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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May 06. 2024

어머님 전상서


 어머니, 웬일인지 오늘따라 갑자기 어머니께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들어 몇 자 적습니다. 20년쯤 전인가 <부모님 전상서>라는 제목의 TV 드라마가 있었지요.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송재호 씨가 아버지 역으로 나오는 드라마였습니다. 우리 가족이 즐겨 보던 연속극이었으니 어머니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오래전 본 것이라 세세한 기억은 없으나,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아버지가 아들, 딸 등 가족에게 일어나는 일상들을 매일매일 보고하는 편지 형식의 구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뜬금없이 갑자기 그게 생각나서 제목을 ‘어머님 전상서’라고 붙여보았습니다. 물론 어머니는 아직 생존해 계시고, 더구나 한 지붕 아래 같이 지내는 터라 편지 같은 걸 써서 전할 이유야 없으니 그저 그 연속극처럼 가상 편지 형식을 빌려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머니께 편지를 쓴 기억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혹시 입대했을 때 신병훈련소에서 ‘강요’에 따라 쓴 편지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기억나진 않습니다. 그래서일까 어색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네요. 어머니, 올해는 어머니가 (세는 나이로) 꼭 100세가 되는 해입니다. 아흔을 넘긴 노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장수 시대이지만 그래도 100세란 엔간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꿈같은 나이’겠지요.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만, (만)100세가 되면 정부에서도 장수를 축하해서 귀한 청려장靑藜杖을 선물로 드린다고 하잖아요. 치매도 없고 특별히 큰 병도 없을 만큼 타고난 건강을 자랑하던 어머니인데, 최근 몇 달 사이 급격히 쇠약해진 모습을 보면서 그 강철 같던 어머니도 이제 마지막 길에 이르신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계속 무슨 말을 건다며 한밤중에 깨어나서 베란다를 향해 언성을 높여 야단을 치시기도 하고(아침에 그 말씀을 드리면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표정이지만), 어머니 나이를 아흔셋이라고 대답한 적도 있는 데다, (동네 병원 의사 말로는 임파선에 이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목의 통증을 호소하는 정도가 심해지는 걸 보면서 더욱 그런 우려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몇 해 전부터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요. ‘올해는 그만 가야 할 텐데.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 네 아버지 기일과 합쳐서 한 날에 제사를 지내도록 여름 되기 전에는 가야 할 텐데’ 라고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며’ 그 모질고 긴 세월을 살아오신 어머니의 한평생을 되새겨보게 됩니다. 100세 생일을 앞두고 어머니와 통화한 사촌 누나가 그러더군요. 그 ‘쌩쌩하던‘ 작은엄마 목소리가 아니더라고. 어머니가 그러셨다면서요? ’ 이제 그만 가야지. 그동안 고마웠다. 너 같은 질녀가 있어서 행복했다 ‘고. 그 말을 전하면서 누이가 울더군요. 아버지와 사별하고 생계가 막막하던 시절 몇 년 동안,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큰집 조카들을 보살피며 한집에서 산 인연으로, 어머니는 평생 누이를 딸처럼 의지하셨지요. 아마 어머니는 그런 인사를 누나에게 (어쩌면) 마지막으로 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는 저나 제 아내를 두고 효자 효부라고 하셨지요. 아마 말년까지 부모를 모시고 사는 집이 드문 세태라 100세가 되도록 한집에서 봉양한다는 그 사실만으로 좋게 말해주는 주변 친지들의 말을 듣고 하는 말씀이겠지요. 어머니 며느리는 그런 말을 들어도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야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인가요. 세월이 많이 지나 지난 일이 어렴풋해진 어머니에게는 잊힌 기억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어머니의 속을 얼마나 썩였던가요. 막내 삼촌의 권유로 제가 홀로 서울로 전학온 게 초등학교 3학년이었지요. 