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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an 08. 2023

동생에게

2023년 1월 8일에 쓴다. 얼굴 보고 전하지 못한 것을 이해해라. 직접 건네줄 정도로 다정한 형은 아니다. 그리고 첫 편지가 손 편지 아님을 다시 한번 이해해라. 약하디 약한 내 손목이 한스럽다.


2023년이 밝았구나. 눈 떠보니 너는 예비 고3, 나는 예비 군인이다. 아, 올해는 우리 둘 다 쉽지 않겠구나. 형제가 나란히 고난의 세월을 겪는 것이 참으로 묘하다. 힘든 와중에도 건강하기만을 바란다. 물론 너는 학교생활이 할만하다고 말했다. 진짜냐? 정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고등학생으로서 어쩔 수 없이 경험하는 부담감도 어느 정도 있었을 거다. 없었다면 너의 그 태평함을 살아가는데 무기로 삼고, 있었다면 훗날을 위하여 막연했던 부담감이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해 보아라. 그리고 네가 지닌 현실 감각을 날카롭게 갈고닦아라. 너의 재능, 관심 분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저 사람은 왜 저러는지... 그런 것들 말이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 그건 나도 잘 모른다. 물론 나는 나만의 방식이 있긴 하다. 친구들에게서든, 선생에게서든, 가족에게서든, 유튜브를 통해서든, 책을 통해서든, 게임을 통해서든, 운동을 통해서든, 알바를 통해서든, 사랑을 통해서든, 너만의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하길 바란다.


2층짜리 집에서 살던 시절을 기억하느냐? 눈싸움을 하고 합기도를 하던 추억이 이제는 세월의 바람맞아 닳고 닳아서 없어질 지경이구나.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피규어 놀이를 할 때 항상 내가 대장 노릇을 하지 않았더냐? 그때나 지금이나 욕심이 많은 건 똑같다. 피규어 놀이는 부끄럽지 않으나, 대장 노릇은 부끄럽다. 살아보니 부끄러운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쓰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는데, 우리가 싸운 적 있었나? 내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 너는 어떻게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내 친구 민종이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어제 같이 술 먹으며 너에 대해 묻더라. 그래서 너의 진로와 성적을 말해주었다. 우려 섞인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적으로 너를 논하는 게, 그게 형으로서 할 일이냐? 애석하고 미안했지만, 친구가 관심을 표하고 신경 써주는 게 얼마나 고마웠던지... 그리고 그 친구는 3수 아니더냐? 3수는 할 게 못되니, 수능 준비할 거면 1월 안에 시작하는 게 좋으며, 빨리 정신 차리면 차릴수록 좋다고 말하였다. 누가 네 형인지, 참으로 부끄러웠다.


동생아, 너는 무엇을 좋아하느냐? 무엇이 되고 싶으냐? 무엇을 하고 싶으냐? 또는, 무엇이 싫으냐?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은 무엇이냐? 예를 들어 또는 원하는 목표(대학이든 뭐든)를 이루지 못하는 고통이 크냐, 당장 놀지 못하는 고통이 크냐? 물론 이런 것들은 그 시절이 다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다.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알기 어렵다, 이 말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냐. 아까 말했듯, 유튜브든 책이든 주위 사람이든 간접경험을 통하여 알거나, 때로는 무작정해보는 것도 방법일 수가 있겠다.


10대 시절, 자신의 꿈을 찾는다는 건 멋진 일이다. 진로에 대한 고민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애써 꿈을 찾는 건 우스운 일이다. 강요한다고 하여,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닌데 말이다. 꿈이 바뀌는 것도 자연스럽다.


나의 경우도 그렇다. 멋모르고 제출하던 꼬마 시절의 진로희망부터 훌쩍 자란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상했던 미래를 비교해 보면 너무도 다르다. 같은 게 있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어리숙하다는 것?


몸담은 집단이 변하고, 처한 상황이 변하고, 만나는 사람이 변했으니 생각 또한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취미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어떤 계기가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예를 들어 취미생활을 하다 다친 경우. 또는 취미를 직업으로 삼았을 때 싫증이 날 수도 있겠다. 물론 대학생인 내가 답할 문제가 아니다.


네가 즐겨 하던 활동을 떠올려보아라. 거기에서 출발하자. 거창하게 10년 뒤, 20년 뒤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와닿지도 않을 거다. 생각해 보았나? 운동? 게임? 만들기?


