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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의대지 Oct 24. 2021

단역 (2)

짧은 이야기 

3. 무대에서


노인이 관리소장이 말한 빌라에 도착했다. 노인은 구불구불한 골목길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비슷하게 생긴 네모 반듯한 빌라들을 연이어지을 수 있는지 신기했다. '청원'이라는 이름의 빌라는 스마트폰이 없는 노인이 찾기에 쉽지 않았다.  좁은 주차선이 잘 보이지 않게 차가 세워진 주차장 위에는 네 개의 기둥이 그보다 많은 층계와 창문들을 받치고 있었다. 빌라 숲의 중턱에 서 있는 빌라는 해가 하루 중 가장 높이 올랐을 때에만 충분한 해를 받았다. 노인이 인터폰에 둥글게 튀어나온 빨간 버튼을 누르자, 단음 멜로디의 차임벨 소리가 났다. 노인은 멜로디의 원곡은 모르지만 그 멜로디는 익숙했다. 멜로디는 그것의 원곡을 아는 사람에게만 원곡을 상상하게 할 수 있었다. 노인은 한 시간 전과 달라질 것이 없는 양손의 물건들을 쳐다보았다. 노인은 내려놓기 싫어서 문을 두드리지 않고 외쳤다. “택배 받으세요” 아직 열리지 않은 문 앞에 선 노인이 인터폰 너머로 딸에게 말했다. 딸은 노인을 보았다. 딸은 문을 열어서 노인에게서 누렇게 뜬 종이에 쓰인 편지를 받아들였다. 색이 바랜 봉투에는 발신인도 없이 수신에만 박선숙이라는 이름이 한자로 쓰여 있었다. 덩굴 패턴의 은색 줄기가 검은색 바탕에 새겨진 현관문이 반쯤 열렸다. 복도의 끝에 있는 방에서 엄마는 빼꼼 고개를 내어 멀리 있는 노인을 보았다. 엄마는 노인을 보자마자 오른손으로 바지춤을 여미고 급한 걸음으로 현관까지 나왔다. 길지 않은 현관까지의 길이 엄마가 노인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거리까지 오는 길에 조바심을 느끼지 않게 해 주었다. 딸은 엄마의 눈이 똥그래졌음을 알았다. 딸은 엄마가 몇 년간 이보다 놀라운 일을 벌여 놓고도 왜 이제야 놀랄까? 하고 생각했다.


‘난 참말로 못 돌아오는지 알고…’


엄마는 노인의 앞까지 나오기까지 같은 말을 읊조렸다. 딸은 종종 잠에서 깨어난 엄마가 꿈속에서 보았던 장면을 여기서 보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엄마의 목소리는 한 땀 한 땀 미싱으로 이름을 새겨 넣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떨리면서도 단호했다. 노인은 자신과 일면식도 없는 여자가 하는 말의 뜻을 이해하기 전에 이미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노인에게 한 단어가 그처럼 한 문장처럼 크고 느리게 다가온 것은 생소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 평생을 한 순간에 움켜쥔 그녀만의 시간관리법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짧은 정적이 지나갔지만 노인은 자기 할 일을 잊지 않았다. 오른손에 전달해야 할 봉투 중에서 엄마의 이름이 적힌 편지봉투를 찾아서 건네주었다. ‘박선숙 씨 맞으시죠?’ 엄마는 처음 노인을 발견한 이후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노인이 편지를 주기 위해 건넨 손에 엄마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맞잡은 두 손이 오래도록 끊어지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게 했다. 노인은 열리려던 지하철 문이 급히 달려온 사람의 어깨에 걸려 덜컹거리듯이 흠칫 놀라 황급히 손을 뺐다. 까끌한 손과 손 사이가 스치는 곳에서는 마치 소 먹이던 아이의 발목이 들 풀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 똥그래진 것은 노인의 눈이었다. 노인이 놀란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엄마는 울기 시작했다. 원래 눈물이 있던 자리가 마르기 전에 다른 눈물이 자국을 밀어냈다. 엄마는 아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엉엉 울었다. 우는 동안 노인의 왼팔을 잡고 놓지 않았다. 노인이 놓친 적 없던 쇼핑백과 서류들이 바닥에 우수수 널브러졌다.


딸은 배달을 끝내고 황급히 나가는 노인을 불러 세웠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좁은 통로에는 바람도 불지 않았다. 등진 문 너머로는 메아리처럼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 아래서 두 사람은 짧은 대화를 했다. 

“선생님 아르바이트 한번 해주세요” 


딸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전혀 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고 차분하게 노인에게 전달했다. 엄마가 3년 전부터 치매 증상을 보여 요즘은 거의 최근의 엄마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것, 자기가 태어나기 직전에 아빠가 새벽 잠결에 들이닥친 괴한 3명에게 잡혀 가서 그날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아빠는 그곳에 들어간 지 3주일이 채 안되어 원양어선을 탄다는 말도 안 되는 편지를 남기고 사라졌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엄마는 치매에 걸리기 전에도 그 편지를 아빠가 썼을 리 없다고, 이상하다고 했다. 그러다 엄마는 2년 전부터 증상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아빠를 기다리던 어느 시절 언저리에 멈춰 있다고 했다. 노인이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오는데도 딸의 이야기가 금세 따라와 머릿속에 똬리를 틀었다. 


4. 무대 뒤에서 


노인은 떨어뜨렸던 물건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배달품을 잰걸음으로 운반했다. 몇 개의 지하철을 옮겨 탔다. 노인이 내린 다음에도 사람들은 빈자리를 돌려 앉았다. 그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여자의 표정의 떠오르고 이제 그것을 치울 수 없었다. 깔리고, 바닥에 쓸리고, 스스로 접히기를 반복한 빛바랜 이불이 벽 너머에서 오는 한기를 겨우 막고 있었다. 노인은 양말을 벗기 전에 늘 바닥에 손을 대보았다. 어차피 중앙난방을 조절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한편에 기댄 작은 밥상은 녹슨 피부처럼 칠이 벗겨졌다. 만들어질 때 새겨진 호박 넝쿨 같은 양각 무늬는 닦여 나가서 둥그런 나이테를 이루었다. 한쪽 다리는 따듯한 밥과 9가지 반찬 때문이 아니라 단지 오랜 시간 때문에 삐걱거렸다. 노인의 인생처럼 너무 오랫동안 다리를 펼치고, 짐을 이고, 다리를 접고 나서야 기댈 수 있었다. 노인은 견딜 수 없이 힘들 때마다 어릴 적 키우던 소를 생각했다. 소를 데리고 가면 논을 갈았다. 그는 무언가 버거운 일을 넘어야 할 때마다 소를 떠올렸다. 소를 떠올리고 소를 뒤따르던 자신으로 남으면 말없이 밭은 고르는 소가 하는 것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힘들지 않았다.

 

노인은 어두운 방안 얼룩진 벽에 기대서 그때 여자의 표정과 목소리를 기억했다. 여자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무모한 자신의 목소리도 들렸다.


“한번 해볼게요” 


노인은 목소리가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가 마다하지 않은 것들 중에 이처럼 이상한 일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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