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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효당 Jan 26. 2024

거울 없이 그린 자화상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본 아내가 ‘그런 책이 재미있는가?’고 묻는다. 일본의 저명한 한문학자인 시라카와 시즈카가 쓴 『문자강화1』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갑골문과 금석문의 글자를 통해 한자가 지닌 상징의 세계를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연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책에는 한자의 초기 형태인 상형문자의 도상이 풍부하게 실려 있는데 나는 이 도상과 그것이 의미하는 고대 사상에 호기심을 느꼈다.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의 이름을 안 것은 2010년 말부터 3년 남짓 다시 일본에서 일할 기회가 생기면서부터였다. 선생은 방대한 한자 자전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나는 그 가운데 문고본으로 간행된 책 몇 권을 샀다. 96세를 일기로 2006년에 작고한 선생의 자서전을 비롯하여 ‘비교적 쉬우리라’고 짐작한 책들로 『문자의 세계』, 『한문 백화』, 그리고 이번에 도서관에서 빌려온 『문자강화講話』 등이다. 2014년 귀국한 후 그 책들을 읽어보려고 몇 번 시도하다가 번역하기가 너무 어려워 거의 읽지 못한 채 쌓아 두고 있다가 마침 번역본이 있는 것을 알고 빌려 온 것이다. 아마 아내처럼 ‘일반 독자’가 볼 때는 ‘별 희한한 책’을 다 본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내용을 이야기하려고 이런 말을 꺼낸 건 아니다.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은 내 취향(지식과 취미 측면에서)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일본에 있을 때 이런 류의 책 말고도 여러 분야의 책들(경제 사정을 생각해서 거의 중고서적이다)을 사 모았는데, 분야들이 잡다했다. 일본사, 중국사, 일본어, 가부키와 노(能), 낙어落語에 관한 책들, 친슌신(陳舜臣)과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의 역사물들, 화집畫集, 야나기타 쿠니오 전집, 고바야시 히데오 전집, 나쓰메 소세키 전집 등등 100여 권이 넘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분은 ‘이 사람이 자기 지식 자랑하려는 거야 뭐야?’하고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천만에, 그런 게 아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이 궁금해서 온갖 분야의 책을 닥치는 대로 사 모았지만 정작 그 가운데 읽은 책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읽었다 하더라도 ‘수박 겉핥기’ 식의 내 독서 습관의 한심함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서 이 책 읽고 저 책 봐야 하는데’ 하는 강박감에 쫓겨 정작 읽어도 머릿속에 남은 내용이 거의 없다. 그런 버릇은 지금도 여전하다. 유대인의 역사가 궁금해서, 벤야민의 생애가 궁금해서, 『주역』을 알고 싶어서, ‘『열하일기』는 꼭 읽어야 해, 성서를 알아야 해 등등의 조바심으로 1,000쪽이 넘는 책들을 빌려와서(때로는 구매해서) 흐린 눈을 비벼가며 읽는다(아니 글자를 좇아간다고 하는 게 옳겠다). 새해가 되면 이제는 정말 이런 식의 독서는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어느새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내 모습, 이게 내 자화상이다.      



