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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가까운 산(6)

by 김헌삼

검단산 전망대



지니고 있던 잎들을 모두 떨쳐버리고 앙상한 형상으로 고사(枯死) 하여가고 있는 것처럼 서 있는 나목들, 그 가지마다 기적같이 생기가 돌고 연둣빛 점들이 어지러이 돋아나더니 어느새 신록으로 성장(盛裝)하여, 무성한 숲을 걷는 기분이 어느 때보다 상쾌하다. 효기(曉氣) 속에서 코끝으로 스며드는 수향(樹香)의 싱그러움, 그중에서도 싸리와 칡 냄이 출중하다. 길 오른편 작은 계곡을 따라 흐르는 계곡의 골골골 물소리는 더욱 청아한 느낌이다.

서울 근교에서 쉽게 갈 수 있는 산으로 북한산이나 도봉산 또는 관악산만 알고 지내다가 검단산(黔丹山)을 발굴하여 다닌 지는 얼마 안 되었다.

도심 가까이에 위치하고 교통편도 좋아 부담 없이 다닐 수 있음에도, 언제나 한적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하남시 외곽에 자리하기 때문인 것 같다. 서울 동남부 하남시 중심을 관통하여 국도를 따라 광주로 향하다가 중부고속도로의 톨게이트와 마주한 미군 부대 뒤로 있는 산이 해발 685미터의 검단산으로서 서울 주변에서 북한산, 도봉산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결코 만만한 산이 아니다.

부대 앞을 지나 약 1킬로 지점 하산곡동에서 국도를 버리고 계곡 옆길로 꺾어 들면 산곡초등학교 교문이 마주치고 그 옆 측백나무 울타리를 끼고 지나며 대여섯 채의 양옥이 나타나는데 이 가옥들 진입로에서 우측으로 들어서면 본격적인 산행길이다.

완만한 오름을 20 여분쯤 했을까. 몸이 달아오르고 페이스가 자리 잡힐 즈음 계곡의 합수점 앞에서 길은 왼편으로 구부러져 급한 오르막으로 돌변한다. 산을 오르며 힘겨워지면 「산은 오르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라는 누군가의 도전적인 주장을 추종하기도 하고 「힘들여 오르는 길이 있으면 반드시 쉽게 내려오는 길도 있다」는 고진감래의 철학으로 자위도 하지만 요즈음은 오르는 것에 관하여 무상무념으로, 조급해할 필요 없이 산을 음미하며 꾸준히 한 걸음 한 걸음 옮겨놓는 것이 최상이라는 생각이다. 다 올라가 보면 서둘러 앞서간 사람들이 아직 거기에 머무르고 있어 그래봤자 큰 차이 없이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잠시 숨을 몰아쉬다 보면 오른편에 위쪽으로 「휴게정자 0.8km」라고 씌어있는 나무표지판을 지나치게 되며 곧이어 홀로 우뚝 선 소나무가 맞이한다. 이 나무는, 못 본체하고 그대로 지나쳐서는 안 될 것처럼 반기는 기색으로 거기 서 있다. 그만한 경사 길쯤이야 구태여 쉴 필요를 느끼지 않더라도 잠시 멈춘다. 그것이 나무가 지난 세월 동안 길목을 지키고 서서 지나다니는 많은 사람을 기꺼이 맞으며 편안한 쉼의 공간을 제공해 온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일 것이며, 정다운 눈길이라도 줬다가 일어서는 것이 산에 다니는 사람으로의 예의이며 아량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송(長松) 축에는 못 끼어도 그 생김 또한 수려하고 나무 주위로는 걸터앉기 좋은 바위들도 깔려있으니 더욱 그런 생각이다.

옛사람들이 자연을 사랑하고 즐기며 유유자적하던 것과는 달리, 현대를 사는 우리는 실리만을 따지며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산행을 스포츠화 하는 경향이 있다. 산에 다니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것을 지나치게 내세우고 산행시간에 많은 신경을 집중하고 단축에 골몰한다. 사실 나도 그 범주를 못 벗어나는 속물이어서 여럿이 산행을 하다 보면 은연중에 경쟁심리가 발동하여 누구보다 앞서가려는 나를 자각하고 마음의 자세를 고쳐 갖는다. 그래서 산행 중에 마주치는 수많은 바위, 나무, 샘물, 계곡들이 모두가 다른 모습으로 각각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조화에 놀란다.

꽃들이 피었다가는 지고 잎이 나서 자라고 또 물들어 떨어지고 나면 몇 차례 흰 눈으로 깨끗하게 지워보기도 했다가 어김없이 처음으로 돌아가며 반복하는 자연의 질서를 대하며 더 깊은 애정과 친근감으로 관조하며 나 또한 자연의 한 부분으로 동화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번갈아 나타나는 너덜겅, 돌계단, 통나무계단을 차례로 올라가면 계곡의 시원(始源)이라 할 샘물이 있고 그 위부터는 길 양편으로 억새들이 무성하다. 억새는 한 가닥의 바람결에도 이리저리 쏠리는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스산하고 황량한 기분에 빠지게 하지만 ‘황량한 감회’도 때때로 품어보는 것은 사람의 간사한 마음 탓일 것이다. 정자가 있는 개활지를 지나면 정상도 멀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대체로 산에 들어가기 전에는 원경(遠景)으로 산세 등 산 전체적인 규모를 가늠하고, 산속에서는 구릉과 바위 계곡 거기 서식 생장하는 초목이 조화로서 엮어내는 분위기를 완상 하게 되며, 산 위에 올라서면 발아래 멀리 한눈 안에 들어오는 파노라마를 조망하는 멋에 취한다. 산의 아름다움을 이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놓고 보면 산마다 각기 특장(特長)이 있는데, 검단산은 그중에서 정상으로부터의 전망이 뛰어나게 아름다운 산이다.

정상은 헬리포트가 있는 평지에 불과하나 굳이 전망대라 불리는 까닭은 동쪽으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하며 팔당 쪽으로 흐르는 양수리를 구심점으로 하여 세 갈래의 큰 강줄기가 시원스레 뻗어있다. 주위로는 가까이 예봉산 운길산을 비롯하여 양자산 화야산 유명산 용문산 그 밖에 많은 봉우리가 끝없이 첩첩하게 펼쳐있어 가슴을 탁 트여주는 시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봉우리 사이를 가르고 아침 해가 장엄하게 떠오르며 온 누리를 주황의 빛살로 감쌀 때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맛볼 기회가 함께 닿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여러 번 보아온 것이면서도 이 조감도를 머릿속에 새로이 그려놓고 그 여운을 음미하며 하산 길에 접어든다. 서두르지 않아도 호국사 쪽으로 내리는 길은 급전직하여서 저절로 내리 닿는 기분이다. 산 밑까지 내려오면 낙엽송이 빽빽하게 자란 지역이고 등산로에서 좀 떨어진 곳에 호국사가 위치하나 아직 절다운 형태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하산의 목표로나 삼는다.

부추밭이 많은 창우동 마을을 벗어나 국도로 나오면 바로 버스정류장이고 모퉁이 하나를 돌아서면 70년 전통이라 자랑하는 마방집이 있다. 복잡하고 혼탁한 도심으로 돌아오기 전에 이 고풍(古風)의 집에 들러 백반 한 상으로 시장기를 달래며 옛날 한가롭기 그지없던 시절 괴나리봇짐을 지고 한양으로 가던 과객의 기분에 취해보는 것도 검단산행과 아울러 가져보는 즐거움의 하나라 하겠다. (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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