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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가까운 산(31)

by 김헌삼


소요산 소요기(逍遙記)



소요산(逍遙山)은 30여 년 전 가을, 중학교 소풍으로 서울에서 제법 먼 이곳을 한 번 다녀온 일이 있으나 그 뒤로는 이번이 처음 찾는 길이다. 오래 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 산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은 여러 번 가져봤으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어 왔다. 높이가 6백 미터 미만으로 만만한 것 같아 성에 안 차기도 하고, 단풍이 좋은 산이니 기왕이면 가을에 맞춰 찾을 염(念)으로 호시탐탐해도 막상 그때가 되면 뻐그러지고는 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은 무엇보다도 교통편이 한층 편해지고 보니 언제든지 갈 수 있다는 여유로운 마음이 오히려 뒤로 밀리게 된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해마다 단풍철이 되면 문득문득 소요산에 가야지 하는 마음만은 버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라도 그 희원(希願)을 실행에 옮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곳곳에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던 56년 가을, 검은 교복의 어린 학생 신분으로 전세버스에 가득히 실려 찾아갔던 기억이다. 흙먼지가 풀풀 나는 길을 텅텅 튀기도 하며, 언덕진 곳이 갑자기 내리막으로 바뀔 때마다 허공에 솟구쳤다가 그대로 가라앉는 듯한 짜릿함을 맛보기도 했다. 그렇던 도로가 이제 소요산 안쪽까지 미끈한 아스팔트로 바뀌었고 서울에서 4,50킬로 정도 되는 거리여서 승용차로 손수 운전해도 별 부담이 없다.

이번 소요산행은 홀로 나선 길이어서, 의정부까지 전철과 그 뒤는 기차 편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같은 여행이라도 기차를 이용함에는 색다른 멋이 있다.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 사이에는 저절로 친근감이 생기고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풍경도 온 세상이 기다란 한 폭의 그림으로 펼쳐지고 있는 듯하다. 열차를 타고 있는 시간은 의정부에서 주내 덕정 동두천 동안을 거쳐 소요산역에 내릴 때까지 35분밖에 안 되는 여정이었지만 그 사이에도 판매원이 “맥주! 오징어나 땅콩!”을 외치며 여러 차례 지나다니는 등 기차여행 특유의 맛을 그대로 안겨주기도 했다.

역에 내려 큰길을 건너면 바로 산 입구가 보이는데 그곳에 들어서도 계속하여 잘 포장된 아스팔트 길이었다. 그동안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어린 시절 걸어서 들어가던 추억이 되살아난다. 산 쪽으로 접어들면 계곡이 길가를 따라가고 있었다. 거기서는 차림만으로도 곧 알아차릴 수 있는 동두천 미군 부대 위안부들이 나와 있었다. 풋내 풍기는 여인들이 간편하고 헐렁한 옷들을 걸치고 맨발로 바위 위에 널린 듯 걸터앉아 늦가을의 따사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간밤의 고단함을 풀기라도 하듯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머리를, 느린 동작으로 감기도 하고 채 마르지 않은 머리 단을 빗질하거나 손톱을 매만지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들의 모습이 선하다. 풋풋하던 몸들은 이제 시들고 검고 윤나던 머리채가 희끗희끗한 할머니로 변해있을 그들은, 내가 그때 그 자리를 지나고 있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 후의 세월을 추적하여 캐본다면 곡절 많고 사연 깊은 이야기들이 수도 없이 얽혀있겠지만 나에게는 오직 그때의 한가롭던 계곡 풍경만이 한 장의 빛바랜 사진처럼 머릿속에 새겨있을 뿐이다.

소요산은 1981년엔가 국민관광단지로 지정 개발되었다는데 아마 그때부터 산이 철저하게 훼손되기 시작했을 것이란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계곡 초입은 복개되어 옛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위에 주차장과 음식점 매점 등 상가와 호텔조차 들어섰으며 덮이지 않은 곳도 시멘트벽을 쌓아 그 좋던 계류 대부분이 개천으로 변해버린 인상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산행의 갈림길인 원효폭포를 지나 자재암 구절터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자연보호 환경보전을 홍보하는 각종 철제입간판 플래카드, 끊임없이 외쳐대는 확성기 구호 등은 오히려 자연을 훼손하고 분위기를 잡치기에 한몫을 톡톡히 하는 것들이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글’이 산에서 왜 필요하여 이런 유의 게시판까지 설치해 놓았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화장실이나 정결하게 유지하고 길 안내표시를 간명하고 알기 쉽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내가 보기에는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곳의 철책 보호시설도 과잉친절이었다. 이 산의 간판 격인 천년고찰 자재암의 고풍스러운 기품도 좌측 바위 밑 공간을 석벽으로 쌓아 새로 만들어 놓은 나한전에 의하여 오염된 느낌이었다.