다음 해에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왔고, 그 다음다음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지요. 그때 어머니는 서른아홉이셨고요. 올해 어머니가 100세이니 61년이 지났네요. 중고등학교 시절 저는 참 많이 방황했지요. 학교를 무단결석해서 정학을 당하게 된 상황에서 어머니가 담임선생님에게 저간의 집안 사정을 호소하며 무릎을 꿇고 사죄한 덕분에 겨우 졸업을 했지만 이어진 입시 실패로 어머니 마음을 또 얼마나 상하게 했습니까. 온갖 장사와 막일 같은 것으로 생계를 지탱해 온 어머니가 오직 하나 바라본 것이 자식의 성공이었는데 그런 기대를 (더구나 장남으로서) 허무하게 배반하는 자식에게 얼마나 실망을 느끼셨을지는 세월이 지나 제가 어른이 되었을 때 익히 깨달을 수 있었고요. 언젠가 어머니가 그러셨지요. 세상에 너 같은 자식만 있다면 어느 부모가 자식을 키우겠느냐고요. 그런 자식이었으니 어머니에게 맞기도 많이 했지요. 무단결석 사실을 알고 난 어머니가 나무 빗자루로 저를 얼마나 때렸는지 온몸에 줄이 죽죽 가도록 멍이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참 철없는 자식이었습니다. 아마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저는 일찌감치 나락으로 떨어져 평생 절망적인 삶을 살았을 거예요. 이제 새삼 예전 일을 생각하니 여러 가지가 떠오르네요. 행상을 나갔다가 공사장인가 청소 현장인가를 지나다가 쇠스랑에 얼굴을 찍혀 병원에서 치료 받고 오셨던 일, 가까운 친정 사람을 위해 남의 돈을 융통해서 빌려주었다가 갚지 못한 바람에 방 두 칸짜리 집을 날리고 거리로 내쫓겼던 기억, 가까운 친척 집 일을 봐주고 ’월급‘을 받는 날이었다던가요? 마침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건네받는 과정에서 실수로 진흙탕 바닥에 떨어뜨린 돈을 주으면서, 행상을 하더라도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겠다고 눈물 빗물 섞인 얼굴을 닦으며 이를 악물었다는 이야기. 둘째 아들의 사업 실패로 닥친 고난의 날들, 노년 들어 입버릇처럼 자주 하시던 ’남편에게 사랑받으며 평생을 해로하는 여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말······. 물론 이런 서글픈 사연만 있었던 건 아니었지요. 어머니, 기억나시나요? 입시로 애를 먹이던 제가 대학 졸업 전에 대기업 취업이 결정된 날 그렇게나 좋아하시던 일이나,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에 결혼한 제게 첫 아이가 나던 날, 그러니까 어머니가 첫 손주를 보시던 날, 2년이 멀다 하고 남의 집 문간방을 전전하다가 경기도 변두리에 작은 아파트를 마련하던 날 이방 저 방 온종일 쓸고 닦으며 대견해하던 일 말입니다. 이 짧은 글에서 제가 어찌 그 긴 세월의 희로애락을 열거할 수 있으며, 어머님이 겪은 신산하고 고단했던 삶을 만 분의 일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최근의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자꾸 지나간 날의 순간순간들이 떠올라서 두서없는 말들을 늘어놓게 되네요. 제가 이렇게 회한이 많은데 어머니에게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어머니와 동시대를 살아온 노인들에게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비슷한 삶을 살아온 분이 많겠지요. 힘들고 고단하던 시대였으니까요. 그러니 저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열 권도 넘을 것이다‘라고 하잖아요. 어머니도 종종 그런 말을 하셨고요. 일본에 있을 때 후타바 유리코(二葉百合子)라는 가수의 <간페키노하하岸壁の母>라는 옛날 노래를 많이 들었어요. 날마다 해안 절벽에 나가 바다를 바라보며 전쟁에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노래한 곡이지요. 사람들이 이 노래를 그 시대 어머니의 원형이라고 평하기도 하던데 저는 이 노래를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뜬금없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울기도 했지요. 모진 세월을 산 어머니의 모습이지요. 저는 평생 어머니께 죄진 자식입니다. 그 사연은 아내나 자식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가물가물하는 촛불 같은 어머니를 바라보며 정말 흔한 말로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입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오늘 편지는 이것으로 줄이겠습니다. 언젠가 어머니의 고단했던 삶을 돌아보는 긴 편지를 쓸 날이 있겠지요. 그리고 <부모님 전상서>의 아버지처럼 남은 가족들의 일상을 전하는 편지를 쓸 날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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