가해자로 만들지 말자. 지켜내야 한다. 그만큼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나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과거에 내가 자기 해방을 위해 출판했던 두 개의 책 '토북이 이야기', '쏟아낸 후에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나눔'했다. 내가 쓴 책을 내가 사서 보관하려 했지만 타인에게 나의 극복기를 나눔 하고 싶었다. 나눔을 신청하신 분은 월드콘 두 개를 건네셨다. 그날 먹은 월드콘은 그 어떤 월드콘보다 달았다. 또한 그날, 내면의 비판자를 밟고 우위에 선 나는 새로 태어난 듯했다. 이제는 더 단단해질 수 있겠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승화' 뿐만 아니라 '주지화'도 좋은 방어기제임을 몸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