이전 브런치에서도 적었지만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탈선‘하여 학교를 결석하며 영화관을 전전했다. 영화관 전전뿐 아니다. 영화잡지 기사를 읽고, 배우들 사진을 오려서 보관하고,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를 떼어서 수집하기도 했다. 십 대 중반의 그 ’사건‘은 내 평생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선명한 기억으로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당시에 본 한국 영화가 영화에 대한 내 기억의 원형이다. 세월이 많이 지나 어른이 되어 다시 본 그 영화들은 참으로 ’스토리가 뻔하고 유치했다‘. 하지만 당시에 나는 그런 영화들을 보고 ’웃고 울고 감동‘했다. 훗날 그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당시 영화들의 DVD를 사 모았다. 김수용, 이만희, 신상옥, 유현목 감독 등의 대표작을 비롯하여 당시 한국 영화를 디지털화하여 내놓은 귀한 영화들 몇 편을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 얻기도 했다. 모두 다 1960년대 중, 후반에 나온 영화들이다. 그게 시발점이 되어 영화에 관한 책들을 보기 시작했고, 또 동, 서양 영화 DVD들을 사 모았다. 세계 영화사상 명작의 반열에 오른 영화들인데 닥치는 대로 모으다 보니 어느새 400편이 넘었다. 아내 몰래 하던 일인데 DVD가 늘어나니 눈에 안 띄게 보관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 책장의 책들 뒤에 감춰 놓고 책으로 가려놓았지만 늘어나는 분량을 감당할 수 없어 알맹이만 모아서 따로 보관하고 케이스는 베란다 수납 장소에 넣어 놓았다. 이런 일이 언제까지나 감춰질 일은 아니어서 급기야는 발각이 되고 말았는데 지금도 가끔 아내는 그 일을 거론한다. 딸 둘이 유별나게 영화에 관심이 많고 큰 딸은 영화 관련 일을 하기도 했는데, 그게 다 ’아빠‘ 때문이라며 아내는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정작 그렇게 열심히 모아 놓은 영화들 중 아직 보지 않은 것들이 반은 넘을 것이다. 보지도 않을 영화를 왜 그리 사 모았는지(물론 언젠가는 보겠다고 다짐하고 있지만), 그저 뭐 한 가지에 꽂히면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내 모습, 그게 내 자화상이다.     



책이나 영화 같은 것에는 일찍부터 관심이 있었지만 운동 하고, 여기저기 사람 모이는 데 기웃거리고, 또 사귀는 일에는 흥미가 없었다(재주도 없다). 1970년대 말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때 당구 치는 친구들이 많았다(나이 들어 요즘 새삼 당구 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입사 초기에 동료 직원들 따라 당구장에 몇 번 드나들었지만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처음 당구를 시작하면 밥공기가 당구공으로 보이고 누우면 천장에 당구알이 어른거린다는데 나는 ’전혀‘ 그런 경험이 없었다. 이내 당구장과는 멀어졌다(요즘 친구들 만나면 점심 먹고 당구 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점심만 먹고 헤어진다). 한동안은 ’파친코‘에 빠진 친구를 따라다니면서 잠시 재미를 붙인 적은 있었는데 그것도 얼마 지나자 시들해졌다. 해외 근무를 하면서 골프를 칠 기회가 (더구나 골프 천국의 동남아의 한 나라에서 근무한 인연으로) 늘어났지만, 그 또한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사교 상 마지못해 하는 형국이었으니 오래갈 리가 없었다. 귀국과 함께 골프와 이별했다. 골프채를 잡은 지 12년째였다. 골프채는 처남에게 주었다. 그 후로 골프채를 잡아 본 적이 없다(지금도 열심히 골프 치는 친구들이 꽤 있다). 그렇게 접어버린 골프에 미련 같은 것은 없다. 운동 신경이 발달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운동을 ’매우‘ 싫어하는 건 아니다. 산에는 제법 다녔다. 지리산도 갔고 설악산도 갔다. 여러 번 갔다. 한양도성 성곽길도 열 번쯤은 돌았다. 대개는 두, 셋이거나 아니면 혼자였다. 그러니까 요약해 보면 어울려 운동하고 모여 다니는 일에 재주가 없었고 ’몸 가꾸는 데는 열심이면서 마음 가꾸는 데는 소홀한‘, 영혼 없이 신체만 튼튼한 그런 삶이 싫었다. 살아가면서 때로 그게 꼭 옳은 방식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내 생각이 일방적인 편견이며 자기합리화라는 반성도 했었지만,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그게 천성인데 어찌 큰 깨달음 없이 쉽게 변하겠는가). 그게 내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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