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백수 요리일지 2) 진안노랑토마토 카프레제
토종 농산물이나 무투입, 유기농 채소들은 맛이 다르다. 나도 마트나 동네 청과가게에서만 채소를 살 때는 몰랐는데, 어글리어스나 언니네텃밭으로 농산물을 구매하면서 정말 강하게 느꼈다. 특히나 토마토나 버섯처럼 그 특유의 향과 맛이 요리에 크게 영향을 주는 식재료는 채소 자체의 맛에 의한 요리의 차이가 크다. 특히 고기나 해산물을 뺀 요리를 만들 때 토마토와 버섯의 역할은 꽤 중요하다. 특히 토마토를 베이스로 한 소스에는 토마토 향이 강하다면 간단히 소금, 후추 양념에 케이퍼만 조금 다져줘도 깊은 맛이 난다. 굳이 설탕을 많이 첨가하지 않아도 토마토가 가진 짠맛과 감칠맛이 케이퍼를 만나면 굉장히 풍부한 맛이 난다. 평소 파스타 요리를 할 때 치즈나 고기 없이 깊은 맛을 내기 위해 주로 케이퍼와 버섯, 올리브를 사용한다. 심지어 우유와 생크림을 넣은 감자스프를 만들 때에도 베이컨이나 기타 기름진 돼지고기, 치즈 없이 케이퍼와 버섯, 양파 등의 채소와 소금, 후추로만 맛을 냈었는데, 맛에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 크림스프를 잘 먹은 뒤 조개살로 클램차우더를 했을 때 맛이 과한 느낌이 났다.
서론이 길었다. 무튼 채소 맛에 대한 이런 경험 때문에, 흔한 채소라도 토종이라고 하면 한번씩 구매해보는 편이다. 올여름에는 토종 토마토 한 박스를 주문했다. 여름 하면 토마토, 토마토 하면 여름이니 말이다. 채소가 귀한 겨울엔 먹고 싶어도 못 먹으니까 여름에 나올 때 실컷 해먹으려고 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무려 노란색 토마토를 주문하고, 기다리던 택배가 제주에서부터 도착했을 때는 조금 놀랐다. 그냥 노랗기만 한 게 아니라 크기가 들쭉날쭉하고 못생긴 노랑 토마토가 플라스틱통에 가득 담겨 왔기 때문이다. '이게 토마토라고?' 싶을 정도로 호박 같은 비주얼. 일단 평소 토마토를 상자째 사면 무조건 해먹는 살사부터 만들어보았다.
토마토 살사 레시피는 간단하다. 토마토와 오이, 양파를 작게 깍둑썰고 양파는 물에 넣고 매운기를 뺀다. 여기에 병아리콩이 있다면 삶아서 함께 넣으면 채식지향인에게는 단백질까지 들어간 좋은 여름 샐러드가 된다. 준비한 채소들에 소금, 후추, 레몬즙이나 라임즙, 꿀, 신선한 올리브오일을 적당히 넣고 섞는다. 나는 다소간 시큼한 살사를 좋아해서 꿀을 조금씩 첨가하는 편이다. 여기에 더 메히꼬스러운 느낌을 원한다면 피자 먹고 남은 핫소스들을 첨가해도 좋다. 나는 거기에 마지막으로 고수를 열심히 다져서 섞어 먹는 편이다. 고수를 너무 좋아해서 나는 줄기까지 잘게 다져서 다 먹는다. 이때 살사에 물이 덜 나오게 만드려면 토마토 속과 오이 속을 파내고, 알맹이들만 사용하면 된다. 귀찮기도 하고, 나는 물김치도 좋아하는 신 국물 러버라 안 버리고 안 파내고 모두 넣은 다음에 나중에 물 생기는 건 후루룩 마신다. 살사처럼 상큼한 찹샐러드에 올리브오일을 왜 넣을까 싶지만, 넣지 않으면 들어가는 맛과 향들이 한데 어우러지질 않는다. 꼭 좋은 올리브오일을 한 숟가락 넣어서 만들기를 추천한다.
