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니 우세지’
어머니가 요양원에 입소한 지 닷새가 지났다.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머니 방문을 열어보았다. 방은 썰렁하니 비어 있다. 비어 있는 방이 낯설다. 베란다 문 앞에 놓인 선풍기와 작은 문갑 위에 손때 묻은 불경 한 권과 염주, 그리고 수첩 같은 물건들 몇 점만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머니가 사용하던 다른 일상용품은 어머니와 함께 요양원으로 보내졌고, 가시기 전날까지 깔고 덮었던 요와 이불은 벽장 안에 들어 있다. 옷장도 거의 비어 있다. 한겨울 옷 몇 가지만 벽장 속 옷걸이에 걸려 있다. 벽장 안을 정리하다 보니 어머니가 손수 일찌감치 준비해 놓은 영정 사진과 보자기에 싸인 수의가 있다. 마음이 짠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어머니가 말년을 요양원에서 보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우리 나이로 100세라는 고령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정했다. 눈이 침침해지고 귀가 어두워져서 원활한 의사소통이 어려운 것을 한탄하긴 했으나 지팡이에 의지해 당신 혼자서 동네 병원이나 약국을 다녀오고 두어 달에 한 번쯤은 미용실에도 다녀오셨다. 가끔 엉뚱한 답변에 놀란 적은 있으나 굳이 치매라고 부를 만한 증세도 없었다. 입맛이 없어져서 식사를 거르는 날이 며칠 이어진 뒤 당신은 잠자듯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무슨 신념처럼 말씀하시곤 하던 어머니였다. 그러던 것이 반년 전 임파선과 이하선에 질병이 생기면서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지더니 두 달 전부터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을 수도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기저귀를 채워드리려고 하면 답답하다고 거절하며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부축해 줄 가족을 찾았다. 그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결국은 기저귀를 차게 되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틀니가 불편하다고 빼버린 뒤에는 식사는 맑은 국이나 죽, 우유와 부드러운 과일 같은 것만 드셨다. 식사량은 점차 적어졌다. 누워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통증을 호소하는 빈도가 잦아졌다. 등에는 욕창의 조짐이 보였고 손과 발이 붓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두세 번 동네 병원에서 턱 주변의 드레싱 치료를 위해 휠체어로 이동하긴 했으나 그마저도 어려워졌다. 겁이 났다. 가족의 수발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적절한 치료나 간호를 해줄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요양원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요양원이라 참고할 만한 정보를 찾기가 어려웠다. 무작정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주변 친지들의 경험을 듣는 것으로 며칠을 보냈다. 그렇게 알아낸 요양원 두세 곳을 찾아가 보았다. 거의 빌딩 전체가 요양원으로 사용되는 큰 규모의 요양원과 소규모의 아담한 요양원 한 곳을 방문해서 시설도 둘러보고 운영 실태를 알아보았다. 애당초 요양원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지라 내게는 선입감이랄까 거부감 같은 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각각의 요양원에 대한 단점만 보였다. 규모가 큰 곳은 어수선하고 무슨 기업 같은 분위기가 싫었고, 규모가 작고 아담한 곳은 체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동행한 아내도 쉽게 결정하기가 어려웠던지 내게로 결정을 미루었다. 주말에 아이들과 상의한 결과 운영이 체계적이고 전문화된 대형 요양원을 선택하기로 했다. 입소할 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어머니에게 차마 요양원이란 말을 꺼낼 수 없어 ‘병원’에 입원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동안에도 간간이 병원은 다녀온 적은 있지만 이번에는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통증이 심할 때는 많이 괴로워하던 어머니는 병원에 간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듯했다. 나는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
틀니를 뺀 후로는 발음이 명확하지 않아 어머니가 하시는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데다 귀도 어두워 내가 전하는 말도 제대로 이해를 했는지 긴가민가할 때가 많았는데 병원에 간다는 말은 알아듣고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요양원에 가기 이틀 전부터인가 누워 계시는 어머니의 눈빛이 달라 보였다. 식사를 가지고 내가 방에 들어가면 아무런 말씀이 없이 누워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는데 왠지 그 얼굴이 쓸쓸해 보였다.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혹시 어머니에게 무슨 예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전에 가끔 어머니와 무슨 대화 끝에서인가 내가 화가 나서 ‘어머니 자꾸 그러시면 요양원 가셔야 해요’ 하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는 “그럼 니 우세지”(자식인 내가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된다는 의미) 하시곤 했는데 문득 그 일을 떠올리신 것인지도 몰랐다. 늙은 (시)부모의 똥오줌을 받아내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알고 살아온, 요양원 시설이라는 게 일반적이지 않던 시대를 살아온 어머니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요양원에 가기 전날 밤 아내는 어머니가 잠이 드신 틈을 타서 가져가야 할 일상용품과 옷들을 정리해서 가방을 꾸렸다. 다음날 머리를 빗기는 등 대강의 몸단장을 마치고 딸 둘과 함께 요양원으로 갔다. 자동차에서 내린 어머니를 요양원 사람들이 휠체어에 태워 모시고 간 뒤 사무실에서 입소에 따른 서류 작성과 요양원 생활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딸들은 요양원 시설과 직원들의 전문성에 대체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요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의외’였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내가 참 모진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집에 돌아와 가까운 집안 어른 몇 분에게 사실을 알렸다. 남달리 건강하고 정정했던 어머니인지라 모두 놀라워했다. 나는 어머니의 상태를 구구절절 설명하고 요양원 입소가 자식 편하자고 한 조치가 아니며 무엇보다 어머니를 배려한 조치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물론 그 이유가 컸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의 지울 수 없는 미안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런 미안함을 희석시키고자 어머니의 상황을 중언부언 덧붙인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요양원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요양원 사람들의 말이다(잘 적응하고 있다는 말이 많은 노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집에 보내달라’고 조르거나 불안 증세가 비교적 적다는 의미 정도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 아마 어머니는 어느 시점부턴가는 지금 당신이 와 있는 곳이 요양원이라는 사실을 알지 않았을까? 지금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밤에 자리에 누우면 자꾸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럴 때면 어머니가 거처하시던 방문을 열고 들여다본다. 방은 텅 비어 있다. 빈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