골짜기를 굽어보는 전망이 일품이라는 원효대는 꽉 들어찬 상가와 주차장의 차들, 그 사이로 오르내리는 인파의 혼잡한 모습이 눈에 들어와 이제는 오래 관망할 곳이 못 되었다. 자재암을 벗어나 중백운대를 향해 오르며 차차 개발이라는 미명(美名)하에 가설되어 있는 구조물과 멀어지며 비로소 자연의 아름다움과 대면한다는 의식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산행로 주변은 줄곧 첨단과 예각의 칼날 같은 차돌 바위로 이어졌다. 잘못 부딪쳤다가는 불의의 상처를 입을까 염려스러웠으나 확실하게 딛고 꽉 붙잡기만 하면 걱정될 정도는 아니었다. 바위 사이사이로 비집고 자라난 노송들은 척박함 속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키워내서인지 뒤틀린 모습이 오히려 춤추는 학의 길게 뻗친 날갯짓같이 아름답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산행을 시작하였고 돌아갈 차편 확실하고 넉넉하며, 산행 거리를 아무리 길게 잡아보았자 서너 시간으로 충분할 코스이므로 산 이름 그대로 소요하는 기분으로 유유자적하며 어슬렁거리기로 작정하였다.

산중에는 마침 단풍이 한창이었다. 단풍나무에 매달린 잎들은 선홍으로 물들어 햇빛 비추는 뒤편으로 보는 빛깔이 너무 맑고 선연하며 현란한 색감이 신비스럽기까지 하였다. 후박나무의 노란 잎들도 뒤질세라 환상적인 색조가 두드러졌다. 멀리 보이는 숲은 숲대로 오색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며, 중백운대에 올라서서 바라보는 나한대와 의상대 산자락 단풍이 특히 돋보였다. 상백운대를 돌아 나한대로 향하면서부터 능선의 바위들은 이제까지의 차돌 무리가 사라지고 얇게 형성된 적석층이 파도치는 듯한 형상으로 혹은 높고 혹은 낮게 불균형으로 솟아 각별한 미감을 이루고 있었다. 나한대를 지나며 다시 차돌바위 군으로 바뀌었으며 이 부근 단풍들이 멀리서 유독 고와 보였던 것은 잎들이 싱싱한 상태에서 순결하게 물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고봉 의상대(義湘臺 587m)가 가까이 다가오며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산에 가면 우선 정상을 목표 삼아 그곳으로 집합하듯 몰려든다. 의상대에 이르러서는 아기자기한 바위 능선을 타고 곧장 내려가는 길도 있으나, 시간이 넉넉하니 뜬구름 같은 마음으로, 봉이란 봉은 두루 들를 계획이었다. 다소 코스가 길어지더라도 저만치 떨어져 있는 마지막 공주봉을 향하여 발길을 돌린다. 공주봉에서는 서남 방향으로 비교적 넓게 자리 잡은 동두천 시가가 한눈 안에 확 들어오고 정남 쪽으로 칠봉산 천보산 또 그 너머로 멀리 수락과 도봉 북한산까지 선명하고 시원스럽게 바라볼 수 있다.

공주봉에서의 하산 길은 경사가 다소 급한데 축축하게 젖어있어 미끄럼방지에 바짝 신경 써야 했다. 절터 경유 원효폭포 앞에 다시 서니 야유회 기분으로 뒤늦게 찾아온 인파로 혼잡을 빚고 있었다.

일주문을 빠져나와 매표소 부근에 이르면 다목적 광장을 보게 되는데 여기가 옛날에 주변을 서성이며 소풍 하던 자리인 듯하다. 그때 그 자리에 다시 서서 산의 연봉을 관망하니 돌아온 봉우리들이 품을 한껏 벌리고 포용하려는 듯 친근한 모습이다.

산 초입은 비록 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들어찬 각종 시설이 눈에 거슬렸지만 산 위로 오르면서 잘 물든 단풍과 더불어 수려한 산세, 그다지 부담 없는 산행으로 하여 가족과 더불어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을 품고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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