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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단발 Jan 03. 2022

근면과 성실, 2022

<진자운동처럼 예외 없이 규칙적으로 살아보자>



습관은 영혼에 문신을 새기는 것과 같다. 좋은 습관이든, 나쁜 습관이든 처음에는 형태만 어렴풋 보이지만 수년간 쌓이고 나면 그것이 나를 규정하는 표식이 된다.


어렸을 적에는 임기응변에 강했던 터라 벼락치기가 일상다반사였다.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뭘 하든 들인 시간에 비해 결과가 좋은 편이었다. 그게 내 인생을 망친 나쁜 습관의 싹이었던 걸 그때는 몰랐다.  


중학교 시절, 수업도 듣지 않고 (당연히 필기도 하지 않았지만) 시험 치기 전 하루만 바짝 공부해도 중간 이상은 갔다. 운이 좋으면 꽤 좋은 성적을 받기도 했다. 딱히 공부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 정도만 해도 만족했다. 공부는 안 해도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안일한 마음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구열이 높은 학교에 배정받았다. 새벽 6시 30분부터 밤 10시까지 학교에 붙들려 있었다. 워낙 잠이 많았던 나는 고등학생의 가혹한 일과에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등교하는 순간부터 하교할 때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잤다. 정신이 들어 있을 때는 친구와 떠들었다. 그래도 시험을 치면 중학교 때와 비슷한 등수를 받았다. 수능 모의고사는 월등히 결과가 좋았다. '아, 역시 공부는 안 해도 되는 거였어'라고 생각했다.


3학년이 되면서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성적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부에 욕심이 없는 편이었지만 등수의 앞자리가 한 번 바뀌고, 또 바뀌면서 조급해졌다. 그래서 '공부'라는 걸 해보려 했는데 그때 깨달았다. 나는 그걸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중, 고등학교 6년 내내 필기 한 번 해 본 적이 없던 학생이 갑자기 공부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생각해보라. 숟가락 젓가락질도 꼬맹이때부터 배우고 계속하다 보니 의식하지 않고 하는 것이다. 외국인들이 젓가락질에 서툰 이유도 습관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겠다는 큰 결심을 섰지만 문제는 산만함이었다. 교과서를 봐도 한 시간 이상 집중하기 어려웠고, 문제를 풀다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바로 답안지를 찾아보았다. 공부는 집중력과 끈기로 하는 것인데 그 두 가지 모두 습관으로 만들어 두어야 했던 것이었다. 그래도 수능 성적은 잘 나오니까 어떻게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수능 당일. 문제지를 받아 들고 혼란스러웠다. 학교에서 풀던 모의고사와 너무 달랐던 것이다. 문제 유형이며, 지문이 낯설었다. 아, 망했구나. 수능을 망치고, 인과응보를 몸소 체험하며 나의 지난 시간을 반성했다.


10대의 반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학에 가서도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4년 동안 벼락치기로 버텼다. 졸업할 때까지 자격증은커녕 토익도 한 달 공부해서 딱 한 번 본 게 전부다.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취업준비생에게 직장의 문턱은 높았다. 육 개월 방황하다가 어찌어찌 일을 시작했다. 그때도 나름 취업전쟁의 시기였지만 지금에 비하면 수월한 편이어서 밥이라도 벌어먹고 살 수 있게 됐다.


사회에 나온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나는 그 시간을 후회한다. 공부를 못해서, 좋은 대학을 못 가서가 아니다. 그때의 임기응변은 나에게 성실함, 근면함이 습관으로 자리 잡을 시간을 빼앗았다. 그때그때 문제가 생길 때마다 땜질하며 시간을 이어 붙였다. 그 시간이 세월로 쌓이면서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계에 부딪히거나,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지나치게 혼란스러워하거나 쉽게 포기했다 . 차근차근, 꾸준히 해결해 나간 시간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성실함과 근면함. 고루하게 들리지만 단언컨대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단단한 무기다. 살면 살수록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저 두 가지가 없으면 뼈가 저리다 못해 인생의 골다공증을 유발할 수 있다. 그 상태로 계속 내버려 두면 삶이 무너질 수도 있다.


성실함을 타고났거나, 이미 습관으로 자리 잡은 사람들에게는 그냥 하는 것도 나처럼 게으르거나 미루는 습관이 든 사람에게는 지구를 뒤집는 일처럼 힘들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한 번 뒤집어봐야 두 번, 세 번 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애쓰고 있다. 가끔씩 뭔가를 하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도 지쳐 나가떨어질 때가 있다. 그래도, 그래도 해야 한다.  


좋은 습관을 몸과 마음에 새기기 위해 노력 중이다. 나태하게 살아온 시간이 훨씬 길기 때문에 아마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힌다. 그래서 2022년, 올해만 그렇게 살아보기로 했다. 올 한 해를 성실하게 산다면 내년에도 그렇게 살 수 있을 테니까.   


나 자신아.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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