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백수 요리일지 3) 생명농원 서풍골 전통 장을 활용한 채소요리
채식지향을 하면서 재료가 간결해지니 요리에서 양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소금이나 각종 기름, 식초도 그렇고 특히 한식에서는 각종 장을 어떤 걸 쓰느냐에 따라 음식 맛이 크게 달라진다. 고기요리에 맛이 잘 배려면 양념이 많이 필요해서 저렴한 시판 간장과 된장을 주로 사용해왔다. 사실 2인가구에서 딱 한 사람만 먹는 돼지고기 수육이나 불고기 등을 위해서 저렴한 장을 사고 이걸 채소요리에도 그대로 사용했던 건데, 여기에 별다른 아쉬움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백수가 되고 요리할 시간이 더 많아지면서 작은 브랜드 제품의 맛간장이나 고추장을 사서 채소 위주의 요리에 사용해 보았는데, 이전보다 훨씬 맛이 좋아서 요리 마지막에 조금씩 넣는 맛간장이 불과 몇 주 사이에 쑥쑥 줄어드는 걸 경험했다.
특히 바르게 키워진 채소 맛을 온전히 즐기려면, 양념도 과하지 않으면서 채소의 생명력과 잘 어울리는 제품을 사용하는 게 좋다. 농장에 취재를 가서 거기서 막 채취한 채소를 가지고 만든 요리를 먹으면서 직접 느낀 자연의 가르침이다. 그러던 중 이번에 논산에 위치한 생명농원 서풍골의 다이닝 체험에 공주에 사는 엄마와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엄마는 3년 정도 전부터 일 때문에 본가에서 나와 충남 공주에서 혼자 살고 있다. 공주 시내와는 살짝 떨어진 시골풍 동네에 있는 작은 아파트 단지에 바깥 출신의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사는 자취 초보다. 혼자 사는 엄마의 식탁이 간단하더라도 조금 더 건강해졌으면 하는 바람에 섬세한 식경험을 기대하며 이 행사를 기획한 곡물집에 특별히 부탁드려서, 함께 논산으로 향했다.
서풍골은 논산에서도 산 아래에 있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옆으로 빠져서 차 한 대씩만 다닐 수 있는 좁은 길로 들어서니 산답게 우거진 식생 사이에 텃밭과 소담한 한옥, 그리고 즐비한 장독과 장 작업하는 부엌이 있는 농원이 나왔다.
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에디터로서 전에 콩에 관한 기사를 쓰고 조사한 덕에 대충은 알고 있었다. 콩으로 메주를 뜨고, 그 메주를 소금물에 넣어서 며칠 이상 두면 그게 된장과 간장으로 나뉘게 된다. 둘로 나뉜 다음에는 따로 담아서 더 발효시킨다. 그런데 전통 방식으로 장을 담그는 목수님의 설명을 직접 들으니, 그 발효 과정이 이렇게 단순하게 요약될 만한 게 아니었다. 참나무 장작으로 달군 가마솥에 콩을 삶고, 한겨울의 추위에 네모낳게 굳힌다. 그리고 이 메주를 뜨끈한 황토 벽 발효실에서 볏짚 이불을 켜켜이 덮어주어 메주를 '띄운'다. 이렇게 하면 안의 미생물들이 얼마나 뜨겁게 달아오르는지, 메주 안쪽의 온도가 60도에 가까워진다고 한다. 그러니 이 메주 안에는 추위와 더위 모두를 견딘 튼튼한 미생물들만 남는 셈이다. 게다가 원래 콩 속에 있던 미생물만이 아니라 황토와 볏짚이라는 환경에서 붙어서 살아남은 각종 미생물들이 모두 모이기 때문에, 이 메주는 강하고 좋은 균들의 집합소가 된다.
