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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Apr 22. 2024

이사

아침부터 전동사다리 오르내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창밖을 내다보니 이삿짐 트럭에 장착된 물품 운반용 전동사다리가 바로 우리 옆집에 연결되어 있다. 사다리는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세간살이 물품을 나르고 있다. 현관문 보안경에 눈을 대고 보니 맞은편 집 앞 복도에 종이상자로 포장된 크고 작은 물건들이 놓여 있고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다. 집안에서는 포장된 물건들을 옮기는 이삿짐센터 직원들로 분주하다. ‘아, 옆집이 이사를 가는 모양이구나.’ 옆집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 둘이 있는 젊은 부부인데 내 기억에 이사 온 지가 (겨우) 2년 남짓 되었다.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인사나 주고받을 정도일 뿐 남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고향은 어디인지 알고 있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현관문에 십자가와 함께 ‘OO교회’ 이름이 적힌 표지가 부착되어 있어 ‘교회를 다니는 분이구나’ 하는 정도만 알고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렇게 봄철이 되면 우리 아파트 여기저기에서 이사 가는 풍경을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묘한 기분에 젖는다. 앞에서 맞은편 집이 이사 온 지 ‘겨우’ 2년 남짓이라는 말을 했는데 굳이 그 대목을 쓴 것도 그런 기분의 일환이다. 내가 이 동네로 이사 온 건 ‘23년 전’이다. 이 동네가 신도시 1기로 조성된 지 10년쯤 지난 시기였다. 그때만 해도 제법 ‘말끔하고 번듯한’ 아파트였다. 더구나 우리 집은 내부를 새롭게 단장해서 바닥과 벽도 고급스러웠고 전등과 커튼 등도 새것이었다. 우중충한 변두리 아파트에서 살던 우리 수준으로는 ‘부티 나는’ 집이어서 흡족한 기분이었다. 당시 우리 단지에는 아파트 이름은 달랐지만 5∼60m 거리 안에 살고 있던, 비슷한 시기에 이 동네로 이사 왔던 직장 동료들이 몇 명 있었다. 이사 와서 4, 5년쯤 지난 뒤부터 그들은 하나둘 이 동네를 떠나기 시작했는데 그때마다 그들은 이제는 '서울로 들어가야 할 시기'라면서 내게도 이사 갈 것을 권유했다. 나는 그럴 생각은 꿈에도 없었기 때문에 ‘이 공기 좋고 불편한 것 없는 동네’를 떠나 굳이 왜 서울로 가야 하느냐며 너희들이나 가라고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중에 후회할 거라며 나를 남겨 두고 마포로 옥수동으로 분당으로 이사를 갔다. 당시만 해도 그런 동네 집값과 우리 동네 집값이 그리 큰 격차를 보이지는 않을 때였다. 이제 그 격차가 얼마나 되는지는 얘기하지 않아도 다 짐작 가능한 일이니 생략하고······. 아내는 가끔 그 일을 상기하며 우리의 ‘무딘 감각’을 한탄하지만 애당초 ‘이재理財 감각은 빵점짜리’인 나는 그냥 무덤덤할 뿐이다. 무딘 이재 감각도 그렇지만 굳이 이사에 소극적인 이유 하나를 찾자면 2년이 멀다하고 집을 옮겨 다닌 청소년 시절의 고달픈 경험이 너무 진해서인지도 모른다.      



