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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의대지 Oct 24. 2021

천일야화 (1)

짧은 이야기 

수연이 약속 장소인 강남역 행 버스를 늦게 탄 이유는 그날 소개팅 주선자이자 대학 동기인 서린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골목을 공유하는 두 카페의 서로 다른 시그니쳐 메뉴에 디자인 업계가 얼마나 예술적으로 사람을 부리는지에 대한 한탄사를 곁들이자 다섯 시간이 단숨에 지나가버렸다. 수연과 같은 미술교육과 출신으로 작년에 영 브랜드 디자인 파트 막내 사원으로 입사한 서린은 퀭- 해진 눈으로 볼멘소리를 했다. 부자는 모여서 예술을, 예술가는 모여서 돈을 말하고, 디자이너는 혼자 남아 야근을 한다나. 온라인 백과사전의 삽화를 그리는 프리랜서 수연은 그러면 ‘나도 디자이너 겠네’라고 대꾸하며 머핀을 갈랐다. 서린은 정작 수연이 오늘 만나기로 한 소개팅 남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시간에 쫓겨 일어나야 할 무렵이 다가와서야 겨우 “아 참 너 소개팅 가지! 사실 나도 건너 건너라 잘 몰라… 괜찮겠지!” 라며 웃었다. “그래 괜찮겠지” 수연은 같은 소리로 들리는 다른 말을 하고는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돌아섰다. 


생각할 틈도 없던 서린과의 이야기가 끝나자 수연은 어느덧 관성적으로 하고 있는 소개팅이 다시 떠올랐다. 수연은 하면 할수록 더욱 소개팅이라는 방식이 괜찮지 않다고 생각했다. 허겁지겁 두 사람이 그려 나가는 각자의 크로키는 집으로 돌아갈 무렵엔 누구의 것도 아닌 무감각한 벤다이어그램이 된다고 수연은 생각했다. 수연은 20대의 모든 기억들과 뗄 수 없는 얼개를 이루게 되어 버린 전 남자 친구 지수와의 6년간의 연애가 언젠가 오래된 이별이 될 때까지 버티는 중이었다. 소개팅은 어떤 경우에 그녀가 버티는 시간을 빠르게 흐르게 했다가 또 다른 날에는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녀는 지수와 헤어지기 전이나 후나 똑같이 시간과 싸우고 있었다.  


 수연이 소개팅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된 것은 그녀의 하나뿐인 과거 연애사 때문이기도 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유행 따라 떠난 독일 교환학생 오티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났던 지수와의 동행이 그녀에게 남은 단 한 번의 연애였다. 그녀는 연애를 하려는 사람들이 만나는 소개팅이라는 방식을 통해 누군가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수와의 연애를 삶에서 거둬 내기가 더 힘들었는지도 몰랐다. 지수가 4개월 전 수연에게 마치 오래된 책을 노끈으로 묶는 것처럼 이별을 꺼냈을 때도 수연은 잠시 숨을 고를 뿐 “그래”라고 말할 수 있었다. 3개월이 더 흐른 지난달 초에 지수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도 같은 소리의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수연에게 이제야 오래된 연애의 끝이 마음에 깊은 구멍을 낼 줄은 그녀 자신도 몰랐다. 수연은 당시에 이별이 단지 흘러간 시간을 인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이미 서로의 선명한 시간이 지나갔고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누군가의 노력으로 될 수 없는 없으므로. 세상에 어떤 불가능한 일을 하지 못한 사람에게 이토록 깊은 구멍을 내서는 안된다고. 그러나 하나의 축제, 하나의 전쟁, 하나의 베개, 그리고 단 하나의 공터가 된 6년의 시간을 통해 수연은 운명적 사랑과 사랑의 운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끝내 진이 빠져 어찌할 수 없을 때까지 나를 끌고 다니는 감정의 무자비한 덧칠. 그녀 마음속에 생긴 구멍은 뻥 뚫린 것이 아니라 캔버스에 온갖 색이 덧칠되어 결국 까맣게 된 둥근 정물이었다. 