이렇게 메주를 2주 정도 띄우고 난 다음에 겉을 살짝 씻어내고 햇볕에 말린 뒤, 드디어 장을 담는다. 이 메주를 소금물에 넣어서 이제 장이 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때 사용하는 소금물의 농도는 지역마다 다른데, 일반적으로 바닷물보다 5배 이상 짠 소금물을 사용한다고 한다. 보통은 장을 담그고 60일 후에 장을 가른다. 이제 물처럼 된 간장과 건더기인 된장을 나누는 거다. 그리고 따로 담은 항아리에서 1년 넘게 더 숙성되어야, 우리가 먹는 된장과 간장이 된다. 메주 속 미생물들은 한겨울 추위와 뜨끈한 황토와 볏짚의 열, 그리고 엄청난 염도까지 모두 버틴 뒤에 장독 안에서 사계절을 또 지낸다. 이러한 발효 과정에 대해 알게 되니 이번 행사의 주제가 왜 '시간과 성장'인지 대번 느껴졌다. 농원의 목수님이 "발효에 있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조차 시간과 성장과 맥이 통하는 듯했다.
그리고 드디어 서풍골의 간장과 된장을 맛보았다. 따로따로 찍어서 맛을 보기도 했고, 간단한 채소와 함께 어우러진 핑거푸드를 먹어보기도 했다. 처음에 된장과 간장만 맛보았을 때는 짠맛 자체는 굉장히 강렬한데 풍미가 복합적이라고 느꼈다. 간장에서는 평양냉면 국물 같은 감칠맛이 느껴지기도 했고, 된장은 푹푹한 콩의 향이 짠맛과 어우러져 '구수하다'는 느낌이 새삼 두드러졌다. 서풍골에서 장을 담그기 시작한 것이 2019년이고, 우리가 먹은 장 중에도 2019년도에 생산된 장이 있었다. 생각보다 짠맛이 강해서 이런 장이라면 요리에 활용할 때 정말 조금씩만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된장과 여러 토핑을 각자 넣어 장버터를 만들고, 물풀들이라는 팀에서 준비해주신 맛진 식사까지 할 수 있었다. 특히 장버터에 밥과 튀김용 간장을 비벼먹은 게 너무 맛있었다. 이 간장에는 셰프님이 1년 전에 만들어두신 레몬소금을 조금 넣으셨다는데, 그래서인지 풍미가 남달랐다.
집으로 갈 때는 서풍골의 된장과 간장 샘플, 그리고 각자 스타일로 만든 장버터까지 바리바리 받아서 갔다. 엄마는 식사도 맛있다고 두 번이나 리필해서 드셨는데, 장버터 만들기를 너무 좋아하셨다. 본인이 생각해보기 어려운 시도를 하거나 새로운 걸 배우기를 좋아하셔서 더 그랬던 것 같다. 톳이랑 각종 토핑을 잔뜩 넣은 장버터를 만들어 갔는데, 집에서 빵에 발라서 잘 드셨다고 한다. 그리고 서풍골 된장에 오이를 찍어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다고 후기를 전했다. 평소에 늘 쌈장이나 강된장에만 오이를 찍어먹었는데, 생된장에 찍어 먹은 건 처음이었단다. 생된장은 어딘가 쓰고 텁텁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감칠맛이 좋았다면서 나보고 너는 된장찌개를 끓여먹어 보라고 제안까지 했다.
나도 집에 와서 서풍골의 된장과 간장, 그리고 장버터로 점심을 차려보았다. 먼저 2019년 된장에 홍감자, 애호박, 양파, 두부, 팽이버섯, 중멸치를 넣고 된장찌개를 끓였다. 그리고 치커리와 양파, 물기를 짠 두부를 서풍골 간장과 고춧가루 약간, 식초와 매실액, 들기름을 넣고 무쳤다. 마지막으로 계란말이 가니쉬처럼 장버터에 다진마늘을 넣고 케일을 볶았다. 볶은 케일은 혹시 느끼할까 봐 마지막에 화이트발사믹 식초를 살짝 뿌려서 마무리했다. 여기에 귀리, 백미, 현미를 1:1:1로 섞은 우리집 표준 밥에 전에 해뒀던 비지장, 무말랭이, 그리고 장흥김. 평소에 시판 토장을 사용할 때는 된장찌개를 끓일 때 꼭 쌀뜨물을 사용했다. 야채 맛과 된장 맛이 잘 어우러지고 어느 맛 하나가 두드러지지 않으려면 쌀뜨물을 사용해야 맛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미리 해둔 밥이라서 그냥 정수물에 찌개를 끓였는데, 조개살이나 고기 없이도 깊은 감칠맛이 났다.