 아내가 동네 문화센터에서 민화를 배운 지는 10년 가까이 되는 듯하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아내는 그 방면에 꽤 재능이 있는 것 같다. 30년 가까이 전 동남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해외 주재 근무를 할 때도 포셀린 페인팅을 배웠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르치는 사람도 별로 없고 도자기를 구울 포터블 가마 등의 도구도 필요해서 귀국 후에는 그만두었는데 지금도 그때 그린 작품을 여러 개 보관하고 있다. 민화를 배우고 나서도 지도 선생으로부터 칭찬도 받고 회원들로부터도 ‘잘 그린다’고 부러움을 사는 것 같다. 10년 가까운 기간에 만든 작품도 많다. 일월오봉도나 십장생 병풍을 비롯하여 개와 호랑이 같은 동물과 꽃 등 소재도 다양하다. 회원들끼리 전시회도 하고 바자회 같은 행사도 몇 번 했다. 그러나 아내는 그냥 자기가 좋아서 그리는 것일 뿐 어디 전시하고 남에게 보여주는 것은 소극적이다. 다만 때가 되면 기족과 친지들을 위한 작은 전시회 같은 것을 하고 싶은 바람은 있는 것 같다. 재작년과 작년, 아내는 동물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호랑이 그림을 많이 그렸다. 나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 호랑이 그림 그리기는 꽤 능숙한 솜씨가 필요해 보인다. 털이나 수염 등 가느다란 선의 섬세한 처리가 그랬다. 표정과 각도가 다른 호랑이 그림들을 여러 장 그렸는데 민화 회원 한 분은 돈을 주고 사고 싶다고 간청을 해서 난처한 적이 있었고, 동네 바자회 전시를 본 분 하나가 찾아와서 호랑이 그림을 팔라고 졸라서 아내가 거절하느라 애를 먹은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그린 호랑이 그림을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큰딸과 아들에게 보내고 작은딸 방에 걸어 놓았다. 신령스러운 호랑이가 아이들을 지켜주고 행운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내는 그림을 그릴 마땅한 장소가 없어 늘 아쉬워한다. 방이 4개짜리 아파트이긴 하지만 옛날 구조의 집이라 효율적이지 못하다. 방이 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것들이고, 게다가 그 4개를 하나는 안방으로, 하나는 노모가, 하나는 작은딸이, 하나는 내 공간(막내아들이 쓰던 방)으로 쓰다 보니 여유가 없다. 아내는 한동안 거실 바닥에 펼쳐 놓고 그리다가 지금은 안방에서 접이식 작은 상을 펴놓고 그리고 있는데 늘 불만이다. 상은 좁고 여기저기 물감들은 바닥에 흩어져 있다. 아내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나 역시도 붓글씨 쓸 공간이 없어 집에서는 연습 한번 해 보지를 못한다(물론 내게 이건 허울 좋은 핑계에 불과하다). 아내는 넓고 긴 탁상을 놓을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당장 해결될 일이 아니다. 요즘 아내와 나는 이사에 대한 말을 자주 한다. 우선 집이 오래되어 곳곳에서 위험신호를 보낸다. 외벽 누수에, 보일러 시설은 언제 긴급 사태가 터질지 모르고, 전등이 온전한 방이 없다. 그런 이유보다 더 간절한 것이 있다면 편안하게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은 욕구다. 방 하나는 작업실로 쓰고 또 하나는 내 서재로 쓰는, 그게 불가능하다면 아내의 작업실과 서재를 겸한 방 하나를 마련할 수 있는 그런 집으로 이사 가는 ‘꿈’이다. 언젠가도 적었지만 나는 수십 년 동안 대중없이 사 모은 책이 적지 않은데(이 방, 저 방과 베란다 수납장 등에 ‘처박아’ 놓아 곰팡이가 슬고 삭아서 조금만 건드려도 종이가 바스러질 지경인 책도 많다), 이 책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 서재를 갖는 것이 소원이다. 서가를 죽 훑어보고 아, 이거다 싶은 책이 보이면 ‘쓱’ 뽑아서 볼 수 있는 그런 서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때가 언제쯤 올까?  아내와 나는 요즘 들어 자주 이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글쎄, 그게 언제쯤이나 될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 문제도 걸리고 저 문제도 걸리고······.


 내가 청소년 시절 어머니는 해마다 정월이 되면 그해 ‘신수’를 보러 ‘용한 사람’을 찾아갔다. 거길 다녀온 날 들려준 어머니의 말 중에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말이 ‘올해 이사수(이사할 운수)가 있단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올해 또 이사를 간대요?” 하고 볼멘소리를 냈었는데, 이제 이사할 적당한 운수를 기다리는 꼴이라니,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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