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백수 요리일지 4) 내 식으로 개조한 파멸의 파스타
10년 전쯤 단골로 다니던 칵테일바가 있었다. 지금도 아마 다른 사장님이 운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성균관대 앞 명륜동에 위치한 '인생의단맛'이라는 곳. 지하에 있는 작은 공간이었는데 칵테일 네이밍이 귀엽고 음악도, 작은 화면에 나오는 영화들도 재미있어서 성균관대를 다니던 것도 아닌데 버스 타고 자주 가던 곳이다. 내 친구라면 나와 여기서 술을 마셔보지 않은 애가 없었고, 심지어 서울 올라온 엄마랑도 가고 고모랑도 가본 곳이다. 그만큼 사랑했었다...ㅎ 거기서 내가 자주 마시던 칵테일은 '부반장은 섹시해'라는 와인 베이스의 칵테일이었다. 적당히 단맛 신맛이 있고 거기 타닌의 텁텁함 덕에 입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어서 좋아하던, 자주색 칵테일이다.
안주가 없으면 섭한 곳이었다. 안주가 많지는 않았는데 그중 자주 먹던 것이 일명 '파멸의 파스타'다. 대단한 요리라서 이름이 저 지경이던 것은 아니고, 파와 멸치가 들어간 파스타라서 파멸의 파스타. 단골로서 사장님께 이 레시피에 대해 몇 마디 주워들은 뒤, 몇 년 뒤부터는 원래 레시피는 아니겠지만 내 식으로 이 파스타를 자주 해먹었다. 일단 이 파스타가 좋은 건 라면보다 금방 만들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맛있다는 점이다. 멸치와 파밖에 안 들어가는데 뭐 그렇게 맛있겠냐 싶겠지만, 얇은 면이 잘 불지 않고 파의 단맛과 멸치의 짠맛이 어우러져 특유의 스낵스러운 단짠의 조화가 매력적인 파스타다.
재료는 간단하다. 대파, 작은 세멸, 제일 얇은 엔젤스헤어 파스타면, 소금, 후추, 그리고 케이퍼와 요리용 화이트와인. 인생의단맛에서 먹던 것과는 살짝 다르다. 거기서는 완성된 파스타 위에 종류는 모르겠지만 고체치즈를 갈아서 올려진 채로 나왔다. 나는 요리할 때 치즈를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 그 대신 케이퍼와 요리용 화이트와인을 넣는 거다. 맛은 치즈가 없어도 충분히 난다. 평소에도 양식 요리를 할 땐 소스에 케이퍼를 꼭 첨가하는 편이다. 토마토나 멸치 등 다른 재료가 가진 감칠맛을 더 끌어올려준다. 화이트와인은 단맛을 더 올려주는 것 같다.
요리 과정도 별 거없다. 팬도 프라이팬 하나만 쓰면 된다. 과정샷에서는 케이퍼와 와인이 빠져있다.
1) 면 삶을 물을 팬에 올리고, 소금을 충분히 넣는다.
2) 파 한주먹을 쫑쫑 썰고, 케이퍼도 한 수저 정도 잘게 다진다.
3) 물이 끓으면 면을 넣고 2분 정도 삶는다.
4) 2분이 지나면 면수를 따로 한 컵 정도 받아두고 면을 따로 건진다.
5) 면 삶느라 이미 달궈졌던 팬을 다시 중약불 위에 올리고, 올리브유를 충분히 두른다.
6) 올리브유에 바로 다진 파를 넣고 달달 볶는다.
7) 대충 맛있는 냄새가 올라올 즈음, 멸치를 한주먹 넣는다. 양은 파 양에 따라 달라진다. 파와 멸치의 양이 1대1 정도로 보이면 맛있게 된다.
8) 멸치와 파가 함께 볶아져서 멸치에도 윤기가 돌기 시작하면 그때 다진 케이퍼를 넣는다.
9) 조금 더 볶아서 멸치, 파, 케이퍼가 한몸이 된 것처럼 보이면 불을 세게 올리고 화이트와인을 한번 솩 뿌려준다.
10) 보글거리다 물기가 졸아들면 건져둔 면을 넣고, 면수를 적당히 함께 부어준다.
11) 면과 소스가 어우러지게 볶다가 국물이 거의 졸아들면 완성!
12) 먹기 전에 위에 후추를 충분히 갈고, 올리브유를 한번 더 휘 둘러준다.
이 레시피에서 양보하면 안 되는 한 가지는 면이다. 당시 인생의단맛 사장님께 듣기로 면을 반드시 엔젤스헤어로 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그뒤로 이 파스타를 해먹은 게 몇 년인데, 물론 다른 스파게티 면으로 해먹어본 적이 있다. 대파가 아까워서 부엌에 남은 유일한 스파게티 면이었던 보통 굵기의 스파게티로 해먹어보았는데, 그 맛이 안 났다. 세멸과 얇은 파맛이 스며들려면 얇은 면에 해야 한다. 나는 엔젤스헤어를 주로 집 근처 이마트에서 구매한다. 어떤 브랜드더라도 스파게티 종류에 따라 이름과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이름은 엔젤스헤어가 아니더라도 1번을 사면 된다.
인생의단맛에서 먹던 파멸의 파스타는 사실 국물이 자작한 요리였다. 농도를 마지막에 올라가는 치즈로 조절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내가 개조한 파멸의 파스타 레시피는 치즈가 없고 국물이 적어서 조금 더 볶음면스타일로 보이긴 한다. 조금 더 해먹다 보면 더 촉촉한 버전의 파멸의파스타도 만들어 볼지 모르겠다. 그런데 뭐, 국물 자작한 파스타는 조개살 넣고 허브 뜯어서 넣은 향긋한 종류로 먹으면 되지. 단짠으로 이미 맛있는 스낵파스타를 굳이 그렇게 해서 먹을까 싶다.
맛은 있다. 향이 아니라 맛으로 먹는 파스타다. 엔젤스헤어는 어느 집에나 있는 재료가 아니라서 나는 집에 놀러온 친구에게만 해줘봤다. (당연히 그 친구도 10년 전에 나와 인생의단맛을 갔었다. 심지어 위의 옛날 사진을 찍어준 친구네..) 이번에는 이사를 앞두고 부엌 살림도 털어내고 맛있게 혼밥하려고 해먹은 터라, 케이퍼와 화이트와인은 없는 채로 먹었다. 간만 맞으면 여전히 맛있다. 폼나는 요리는 아니지만 이름이 재미있고 맛도 충분하니 함께 먹기도 좋고, 당연히 집에 가족들 없고 간만에 혼자 끼니를 챙겨야 할 때 후루룩 해먹기에 제격인 가벼운 파스타다.
파가 많을수록 맛있다. 멸치는 파에 따라 꼭 조절해야 한다. 생각보다 멸치 짠맛이 강하거든.. 그렇다고 면에 간을 안 하면 안 된다. 걘 따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