치커리 무침은 살짝 실패했다. 간장은 이렇게 수제 간장을 넣어놓고 식초는 저렴한 걸 사용해서 그런지, 짠맛이 강한 간장인데 너무 많이 넣었던 건지 처음에는 무쳤는데 쓴맛이 나서 결국 물기 뺀 두부와 들기름까지 첨가했다. 시판 간장에 익숙해 양조절에 실패한 걸 인정하고, 다음날 다시 서풍골 간장을 이용해 가지나물과 애호박나물을 해보았다. 가지나물에는 서풍골 간장 약간과 다진마늘 아주 약간, 들기름 약간만으로 간을 했고, 애호박나물은 적양파와 기름 없이 물에 소금만 약간 치고 볶아서 역시 다진마늘 아주 약간과 서풍골 간장 약간으로 양념을 끝냈다. 치커리무침보다 재료도 훨신 간단하고 양념 양도 굉장히 적었는데 나물 맛은 정말 좋았다. 어쩌면 치커리처럼 씁쓸한 쌈채소보다는 애호박이나 가지처럼 달큰한 알맹이에 양념이 배어드는 음식에 서풍골 간장이 더 잘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장버터에 볶은 케일은 정말 맛있었다. 계란말이 가니쉬로 만들었는데 케일이 더 맛있어서 케일만 마구 퍼먹었을 정도다. 화이트발사믹식초와의 궁합도 좋았다. 겨울에는 구운채소에 화이트발사믹식초만 살짝 둘러서 만든 따뜻한 샐러드를 자주 해먹는다. 채소를 장버터에 구워서 웜샐러드를 만들면 뻔하지 않은 와인 안주가 될 것 같다. 서풍골에서 먹었던 대로 장버터에 간장을 섞어서 밥에 비벼먹어도 보았는데, 레몬소금이 없어서인지 그때처럼 맛있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물론 내가 만든 버터라 토핑도 다르고, 함량도 다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레몬소금 느낌을 내겠다고 레몬즙도 넣어보고, 화이트발사믹 식초도 넣어보았다. 레몬즙이 더 낫긴 했지만 어딘가 밥과 버터가 겉도는 느낌이었다. 우리집이 밥을 조금 질게 하는 편이라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장버터를 빨리 먹으려고 마지막으로는 가지와 버섯을 장버터에 굽고 그 위에 맛간장과 식초를 끼얹어 구운야채간장절임을 해두었다. 바로도 맛있었는데 며칠 뒤에 먹으면 맛이 어떻게 들었을지 궁금해진다.
서풍골에서 나와서 엄마가 해준 옛날이야기가 있다. 88년도 엄마가 대학생이었을 때 농촌에 깨끗한 선거를 홍보하는 활동을 나간 적이 있단다. 다른 대학생 한 명과 짝을 이뤄서 하루에 버스가 한두 대밖에 다니지 않는 깡시골에 갔더니, 그 고을에서 나고 결혼해서 떠난 적이 없는 할매가 어떻게 여까지 왔냐며 국수 먹고 가라고 잔치국수를 말아주셨단다. 그런데 그집 간장으로 만든 양념간장을 얹어서 국수를 주셨는데, 간장 향이 너무 강해서 먹기가 정말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주시는 거라 억지로 먹었다고 한다.
참 신기하다. 토종 채소의 맛이 내가 익히 알던 채소맛과 너무 다르듯이,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수제 장맛이 내가 너무나 익숙하게 아는 장맛과 달라서 그걸 활용하는 요리는 그 방식이 또 달라져야 맛이 극대화된다는 것이. 세상 모든 것들의 특수한 개체성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대량생산된 농산물과 각종 양념에는 다른 것들이 이것저것 많이 들어가야 내가 아는 맛이 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복잡한 풍미의 전통 장을 활용하면 평소에 넣던 것보다 훨씬 적은 재료로도 풍부한 맛이 난다. 그 맛은 내가 알던 맛이 아니다.
서풍골 장이 많이 비쌀까 싶었는데, 막상 집에 와서 논산시사회적경제통합지원센터의 구매 페이지를 확인해보니 다른 프리미엄 브랜드 제품들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곧 열린다는 펀딩 기타등등을 잘 살펴볼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