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아내와 둘째 딸과 함께 일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았다. 지난주 신문 스크랩을 하다가 발견한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영화다. <퍼펙트 데이즈>는 빔 벤더스가 연출한, 도쿄 시내 화장실 청소부를 소재로 한 영화라는 소개가 있었다. 왠지 ‘잔잔하고 소박한’ 영화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주인공인 야쿠쇼 코지가 이 영화로 칸느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아 화제가 되었다. 어렴풋이 배우의 이름을 들어본 바는 있지만 그 배우가 나온 영화(<우나기> <쉘 위 댄스> 등)를 본 적은 없다. 대학교 다닐 때 독일문화원에서 빔 벤더스의 영화를 몇 편 본 덕분에 그분의 영화에 대해서는 아련한 추억이나 그리움 같은 것이 있다. 이런 점에서도 이 영화가 내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나는 일본 소설은 제법 읽었으나 영화는 소설만큼 많이 보지는 못했다. 특히 요즘 영화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일본에 있을 때 오즈 야스지로나 구로자와 아키라,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영화는 DVD로 몇 편 봤다. 주로 1950∼60년대 흑백 영화들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도쿄 이야기>는 아마 열 번 넘게 봤을 것이다.
<퍼펙트 데이즈>의 5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히라야마라는 인물은 도쿄 시내 화장실 청소부이다. 변두리 어느 동네의 작은 이층 방에서 혼자 사는 그는 새벽에 일어나 침구를 정돈한 후 양치를 하고 가볍게 콧수염을 다듬은 뒤 청소부 옷으로 갈아입는다. 집을 나와서 청소 도구들이 들어 있는 벤을 몰고 다니며 도쿄 시내 화장실들을 청소하고 점심때가 되면 근처 야산 공원에 올라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운다. 공원의 나무들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는 풍경(일본어로 고모레비木漏れ日라 한다)을 보며 소형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도 한다. 일과가 끝나면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집 근처 목욕탕에서 목욕을 한 후 자전거를 타고 늘 가는 시장 안 노점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문고본 책을 몇 쪽 읽다가 잠이 든다. 가끔 단골로 가는 작은 주점에서 술 한 잔을 즐기기도 한다. 영화의 메인 줄거리는 그런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다. 작은 디테일도 거의 반복적으로 변함이 없다. 아침에 집을 나와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심호흡을 한 번 하는 것이라든지, 자판기에서 캔 음료 하나를 꺼내서 한 모금 마시고 차에 올라 오래된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팝송들을 들으며 운전대를 잡고 ‘일터’로 가는 것이다. 베란다에 가지런히 정돈해 놓은 작은 화분의 식물들에 물을 주고 침구를 펴고 개는 순서도 일정하다. 대사도 별로 없다. 그때그때의 감정에 따른 약간의 표정 변화로 그의 내면을 잠깐 짐작해 볼 뿐이다. 흑백 화면의 추상적인 꿈속 풍경들을 통해 어렴풋이 그의 과거를 유추해 보려고 해도 모호하기만 하다. 그는 왜 화장실 청소 일을 하게 되었는지 영화는 그의 과거나 배경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를 만나러 온 조카나 고급 승용차를 타고 딸을 데리러 온 여동생과의 몇 마디 대화와 행동을 통해 주인공의 과거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추정해 볼 뿐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처음 얼마간은 주인공의 전력이나 과거 사정이 궁금했지만 차츰 그런 호기심보다는 히라야마라는 인물에 몰입되어 뭐라고 콕 집어 표현하기 어려운, 가슴이 찡해지는 어떤 감동에 젖어들었다. 특별한 어느 개인이라기보다 보편적 인간의 쓸쓸함이랄까 우리 삶의 어떤 모습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하루하루 틀에 박힌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최선을 다하는 한 인간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느끼게도 했다. 이동진 평론가와 야쿠쇼 코지의 인터뷰에는 주인공 히라야마라는 인물의 과거에 대한 언급이 잠깐 나오는데, 나는 굳이 그런 배경을 안다고 해서 영화를 감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스텝들의 질문에 벤더스 감독도 처음에는 굳이 알 필요가 없다는 뜻의 말을 했다고 한다). 인터뷰에 따르면 당초 이 영화는 2021년 도쿄 올림픽을 위해 도쿄 시내에 설치한 화장실(17군데라 했던가?) 청소부 이야기를 단편 영화로 만들려고 기획했다가 빔 벤더스가 감독을 맡게 되면서 장편 영화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압권은 마지막 대목일 것이다. 거의 10분쯤은 이어질 야쿠쇼 코지의 운전석 클로즈업 장면이다. 화면 전체에 잡히는 배우의 얼굴 표정은 영화 전체를 마무리하는 집약적인 장면이다. 그 긴 시간을 섬세한 표정 변화로 인물의 복잡한 감정을 표현해 내는 야쿠쇼 쇼지의 연기는 감탄할 만했다. 역시 대배우이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또한 벤더스 감독 작품다운 ‘시적인 영화’라는 생각도 들었다. 주점 여주인으로 깜짝 출연한 가수 이시카와 사유리의 노래를 듣는 것도 이 영화에서 얻게 되는 덤이다.
영화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딸이 “아빠가 좋아하는 삶이네”했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장년 남자의 나 홀로 삶’이 내가 좋아하는 삶일까? 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잠깐 생각해 보니 딸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납득이 갔다. 정년퇴직 후 예상하지 않게 일본에서 다시 일할 기회가 있었다. 50대 후반이었다. 물론 단신 부임이었다. 영화에서와 같은 작은 방 하나에서 살며 전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반복적인 일을 3년쯤 했다. 영화와는 달리 아침은 집에서 해 먹고 20분 남짓 걸어 전철을 타고 두 정거장 지나 내려서 일터에 갔다가 오후 5시쯤 다시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와 저녁밥을 먹고(대부분 근처 마트에서 인스턴트식품으로 때우는 게 태반이었지만), 영화에서처럼 문고본 책 몇 쪽을 읽다가 잠이 드는 나날들. 가끔은 마을버스를 타고 예전(20년 전 첫 부임 시) 살았던 동네에 가보거나 당시 즐겨 먹었던 음식(자작한 국물이 짭짤한 일본식 스파게티와 나가사키짬뽕 같은 것들)을 사 먹기도 하고 밤이면 좋아하는 일본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던 나날들. 온갖 옛날 생각들이 교차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날들이었지만 한편으론 오히려 나는 그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살았었던 것 같다. 방학이면 한두 달씩 내게 와서 지내다 간 아이들이 그런 아빠의 모습을 기억하기에 아마도 ‘아빠가 좋아하는 삶’이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풍경도 내겐 익숙한 것이다. 특유의 일본식 주택, 동네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육중한 자판기, 휴지 조각 하나 보이지 않는 청결한 골목, 도쿄 시내를 흐르는 동경만의 푸른 바다와 도쿄 시내를 그물처럼 엮는 고가도로들, 그리고 내게도 익숙한 옛날 카세트테이프·····. 아마도 이런 내 경험이 더해져 영화 속 히라야마의 삶과 풍경에 더 진한 감동을 느끼지 않았을까. 일본을 떠난 지 10년이고, 아주 오랜만에 보는 일본 영화이지만 자막 없이도 90%쯤은 이해할 수 있었던 안도감도 빼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