운 좋게 좌측 창가 옆좌석에 앉은 수연을 태운 버스는 비 같은 눈이 흩날리는 밤을 무심하게 뚫고 갔다. 수연이 귀에 끼운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를 가로막고 알림 소리가 들렸다. 사실은 이어폰이 연결된 핸드폰에서 나왔을 알림 소리는 핸드폰이 들어있는 빨간색 하드 미니백에서 직접 나온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수연은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밀었다. “죄송합니다. / 빨리 오려고 택시를 탔더니 되려 막히네요 / 10분만 늦을 게요ㅠ”, 세 줄의 메시지에 수연은 조금 안도했다. 버스를 타고 오는 중인 자신도 5분 정도 늦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수연은 조금 전까지 늦을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내려 할 때마다 길이 뚫려서 주저하다가 너그럽게 ‘괜찮아요 천천히 오세요 :)’ 하고 메시지를 보낸 자신이 기특해서 속으로 웃었다. 남자는 더 늦었기 때문에 수연도 늦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심란하던 수연에게 소개팅 장소에 도착하기까지 뜻하지 않던 30분의 여유가 생기자 다시 이어폰 속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수연은 창밖을 더 유심히 바라보았다. 밤의 도로를 채우며 사방에서 피어나듯이 흩날리던 눈송이가 버스 창에 부딪히면 녹아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대부분은 바닥에 떨어져 검은 길가에 남은 물감처럼 쌓이고 굳어갔다. 수연은 버스 창에 담긴 그림이 백과사전의 삽화라면 어떤 표제어를 설명하려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스스륵 잠에 들었다. 


내릴 곳을 지나쳐 잠에서 깬 수연은 깜짝 놀라서 어느 역인지 볼 세도 없이 내렸다. 거기에는 소개팅에 나갈 때마다 마주치는 광경이 없었다. 지난번에 만났던 것 같은 코트를 입은 남자들과 딱딱한 가방을 멘 여자들이 서로 먼저 찾게끔 신호를 보내기 위해 연극적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광경이. 대신 흩날리는 눈송이가 버스에서 보던 것보다 더 많은 방향을 향해서 각자의 자리로부터 피어나고 있었다. 하얀 눈송이들이 밤하늘을 덧칠하려는 듯이 달라 들었다.    수연이 손을 들며 눈을 가늘게 뜰 때 목소리가 수연을 불렀다. 


“수연 씨 맞으시죠?”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러면…” 

“네 맞아요 접니다. 가시죠, 그리고 시간이 많지는 않아 서요.” 


소개팅을 하기 전 서로 이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수연에게는 이미 익숙한 진행이었다. 이제 수연은 날씨가 그나마 덜 추워져서 그런지 눈이 내리네요. 사는 곳이 어디인지, 그래서 오느라 얼마나 걸렸는지에 대해서 묻고 답하면서 약속된 장소로 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는 수연을 진지하게 바라보면서 불쑥 말했다. 


“저는 다른 우주에서 건너왔어요.”


‘미친 사람이다.’ 수연은 속마음을 거의 입 밖으로 말할 뻔했다. 능숙하게도 거의. 

“지금 미쳤다고 생각했죠? 평행세계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세계의 접촉 시에는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 되네요. 당신이 저를 믿을 수 있도록 몇 가지 들려 드릴게요.” 수연은 남자가 자신의 생각을 읽고 있거나 자신의 생각이 어느 책에 쓰여 있고 남자가 그것을 읽지 않고는 불가능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다른 우주에서 건너왔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믿게 하기 위해서 몇 번의 독심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연과 지수만이 알고 있는 서로의 비밀과 특별한 경험에 대해서 세세하게 말했다. 남자가 양쪽 주머니에서 하얗고 고운 모래를 차가운 바람 속으로 흩뿌리자 수연의 앞에 그 시절의 광경이 떠올랐다. 그것이 눈앞에 펼쳐진 것인지 머릿속에서 상영된 것인지 수연은 구분하기 어려웠다. 수연에게 자신의 과거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남자는 스스로가 앞으로 하게 될 이야기를 믿도록 만들었다.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남자는 전해야 할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말하는 동안 또렷하게 수연을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반응을 무리하게 응용하지는 않았다. 그런 말하기 방식은 눈이 내리는 것처럼 수연의 마음에 켜켜이 쌓였다. 그리고 남자는 이야기가 일단락될 때마다 상대방의 표정 위에서 이야기를 바닥에 굴렸다. 왠지 수연에게 그 눈들은 잘 녹지 않고 어떤 양감을 갖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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