자신있게 섞어서 한 입 딱 먹었는데, 어라? 노랑토마토로 만든 살사는 내가 평소에 먹던 토마토 살사랑은 조금 달랐다.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살사를 이미 만든 뒤에 노랑토마토를 시식해보았다. 먼저 진안노랑토마토는 일반 토마토보다 과육이 말캉했다. 그렇다고 바람 든 토마토처럼 느껴졌던 것은 아니고, 토마토의 묽은 씨부분과 과육의 경계가 일반 토마토보다 흐린 느낌이다. 과육에도 수분이 꽤 많고, 마치 뼈대와 살처럼 과육과 묽은 씨가 분리되는 보통 토마토와 달리 과육과 씨가 조금 더 조직적으로 연결된 것 같은 느낌? 이건 그냥 토마토 단면만 잘라보아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진안노랑토마토는 단맛과 짠맛도 일반 빨강토마토보다 덜했다. 대신에 약간 풀향 같은 향이 있었고, 다른 맛들이 강하지 않아서 그런지 신맛도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토마토로 만든 살사는 함께 들어간 오이, 양파와 함께 감칠맛을 담당하는 토마토가 탱탱하게 씹히는 게 아니라 다소간 물컹하게 씹혔다. 이 토마토는 찹샐러드 류에는 어울리지 않겠구나 바로 각이 섰다. 심지어 색깔도 찹샐러드일 때는 일반 빨강 토마토가 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만들어둔 건 다 먹어야 하니까, 신나게 먹어치우기로 하고 이 토마토를 어떻게 활용할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렇게 푹푹하게 씹히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맛의 토마토라면, 다른 채소들 없이 혼자로도 훌륭한 맛을 낼 것 같았다. 그래서 아침으로 빵을 먹으면서 간단히 뚝뚝 썰어서 발사믹 글레이즈와 올리브오일, 후추만 휘 둘러서 치즈 없는 카프레제 샐러드를 했다. 평소 빨간 토마토로 카프레제 샐러드를 먹을 때는 반드시 좋은 모짜렐라 치즈가 있어야 한다. 달큰한 발사믹 글레이즈와 강한 토마토 맛을 중화시켜 샐러드의 중심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진안노랑토마토는, 치즈 없이도 그 안에 머금고 있는 수분과 부드러움으로 다른 재료가 없어도 훌륭한 밸런스의 샐러드가 되었다. 다음번에는 오래된 트위터 레시피인 '나폴레옹 큰딸 샌드위치' 찹샐러드를 하느라 사뒀던 바질 남은 것을 찢어서 함께 먹었는데 더할나위 없었다.
저렇게 두 명의 아침상을 차리는 데에 필요한 재료는 그리 많지 않다. 거대한 토마토 하나, 적당한 크기의 청사과 하나, 탕종 호밀빵 세 쪽, 완전방사유정란 두 알, 무항생제 햄 약간, 견과류 조금. 나는 햄을 먹지 않아서 저만큼의 햄은 모두 집사람 몫이다. 여기에 커피나 차만 한 잔씩 곁들이는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먹어도 포만감이 꽤 커서 점심 때가 지나도 과히 배고픈 느낌이 들지 않았다. 치즈 없이 만든 카프레제 샐러드도 무척 훌륭해서, 밤에 와인에 곁들이는 안주로도 해먹었다. 친구 몇 명에게도 몇 개씩 나눠주면서 발사믹 글레이즈만 뿌려서 먹어보라고 열심히 영업을 했었는데, 그렇게 해먹었을지는 모르겠다.
오늘 아침에 마지막 노랑토마토 카프레제를 해먹었다. 옥주현이 했다는 유명한 다이어트 격언(?)인 '어차피 아는 맛이다'는 채소에 있어서는 아주 틀리다. 정말 다르다. 먹던 종이 아닌 채소, 마트에서 흔히 파는 획일화된 종이 아닌 채소는 내가 알던 맛이 아니다. 다른 채소를 구매하면서 익숙한 레시피가 아닌 아예 새로운 요리를 해보게 될 수도 있다! 노랑토마토는 언니네텃밭에서 구매했었는데 지금은 판매하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