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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의대지 Oct 24. 2021

단역 (1)

짧은 이야기

1. 대기실에서


빈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았다. 지하철은 다음 역으로 빈자리와 채워진 자리를 실어 날랐다. 낭랑하게 녹음된 목소리가 다음 역을 안내했다. 사람들은 자기 목적지가 불릴 때까지 그곳에서 기다렸다. 기다리던 사람이 일어나서 나가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이 그 자리를 채운다. 몇 차례 자리에 앉은 사람이 달라졌다. 그렇지만 다음 역에서 탄 사람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언제부터 앉아 있었는지, 혹은 원래부터 그 사람의 자리였는지 몰랐다. 


노인은 오이도로 향하는 지하철 4 호칸 노약자 보호석에 앉아 있다. 노인은 언제든지 관리소장과 연락할 수 있도록 회사에서 받은 낡은 폴더 폰을 목걸이처럼 매달아서 목에 걸고 있다. 관리소장은 도착하기 5분 전에 받는 사람에게 꼭 전화를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노인의 귀가 아주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소장은 너무 여러 번 얘기했다. 노인이 두 달 정도 일했을 때 귀에 하얀 이어폰을 낀 채 옆에 서 있던 다른 배달 기사가 스마트폰에 마이크가 있는 이어폰을 연결해서 전화를 받는 방법을 알려주었으나, 노인은 그런 것에 적응할 만한 여유가 없다. 흘러내린 듯이 밀려 나온 핏줄 사이로 박힌 오래된 주름이 길쭉한 얼굴에 넝쿨처럼 매달려 있었다. 세찬 비가 한차례 휩쓸고 간 창문과 같은 노인의 얼굴엔 그의 몸이 굴러다닌 이력에도 불구하고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가 별로 없어 보였다. 양 손에 가득 들린 쇼핑백과 서류봉투가 담긴 파란색 천가방은 서로 몸체와 손잡이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잘 구분되지 않았고, 노인의 누런 손에 박힌 검버섯은 그가 움켜쥔 실타래의 밝은 빛 때문에 더욱 움츠려 들었다. 노인은 자기 것도 아닌 것들을 꽉 잡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놓을 수 없다는 듯이.  노인의 굽은 허리 때문에 노인이 움켜쥔 것을 조금만 느슨하게 푼다면 그가 들고 있는 쇼핑백들이 바닥에 닿을 것 같았다. 다행히 노인은 이 일을 해온 8개월간 그런 적이 없었다. 


노인에게 일감이 많을 때와 적을 때가 있었지만 그 기간 동안 보통 매주 4~5일을 오전 6시에 집에서 나와서 밤 10시까지 배달을 했다. 그래도 이번 일은 일하는 동안 앉아 있을 수 있는 점에서 그동안 노인이 해오던 일에 비하면 수월한 편에 속했다. 노인은 소작 농사부터 공사장 보조 인부, 통조림 공장, 아파트 통로 청소, 자동차 손세차 등의 일을 해봤지만 그의 인생에서 앉아 있는 일은 서 있을 때보다 마음이 불편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노인은 기다리는 동안에도 정당하게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어색하면서도 썩 괜찮다고 생각했다. 노인은 낮 2시가 되도록 6건의 배달을 겨우 끝내고 상계역에서 신길역으로 가고 있었다. 출근 시간을 한참 빗겨 난 덕분에 환승 통로를 걷는 동안 억지로 양손을 안으로 모을 필요가 없어서 한결 수월했다. 노인은 무언가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습관적으로 무슨 일이 터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부터 했다. 편안한 양손 때문이었는지 노인은 속이 불편함을 느꼈다. 법률사무소에 마치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 같은 서류봉투를 건네주고 나오는 길에 급히 먹은 김밥이 문제였다. 입안에 벌컥 털어 넣은 냉수에도 김 쪼가리가 휩쓸려가지 않은 채 회색 어금니에 붙들려 있어서 치료하기 전에 썩은 그대로의 상태 같았다. 맞은편에 앉은 모자 쓴 노인이 신문을 읽다가 대충 접어 오른쪽에 놓더니 눈을 마주치며 말을 붙였다.


“그거 할 만해요?”

“예에 뭐… 그냥 배달하는 거라서요”

“근데 주로 뭘 배달하는 거요?”