운동이라고 다 같은 운동이 아니고, 게임이라고 다 같은 게임이 아니다. 운동 좋아하면 운동선수? 게임 좋아하면 프로게이머? 그렇게 생각하기엔, 세상은 너무 넓고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혼자 하는 운동인지 함께하는 운동인지, 발로 하는 운동인지 손으로 하는 운동인지 온몸을 사용하는 운동인지, 승부욕이 강한지 약한지, 규칙이 중요한지 상황 따라 유연하게 적용하는 게 중요한지, 관중이 있는 게 좋은지 없는 게 좋은지, 선수들의 기술을 보고 따라 하는 게 좋은지 그냥 몸 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게 좋은지... 한마디로, '운동'이라는 큰 범주 속에서도 무엇이 좋은지 찾을 수 있다는 거다. 규칙을 중요시한다면 심판을 꿈꿀 수도, 경기 분석을 좋아한다면 스포츠 분석가가 될 수도 있다. 운동하다가 다친 친구들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 도움을 주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면? 팀 닥터.


게임의 경우는 어떨까? 화려한 그래픽이 좋은지 잔잔한 그래픽이 좋은지, 협동 플레이가 좋은지 싱글 플레이가 좋은지, 현실과 유사한 게임이 좋은지 현실을 초월한 게임이 좋은지. 꾸미는 걸 좋아한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디자인을 공부해 보거나, 경영 게임을 즐긴다면 리더가 되어 보거나 종사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라. 정형화된 빌드가 존재하는 장르가 좋은지, 자유도 높은 오픈 월드가 좋은지 또한 고민해 보아라. 여러 가지를 조합해 보면, 한 줄기 빛이 보일지도?


물론 나는 그렇게 하였나? 그런 과정을 거쳐 삶의 방향을 정했나? 그건 아니다. 의식적으로 고민하지 않더라도, 저런 판단이 어느 정도는 삶에 녹아들어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으나, 구질구질한 변명이다. 그래서 형은 언제 할 거냐고? 걱정 마라. 머지않아 저런 생각, 실컷 하게 될 거다. 군대에서 말이다... 써놓고 나니 민망하다. 내가 실천하지 않았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사람들은 말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 가라. 나중에 대학 가면..."


왜 명문대냐?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취업 준비를 해본 것도 아니고, 사회 경험이라곤 미약하다. 게다가 요즘엔 학벌사회가 무너지고 있다고 한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러나, 아직까지 대입은 우리 교육의 목표처럼 보이고 사회 인식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학벌에 크게 관심 없는 나조차도, 명문대 다니는 사람이라면 뭔가 능력 있어 보인다. 물론 와보니 꼭 그런 건 아니더라. 저 사람은 왜 저러나, 싶은 인간은 어느 곳에나 있다. 다 사람 사는 곳이다.


그래서 왜 명문대냐? 내 생각에, 학벌은 효율적이면서도 사회적으로 합의된 지표다. 어떤 지표? 학창 시절, 학생 수준에서 요구할 만한 역량을 잘 소화했느냐 못했느냐를 아주 간단하게 판단할 수 있다. 쉽게 말해, 과거의 성실함을 기준으로 현재의 성실함을 엿보는 거랄까. 학벌은 수많은 지원자들을 무 자르듯 단칼에 나눌 수 있다.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 그러나 모든 지원자를 면밀히 살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보와 시간 모두 부족한 상황에서, 학벌은 매력적인 판단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정확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길게도 적었다.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을, 지원할 때쯤에야 알았다. 명문대를 목표로 공부하면 하루하루가 쉽지 않다. 명문대는 정원이 정해져 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내 경험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어디선가 주워듣고서 나 또한 노력 중인, 그런 이야기다.


아까, 명문대는 정원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정원이 없는 목표 또한 있다. 운동하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정해져 있나? 한 명이 재밌다면 다른 한 명이 재미없어야 하는 게 아니다. 누구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하는 것만으로 즐거운 행위를 찾아서, 몰입했으면 좋겠다. 결과는 보너스라고 생각하자. 여러 즐거운 활동 중에, 남들보다 잘하고 대입에도 활용할 수 있다면? 그거다. 그거면 되었다.


내가 방금 말한 건, 삶의 태도다. 나 또한 오래오래 갈고닦아야 하는 삶의 태도... 그러니 성과를 보여야 하는 고3이 그렇게 하기란 적절하지 않으려나? 때로는 복잡하게 생각 말고 무작정하는 게 좋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소한 고3은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시기일지도. 이 세상에는 다양한 '공부'가 있지만, 지금 내가 너에게 말하는 공부는 '학교 공부'다.


네 이름을 한 번도 쓰지 않았구나. 너의 이름을 부르며 글을 마친다. 경연아, 네가 대학을 가든 안 가든, 꿈이 있든 없든 너는 내 동생이다. 선택은 너의 몫이니 살고 싶은 대로 살 거라. 그러나 짧게나마 살아보니, 살고 싶은 대로 살아지는 것도 아니더라. 그럴 때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해라. 이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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