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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Sep 22. 2024

다시 쓰는 일기 34 – 2024. 9.XX

추석 잡상秋夕雜想

올 추석 차례도 집에서 지냈다. 팬데믹에서 벗어난 작년, 고향의 사촌 형님은 “올해까지는 각자 집에서 지내고 내년부터는 예전처럼 종반들이 고향에 모여 함께 벌초도 하고 성묘를 하자”라고 했는데 그 약속이 지켜지지 못했다. 사촌 형수가 허리를 다쳤기 때문이다. 제수 장만 등 집안일을 총괄해야 하는 형수가 움직이기 어렵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팔순을 앞둔 사촌 형님과 형수의 나이를 생각하면 대식구가 모이는 큰 행사를 치르는 것은 무리라는 말이 나온 지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아마 앞으로는 더욱 어려워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올봄에 다녀온 아버지 산소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대행업체에 맡긴 벌초는 깔끔하게 되었는지, 멧돼지의 행패로 봉분이 페이지는 않았는지, 산소 뒤의 나무들이 자라면서 만든 그늘 때문에 봉분에 이끼가 더 많아지지 않았는지······.     


설 차례, 기제사, 추석 차례 등 1년에 세 번 치르는 행사 때마다 ‘간소화, 간소화’를 노래처럼 외쳐왔는데도 그게 좀처럼 실행되지 않았다. 특히 설과 추석 차례가 그랬다. 그래도 팬데믹이 한국의 제사 문화를 일변시킨 덕분에 팬데믹 이전과 비교하면 많이 간소화된 건 사실이다. 우리 집안만 하더라도 고향의 큰집을 제외한, 서울에 사는 종반 네 집의 차례와 제사 때는 모두 다 모이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참석자들이 점점 줄어들던 것이 팬데믹을 계기로 아예 각자 자기 가족들만의 행사로 바뀌었고(국립묘지 참배로, 성당 미사로) 그런 풍조가 팬데믹이 끝난 후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었다. 한국 제사 문화의 과잉 의례의 폐해를 비판하는 여론의 영향도 있어 최근에는 그 양태가 많이 바뀌었다. 특히 명절 차례는 조선 왕실이나 명문 양반가에서도 아주 간소하게 지내온 것이 알려지면서 일반 가정에서도 ‘허례허식’에 대한 반성이 있었다. 아내는 명절 때마다 제수 장만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면서 ‘올해는 정말 간소하게 하겠다’는 말을 반복해 왔는데, 그런데도  막상 제상을 차려보면 상이 넘칠 만큼 가짓수가 많았다. 아내가 가짓수를 과감하게 줄이지 못하는 이유는 조상에 대한 갸륵한 정성 때문이지만 제사 후 가족들의 식사를 고려한 것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모처럼 모인 아이들에게 이것도 먹이고 싶고 저것도 먹이고 싶어 갈비도 문어도 전도 감주도 준비하는 것이다. 그걸 꼭 ‘그건 조상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식들 위한 것 아니냐’며 나무랄지 모르지만, 제사란 결국 죽은 사람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축제이고 잔치이니 아내가 자초해서 하는 고생이 이해도 간다.      


언제부턴가(아마 가족들끼리만 제사를 지내고부터) 나는 제사(차례) 자리에서 조상에게 덕담과 소원을 말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조상이 왕림하여 음식을 맛보는 시간이라며 제관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꿇어앉아 있는 동안을 이용하는 것인데, 마치 실제로 아버지를 마주한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이번 추석에는 대강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 기제사를 지낸 지 넉 달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몇 가지 일이 있어 보고 드립니다. 어머니를 3주 전에 요양원에 모셨습니다. 요양원 관계자 말로는 아직 적응을 잘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식사도 잘 못하시고 약도 뱉어내신다네요. 잠도 잘 못 주무시고 집에 가겠다는 말만 계속하신답니다. 아버지, 어머니 여명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지만 평온하고 고통 없이 지내다 가실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 oo(큰딸)이가 아기를 가졌습니다. 결혼한 지 5년이 되도록 아기가 없어 걱정했었는데 다행한 일입니다. 산모가 건강하게 아기를 출산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다른 식구들도 저마다 뜻한 일을 이루도록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주 도봉산 망월사를 다녀왔다. 6월 말 이후 두 달도 더 지났다. 작년 4월 이후 매달 한 번을 다녀왔었는데 7, 8월 건강이 좋지 않아 걸렀다. 마음이 찜찜했다. 아직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9월 안으로는 다녀오고 싶었다. 어머니 일도 그렇고 큰딸의 임신도 ‘보고’하고 싶었다. 공교롭게도 가겠다고 정해 놓은 날은 비가 왔다. 꼽아 보니 망월사에 간 날 중 반은 궂은 날씨였다. 비가 오거나 눈이 왔다. 아내는 말렸지만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 가랑비가 오락가락했다. 우산을 쓰고 산길을 오른다. 걷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더 많았다. 전철역에 내린 지 2시간이 지나서야 절에 도달했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바람도 거세다. 법당에 들어가 삼 배를 했다. 큰딸이 내 생일에 준 돈 중 일부를 불전함에 넣었다. 평소보다 몇 배나 많은 금액이다. 내 딴에는 부처님께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다. 삼 배를 마친 후 잠시 법당에 꿇어앉아 어머니와 큰딸의 일을 보고하고 부처님의 가호를 빌었다. (브런치에 가끔 절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특정 종교를 언급하는 것도 그렇고, 내가 독실한 불교 신자여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외울 수 있는 불경 하나 없고 그저 ‘잘되게 해달라고 빌기’나 하는 이기적인 기복신앙 신자일 뿐이다. 오히려 불교 관련 책보다는 기독교에 관한 책을 더 재미있게 읽었다. 요즘도 어느 일본인이 쓴 바울의 초기 기독교 전도 여정에 관한 책을 흥미 있게 읽고 있다.) 법당에서 나와 촛불을 밝힌다. 이전까지는 아이들 삼 남매를 위해 세 자루를 켰는데 이번에는 어머니까지 네 자루를 밝혔다. 비바람이 거세다. 초에 불이 잘 붙지 않았다. 가까스로 붙인 것도 금방 꺼졌다. 유리 상자 안에 조심스럽게 세워 놓고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겨우 불이 붙었다. 상자 안에 있는 초는 몇 개밖에 없었다. 가만히 유리문을 닫고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곧 꺼질 것 같이 흔들리면서도 꺼지지는 않았다. 칠성각과 영산전에 들러서 삼 배를 하고 다시  법당 앞에 와서 촛불을 확인하고 절을 뒤로했다. 비바람이 거셌다. 우산은 쓰나 마나였다. 준비한 삼각김밥을 먹으며 산길을 내려왔다. 올라갈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쉬다 가다를 반복했다. 길도 돌도 벤치도 모두 비에 젖어 앉아 쉴 곳이 없었다. 몇 번 돌길에 넘어졌지만 다치지는 않았다. 몸은 파김치가 되도록 지쳤지만 산길을 내려와 전철역을 향해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할 일을 한 것 같아서였다. 오늘도 물건 하나를 잃어버렸다. 작년 여름 순천에 갔을 때 받은 세계 유산 축전 기념 부채였다. 어느 달 한 번도 가지고 간 물건을 온전하게 챙겨 온 적이 없었는데 이달도 예외는 없었다. 여름도 다 가니 부채는 산에 두고 가라는 ‘산신령’의 뜻인가 보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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