“서류 봉투가 많은데… 나도 뭔 지는 몰라요, 테이프로 붙여 놔서… 꽃병 같은 거면 미리 조심해 라고 알려주는데…”

“하기사 궁금하다고 뜯어보면 잘리겠지..”


맞은편에 모자 쓴 노인은 대화를 조금 더 이어가려고 했으나, 노인의 목에 걸린 핸드폰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관리소장의 이름이 찍혔다. 노인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5개의 쇼핑백을 잠깐 두 다리 사이에 놓고 전화를 받았다. 관리소장의 괄괄한 목소리가 다리를 더 오므리게 만들었다. 그는 강원도에 있는 수송부대 하사관 출신으로 전화로 말해도 직접 면전에 말하는 것처럼 들리도록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노인 택배 영업소 관리소장을 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자질이었는데 노인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꺼져가는귀 너머로 노인들을 깨우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관리소장은 노인에게 원래 2시까지 봉천동에서 서류 하나를 받아서 화곡동에 배달하기로 한 건수가 있는데 원래 일을 받았던 기사가 다쳐서 급히 대타가 필요하다고 했다. 관리소장은 노인이 마침 그 주변에 있으니까 (주변이라고 하기엔 충분히 멀었지만 그가 관리하는 20명의 기사들 중에서는 가장 가까웠다.) 일단 급한 대로 봉천동으로 가라고 얘기했다. 대신 거리가 먼 한 건수는 2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한 환승역 중간에 물품 보관소에 맡겨 두라고 했다. 노인은 무거운 짐을 물품 보관소에 맡겼다. 원래부터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자는 또 한 번 숨겨진 셈이었다.  


2. 무대 뒤에서


“엄마~ 누가 뭘 보냈다는데 누가 뭐 주기로 한 거 있어?”


엄마는 손 떼가 탄 검붉은 뒷면의 화투 패를 만지작 거리느라 대답이 없다. 마치 처음 본 풍경을 대하듯이 눈이 구슬처럼 빛난다. 딸은 3년 전부터 치매 증상을 보이는 엄마를 돌보고 있다. 엄마와 딸 둘 모두에게도 치매가 남의 일이었을 때가 있었다. 처음에 엄마는 익숙한 사물의 이름을 잘 떠올리지 못했다. 원래 우리는 들을 수 없어야 할 뇌의 신경 다발들이 보내는 신호의 일부가 엄마의 입을 통해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거 아니, 뭐였더라…’ 단어는 생각나지 않았다. 혼잣말은 거의 60년이 넘게 엄마를 그 사람으로서 자리하게 했던 무엇에게 무책임한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엄마가 찬 거리 다섯 개가 쓰인 종이를 왼쪽 털 조끼 주머니에 넣고 찾아간 마트에서 돌아오지 못한 날부터 엄마는 좋게 말해서 다시 태어났다. 딸은 마트 앞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에 쭈그려 앉아 울고 있는 엄마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억울하고 무력한 눈으로 울고 있는 엄마의 어린아이 같은 눈을 보면서 딸은 오히려 허들이 하나 늘어난 자신의 결혼에 대한 걱정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 철거된 공중전화 박스보다 먼저 엄마는 그곳에서 있던 일을 잊어버렸다. 드라마틱한 사건을 하나 겪고 나니까 의사에게 너무 늦었다는 진단을 받고 병세를 늦추는 약을 타는 일들은 차라리 수월하게 느껴졌다. 복잡하게 꼬여서 그 일 자체가 과연 말보다 가혹한지 가늠하기 어려운 일들에 비해 엄마의 기억이 점차 새하얗게 되어버리는 일은 간단하고 무서웠다. 치매라는 탈곡기가 시간을 빠르게 갉아먹었다. 원래 엄마였던 사람의 의식은 잠시 나갔다가 돌아왔고 평생 집에만 있던 그녀의 의식은 더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어딘가로 외출했다. 딸은 벌써 한참 미뤄온 결혼식을 다시 4달 미루었다. 엄마는 예비사위를 2년 넘게 보았으면서도 무슨 염치로 왔느냐고 늘 쫓아내려고 한다. 딸은 남자가 많은 생각 끝에 엄마를 요양원에 모시면 좋겠다는 말을 아주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할 것임을 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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