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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의대지 Oct 24. 2021

천일야화(2)

짧은 이야기

“우리 세계는 무책임하게 빨라지는 바람에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해졌어요.” 남자의 이야기는 수연에게 여전히 믿을 수 없이 들렸지만 그의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수연은 안개처럼 뒤덮인 눈송이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천천히 걸으며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때때로 그가 수연과 지수만 알고 있는 시간을 보여주었던 방식과 같이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드러내는 삽화들이 눈송이 사이에 뻥 뚫린 구멍으로 선명히 상영되었다가 사라졌다. 


그는 수연이 살고 있는 세계와 제3 보색으로 규정된 평행세계에서 왔다고 했다. 현재 수연이 속한 세계에서는 평행세계에 대한 이론적 추측만 진전된 상황이지만 다른 형태로 진행된 세계에서는 이미 평행세계의 존재가 증명되고 제한된 이동도 가능한 상태라고 했다. 평행세계 간의 이동과 접촉은 특정 세계의 자유도를 불필요하게 손상시킬 수 있기 때문에 특별히 훈련받은 메신저를 통해서만 허용되고 있으며 자신도 그런 메신저라고 덧붙였다. 자신은 의뢰인과 관련된 특별한 사정으로 수연에게 반드시 전달할 것이 있어서 오게 되었다고 했다. 남자는 수연에게 의뢰인이 속한 세계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 세계에서는 사물에 관한 정보를 요약된 바코드 기호 형태로 순식간에 습득할 수 있는 ‘바코딩’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신경이식 기술을 통해 인류의 뇌 시냅스에 실제로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 개개인의 인식능력은 극한으로 촉진되고 사람들의 정보 습득 속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다고 했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한다면 과거로 갈 수 있다는 이 세계의 물리학 이론을 예로 들면서 굉장히 빠른 인식 속도에 끌려가는 창조의 빈번한 지각, 매 순간 다른 분야 장인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되어버린 인류의 구토를 설명했다. 그런 세계에서 새롭게 창조되었다고 믿어지는 것은 살펴볼 역사 속에 반드시 존재하게 된다고 했다. 그 시대의 예언가는 모두 역사가와 같아졌는데 그들은 종국에는 상상하기를 포기했다고 했다. 거의 모든 것을 알게 된 인류가 그것이 실제로 거의 모든 것임을 믿기 시작했을 때, 절망은 미지가 아니라 아는 것으로부터 나온 다는 것을 그는 이야기했다. 끊임없이 팽창하는 공터도 품을 수 없는 무자비한 선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남자는 가만히 듣고 있던 수연에게 물었다. 


“수연 씨 천일야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죠? 아내에게 배신당한 왕이 세상의 모든 여자를 증오해서 신붓감이 없을 때까지 매일 결혼한 다음날 신부를 죽이다가 세헤라자드를 만나잖아요”

“아 네… 세헤라자드가 1천1일 밤 동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줘서 왕은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어 그녀를 죽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행복해진다는 이야기 맞죠?”

“바코딩이 발견된 후 우리 세계에는 어디에도, 누구와도 천일 동안이나 할 이야기가 없어졌어요. 우리 세계의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는 채로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의 모든 걸 알게 돼요. 우리에게는 왕처럼 배신당하는 것도 그로 인한 버거운 상처도 세헤라자드처럼 간절히 할 이야기도 모두 불가능해졌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세계 사람들은 발견된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무언가 기억할 만한 것을 떠올리려 하면 아무것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게 되었어요. 우리는 인식은 매 순간 가볍게 감정을 뛰어넘었어요. 그리고 서로에 대해 완벽히 이해할수록 서로 사랑할 수 없게 되었어요.”


수연은 시간이 천천히 쓰러뜨렸던 지수와의 연애를 떠올려보았다. 수연이 겪은 관계는 온갖 일들이 벌어진 후에 무력하게 그리고 천천히 스러졌던 반면 저쪽 세계의 사랑은 순식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 남겨진 검은 구멍과 그 세계의 쇠락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2천 일이 지나 왕과 세헤라자드가 모두 없는 빈 집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것은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메신저인 제가 우리 세계의 결정에 따라 지수의 메시지를 당신에게 전하도록 한 것이에요. 우리 세계의 지수는 우리 세계의 당신, 수연을 짝사랑했어요. 지수가 먼발치에서 그녀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동안 수연은 이미 사랑할 수 없는 자가 되었거든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고 보면 지수는 특별해요 우리 세계에서 한 발 늦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 


수연은 그쪽 세계의 자신을 짝사랑해왔다는 지수를 상상하며 6년을 만난 이 세계의 지수를 떠올렸다. 수연은 지수가 떠난 빈 집에 누워 다른 지수가 창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연 씨 지수는 알고 있습니다. 다른 세계의 수연은 다른 사람이고, 같은 세계의 수연과 마찬가지로 다른 세계의 수연과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그렇지만 그런 자신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데요. 이쪽 세계의 당신에게는 고백조차 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이게 어떤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어 서서 수연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잿빛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낡은 녹음기를 꺼내어 수연의 앞에 꺼내 놓았다. 그리고 세모 모양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수연이 너무 잘 알고 있던, 그녀의 20대를 함께한 익숙한 음성이 녹은 눈송이에 젖은 귓가로 선명히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나는 지수라고 합니다. 수연 씨 나는 어쩌다 보니 당신이 좋은데요. 그런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니지만”


메신저로 온 남자는 툭. 하고 자동으로 재생 버튼이 풀린 녹음기를 수연의 손에 쥐어 주었다. 

“수연 씨 우리 세계의 지수는 마지막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입니다. 아무도 권태를 이기지 못했어요. 지수는 돌연변이입니다. 우리는 지수를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러나 지수는 분명히 마지막 불꽃입니다. 우리는 이제 단 하나, 사랑에 빠진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끝내 우리 세계의 오랜 역사는 짧은 꿈처럼 스스로 사라지고 말 거예요. 수연 씨 이것이 우리가 두 손을 모아 가져온 촛불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당신에게 전합니다.” 수연은 짧은 잠에서 깼다. 그녀가 잠든 시간과 꼭 같은 길이의 꿈을 꾼 것 같았다. 버스는 그 사이 강남역을 한참 지나 이미 종점까지 와있었다. 버스기사는 급히 화장실에 다녀와서 버스를 다시 반대 노선으로 운행할 것이었다. 방금 거쳐온 또 같은 길을 다르게 갈 것이었다. 수연은 가방 안에 받아 넣은 오래된 녹음기를 쓰다듬었다. 수연에게 짧은 꿈보다는 조금 더 긴 시간이 아직 자기 앞에 놓여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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