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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을 열게 하는 세신사의 장인정신

기술을 넘어 마음을 남기는 사람

by 동동몬

나는 목욕탕을 참 좋아한다.

뜨거운 수증기 속에서 묵은 피로가 흘러내리고, 미지근한 물에 몸을 담그면 마음까지 풀어지는 느낌이 든다.
이 시간만큼은 컴퓨터도, 스마트폰에서도 벗어나 온전히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세신’, 그러니까 때 미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어릴 적엔 아버지 혹은 친구들과 목욕탕을 가서 서로 등을 밀어주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해외에서 오래 지내면서 그런 문화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십수 년 동안은 ‘때를 미는 것’ 자체를 잊고 살았다.


장인어른과 금요일 저녁에 둘이서 술을 마시곤 하는데

주말 하루는 장인어른께 목욕을 가겠냐고 여쭤보았다.

딸 만 둘인 장인어른은 나의 제안이 좋으셨던 것 같다.


함께 목욕탕을 갔는데 갑자기 장인어른이 나에게

세신을 신청했다며 몸을 잘 불려라고 하셨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냥 씻기만 하면 돼요.”
그랬더니 장인어른이 웃으며 “다 예약했어. 그냥 받아봐. 시원하고 좋아.”
결국 그날 마흔이 다 돼 가는 나이에 처음 세신을 받았다.


장인어른과 나는 주말이면 한 달에 한두 번씩

목욕탕을 함께 가게 되었고 늘 세신을 받게 되었다.


세 번째쯤 목욕탕을 찾았을 때, 늘 가던 곳이 휴무였다.
그래서 근처 다른 목욕탕으로 갔다.


규모도 작고 시설도 낡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사람이 적어 조용했고, 물소리만 들렸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세신사는 키가 작고 단정한 인상의 50대 중반쯤 되는 분이었다.
장인어른이 먼저 세신을 받으셨고, 그다음이 내 차례였다.


“편하게 누우세요~”
그분의 목소리는 친절하고 따뜻했다.

때밀이 타월이 살짝 스치는 소리, 물이 바가지에 담기는 소리, 그 소리들만 들리는 고요한 시간 속에서 몸이 서서히 풀려갔다.

이 분의 세신은 단순히 ‘때를 미는 일’이 아니었다.
손끝의 압, 수건의 결, 그리고 물의 온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엎드린 내 어깨를 만지시더니
“사무직 하시죠? 어깨가 많이 굳었네요.”
그리곤 내 어깨를 오래, 세심하게 눌러주셨다.

손바닥으로, 때로는 팔꿈치로, 바로 그리고 작은 나무봉 같은 기구로.
마치 타이 마사지와 세신이 섞인 듯한, 낯선데 익숙한 감각이었다.


얼굴에 따뜻한 물이 닿더니 폼클렌징 향이 퍼졌다.
‘이건 뭐지?’ 싶었는데,
그분은 능숙하게 내 얼굴을 문질러 거품을 냈다.

“이건 일본 브랜드예요. 피부에 자극이 덜해요.”
태어나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 나에게 클렌징으로 세수를 시켜주었다.


때를 다 밀고 바디워시 거품을 내어 깨끗이 씻어주고

등 부분을 하려고 엎드렸는데 머리가 갑자기 싸~ 해지면서 시원해졌다.

박하향이 확 퍼지며 두피가 얼얼하게 시원해지니 온몸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세신이 끝나고 몸을 닦고 나오자 세신사 분이 냉장고 문을 열더니 음료 두 개를 꺼내 나와 장인어른께 건네주셨다.
“시원하게 한잔 드세요.”


장인어른과 나는 이런 것까지 주시냐며 놀랐고
‘이게 진짜 서비스구나’ 싶었다.

심지어 다른 목욕탕에 비해 세신 비용이 5,000원이 저렴한데 서비스는 다른 곳에 비해 월등하다.


알고 보니 그 세신사 분은 이 목욕탕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발과 세신을 모두 하며, 남탕 전체를 홀로 관리하고 계셨다.


장인어른과 나를 자주 보다 보니 이제는 얼굴을 익히셨다.
“처음엔 부자지간인 줄 알았는데 사위라니. 불편한 사이(?) 일텐데 목욕을 같이 오시는 게 보기 좋아요.” 라며 웃으셨고 “저도 딸이 20대 후반인데 나중에 사위가 생기면 저렇게 같이 와줄까 싶네요.”

요즘은 5살 된 아들도 함께 간다.

처음엔 물이 무서워 늘 안고 있어야 했는데 이제는 좀 컸다고 혼자 이 탕, 저 탕 다니며 물장난을 친다. 그분은 우리 셋을 보면 “오늘은 3대 출동이네요.” 하며 반겨주신다.


그 세신사 분은 다른 누구보다 ‘자신의 일’을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폼클렌징, 쿨링 샴푸, 마사지, 음료 서비스까지. 작은 차이지만, 그 정성이 사람 마음을 움직인다.
장인어른도 “여긴 정말 다르다”며 늘 만족해하신다.


그 결과, 예전엔 한산하던 그 목욕탕에
이제는 세신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다른 곳은 세신시간이 약 15분에서 20분이면

이 분은 30~40분이 걸린다. 한 시간에 많이 받아도 두 명 밖에 못 받기 때문에 오래 기다려야 한다.


가끔 사람이 너무 몰리면 오늘은 어렵다고 미리 말씀해주신다.

나는 그분을 보며 종종 생각한다.

사람의 일에는 ‘감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똑같은 세신이라도 때만 잘 미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 다른 차별화된 뭔가가 그 사람의 마음을 잡아 끈다는 것을.

기술보다 먼저 배워야 할 건, 따뜻함의 기술이라는 것을.

그의 손끝 하나에도 연구와 고민이 담겨 있었다.
폼클렌징, 쿨링 샴푸, 마사지 그리고 음료 서비스까지.
모두 그가 스스로 시도해 보고, 개선한 결과였다.


그는 말했다.
“사람들이 제 손을 기다려준다는 게 참 고마워요.
몸을 맡긴다는 건 신뢰잖아요. 그 신뢰를 함부로 다루면 안 되죠.”

세신이라는 일 속에서도 ‘장인정신’을 찾아낸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진심은 어떤 일에서든 느껴진다는 것.
그리고, 일에는 기술보다 먼저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의 손끝엔 단순히 때를 미는 힘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닦아내는 힘이 있었다.


나는 그 온도를, 매번 목욕탕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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