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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Aug 22. 2024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경남 남해의 동네 빵집 ‘행복 베이커리’ 김쌍식 대표(‘빵식이 아재’)는 오전 8시 30분부터 9시까지 등굣길 학생들에게 공짜 빵을 나눠준다. 약 11평 면적에 월세 40만 원짜리 빵집을 차려 놓고 새벽 4시에 일어나 학생들에게 줄 빵부터 먼저 굽는데, 그 개수는 하루에 70개에서 100개 정도라고 한다. 빵집 주인인 빵식이 아재는 이 일을 2020년 6월부터 5년째 해오고 있다. 이 사연이 보도된 후 빵식이 아재는 LG 의인상을 받았고, 1년 남짓 지난 2021년 10월 20일 인기 TV 예능 방송에 나온 뒤(여러 방송사의 출연 요청을 거절하다가 제일 좋아하는 연예인이 진행하는 프로라서 어렵사리 응했다고 한다)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빵을 사러 온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는데, 주말에는 50m가 넘는 줄이 두세 겹 겹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소위 ‘돈쭐’이란다. 그 돈쭐 덕분에 빚도 갚고 살림집도 옮겼다. 돈쭐을 내러 찾아오는 손님 중에는 억지로 돈을 쥐여주는 손님들도 많았는데 다 뿌리쳤지만 그래도 돈을 놓고 가는 사람이 많아 빵집 구석에 돼지 저금통을 놔두었고 여기에 쌓이는 돈은 동네 복지기관으로 간다. 빵식이 아재의 사연에 감동해 앞으로 봉사하고 살겠다며 직장을 그만둔 청년도 있었고, 나중에 커서 빵 만드는 사람이 돼 이웃을 도우며 살겠다는 아이들도 있었단다. 빵식이 아재가 굳이 등굣길 아이들의 아침을 챙긴 이유는, 어렸을 때 가난 때문에 밥 못 먹고 학교 가는 날이 많았던 게 가슴에 사무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도 성장해서 이런 봉사 활동에 적극적인 사람의 대부분이  어렸을 적 가난에 대한 서럽고 아픈 기억 때문이리라.      



동화 작가 권정생은 평생을 경북 안동의 작은 교회 종지기로 살았다. 일본에서 태어난 권정생은 열 살 나던 1946년 귀국하여 17살에야 경북 안동 일직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열아홉 살 때부터 늑막염 결핵에 시달린 권정생은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스무 살에 다시 안동으로 돌아와 일직 교회의 종기기로 지내며 교회 문간방에 들어가 살았다. 예배당 부속 건물의 토담집은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웠다. 외풍이 심해 겨울엔 동상이 걸렸다. 그 조그만 방에서 글을 썼는데 『강아지똥』은 이때 쓴 글이라고 한다. 16년을 예배당 문간방에서 살다가 흙담집을 지어 살았다. 일직교회에서 걸어서 4,5분 거리라는데 인세로 받은 60만 원으로 지었다. ‘장정이 발 뻗고 눕기도 불편한 작은 방’이었다. 이 방에서 『몽실언니』와 『점득이네』를 썼다. 동화에 나오는 마을은 모두 교회가 자리한 조탑리 부근 동네들이다. 신장결핵으로 수술을 받은 그는 ‘배에 구멍 뚫고 평생 소변 받는 오줌주머니를 달고’ 살았다. 한 달 생활비 3만 원으로 산 그는 인세 1억 원, 유산 10억 원을 남겼는데 가난한 아이를 위해 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금도 선생의 인세는 미얀마 메솟 난민 어린이, 팔레스타인 자이투나 나눔 학교 등지에 매달 지원된다고 한다. 오래전 노트에 베껴 놓은 『강아지똥』의 서문이 잊히지 않는다. “거지가 글을 썼습니다. 전쟁 마당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얻어먹기란 그렇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어찌나 배고프고 목말라 지쳐버린 끝에 참다못해 터뜨린 울음소리가 글이 되었으나 글다운 글이 못됩니다. 너무도 불쌍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신 어머님께 이 책을 바칩니다”. 아래는 김응교 시인이 권정생 선생에 대해 신문에 쓴 글의 일부다. ‘불교 성지나 로마나 예루살렘 가시려는 분들, 여기 먼저 오셔요. 성자라는 말이 관광지 같아 언짢다면, 밝은터라고 하지요. 폐교에 세운 권정생 동화나라에 가셔서 꽃 사진도 찍으셔요. 반드시 귀하게 쓰일 님들, 여기서 선생을 만나시고 어디 가시든 성지든 밝은터든 민들레 꽃나라, 날마다 이루시고요’. 소설가 김영현은 어느 글에선가 아동문학가 권정생, 이오덕 그리고 전우익 선생을 ‘영남삼현嶺南三賢’이라고 했다. 이오덕 선생은 아이들 글을 모아 동시집을 펴내는 등 우리 아동문학의 뿌리를 정립한 분인데 자신의 충주 돌집 한쪽에 권정생 선생을 위해 손수 흙집을 짓기도 했다고 한다. 권정생 선생이 살았던 일직교회는 내가 태어난 고향 마을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만한 거리’지만 아직 나는 가보질 못했다. 여기저기 관광지라고 이름난 곳들을 찾아다니면서도 정작 발 옆의 ‘성지’는 가보지 않았다. 김 시인의 글을 읽으며 올가을 성묘 시에는 꼭 권정생 기념관을 가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각박한 세상이라고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쩌다 그 선행이 알려져 갑자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들도 더러 있겠지만 ‘그저 당연한 제 할 일’이라는 생각으로, ‘별것도 아닌 사소한 일’이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소리 없이 살다 가는, 살고 있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어쩌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무엇하는 사람인가’ 하는 반성을 하는 때가 있다. 이런 반성의 바탕엔 나 역시 힘들고 고달팠던 청소년 시절을 통과해 왔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작은 도움의 손길이 얼마나 고맙고 절실한 것이었는지를 체험해 봤기 때문이다. 세상엔 딱한 사연도 많고 기구하고 곡절 많은 인생도 많다. 당연히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그런 사람도 많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는 방법 또한 많고도 많다. 그럴 때마다 이런저런 변명 거리를 찾는다. ‘마음이 없는 건 아닌데 지금 당장은 내 가정 하나 건사해서 먹고살기도 바쁘니 누굴 도와줄 만한 형편이 되어야지.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기부금도 내고 ’이름 없는 독지가‘가 될 수도 있을 거야. 그렇게 미루고 미루어만 온 시간이다. 그런데 그 여유는 언제나 생길 것인지. 그 여유라는 건 어느 정도인지. 꼭 물질적인 도움만이 전부인 것도 아닐 것이다. 주변에는 은퇴 후 매주 며칠을 꼬박꼬박 봉사 활동에 열심인 친구들도 있다. 나는 그저 관념적으로만 생각해 온 일을 누군가는 실천에 옮긴다. 그리고 그걸 생색내지도 않는다. 이쯤에서 당연히 안도현의 시를 떠올린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하는 시 말이다. 잘못 살아온 날들, 이기적이었던 삶이 새삼 부끄럽다.


(중앙일보 손민호 기자의 글과 김응교 시인의 글을 참고하였으며, 제목은 전우익 선생의 글에서 따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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