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프랑크부르크 뢰머 광장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커다란 성당 하나가 보인다.
바로 230년간 신성로마 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던 카이저돔 대성당이다.
멀리서도 보일 만큼 커다란 성당은 웅장한 모습을 자아냈다.
주위에 워낙 높은 건축물이 없어서 그런지 카이저돔 대성당은 단연 돋보였다.
붉은빛을 띠는 건물의 약 100m 높이로 솟은 첨탑에 올라가면 프랑크부르크의 시내를 훤히 조망할 수 있었다.
바이트만 박사 일행은 뢰머 광장을 지나 카이저돔 대성당 앞에서 멈췄다.
멀리서 둘을 지켜보면서도 셀레나는 여전히 요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박사님, 핸드폰 꺼내서 제 사진 찍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바이트만 박사 옆에 있는 사람 얼굴을 좀 찍어 봐요.”
요환은 셀레나의 말을 듣고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셀레나는 그제야 요환의 손을 놔주고 카이저돔 대성당이 뒤로 보이게 섰다.
누가 봐도 카이저돔 대성당 앞에서 사진 찍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셀레나, 얼굴이 잘 안 나와요.”
요환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리가 있는 만큼 바이트만과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내 쪽으로 더 가까이 와요.”
요환이 몇 걸음 더 걸어갔다.
두 사람과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요환은 혹시 바이트만이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까 봐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 모습을 본 셀레나가 말했다.
“괜찮으니까 모자 다시 올려 써요. 오히려 그러면 더 의심받으니까요.”
셀레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처럼 밝게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요환은 의문의 사내를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맙소사. 셀레나. 둘이 보이지 않아요.”
눈 깜짝 한 사이 그 둘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카이저돔 대성당을 등지고 있던 셀레나도 급하게 몸을 돌렸지만, 그 둘이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다.
“박사님, 뛰어요.”
셀레나는 다시 요환의 손을 잡고 그를 잡아끌며 달리기 시작했다.
요환의 생각보다 셀레나는 달리기가 빨랐다.
물론 남자인 요환보다는 느렸지만 보통 여자보다는 발걸음이 빨랐다.
처음에는 셀레나가 요환을 끌며 달렸지만, 이제는 요환이 셀레나 앞에서 그녀를 끌어주는 모양새가 되었다.
둘은 순식간에 카이저돔 대성당 앞까지 달려갔다.
셀레나는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아요. 우선 당신은 바이트만 박사가 얼굴을 아니까 여기에 서 있어요. 내가 들어갔다가 올게요. 나는 뒤돌아 서 있었으니, 얼굴을 잘 보지 못했을 거예요.”
셀레나는 혹시나 자신의 인상착의를 기억할까 봐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요환 앞에 두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오전 중이었지만 성당 안은 관광객들로 꽤나 붐볐다.
요환은 대성당 입구에 서서 초조한 마음으로 셀레나를 기다렸다.
오랫동안 붙어 있어서 그런지 셀레나는 떠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은은한 샴푸향이 콧가에 맴돌았다.
성당 벽에 기대어 한참을 기다리던 요환은 생각보다 셀레나가 늦어지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파도바 사건 이후로 급격히 불안 증세가 생긴 요환이었다.
심박수가 점점 빨라지며 호흡이 가팔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들어가 볼까? 혹시 내가 들어갔다가 도움이 안 되면 어쩌지?’
왓슨 박사도 요환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요환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불안하지만, 셀레나를 기다리기로 했다.
몇 분이 지나자 조용했던 성당 안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안한 마음이 든 요환은 고개만 빼꼼 내밀어 성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대성당 가장 앞쪽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앞에 사람들이 모여서 바닥을 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요환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하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사람들 무리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자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셀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요환은 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쓰러진 셀레나를 안았다.
“셀레나! 정신 차려 봐요. 셀레나!”
요환은 셀레나의 어깨를 세게 흔들었다.
셀레나의 팔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요환은 셀레나의 얼굴에 자신의 귀를 가져다 댔다.
‘아직 숨은 붙어있어.’
다행히도 셀레나의 코에서 숨결이 느껴졌다.
따뜻한 그녀의 온기가 얼굴에 닿자 요환은 안심이 되었다.
호흡도 그래도 상당히 안정적인 편이었다.
요환은 셀레나를 번쩍 들었다.
일단은 바이트만 박사를 쫓는 것보다 그녀를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셀레나를 안고 성당 밖으로 나가려 할 때 그의 품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박사님, 내려줘요.”
정신을 차린 셀레나가 자신을 안고 있는 요환을 그의 품 안에서 올려 다 보고 있었다.
그녀는 살짝 발버둥을 치며 자신을 내려달라고 말했다.
“오, 셀레나. 정신이 들어요? 괜찮아요?”
“네, 잠시 기절했을 뿐이에요.”
셀레나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요환이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자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그녀는 바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요환이 다시 그녀를 안으려고 하자 손으로 그를 밀쳐냈다.
셀레나는 멀미 증세와 비슷하게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힘을 내서 말을 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귀를 입 가까이 갖다 대었다.
그녀의 따뜻한 온기가 귀로 느껴졌다.
“바이트만 박사를 쫓으세요. 첨탑 쪽으로 도망갔어요. 아마 아직 내려오지 못했을 거예요. 그쪽으로 올라가면 그를 잡을 수 있어요. 어서 쫓아요.”
셀레나는 힘없이 말을 하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바이트만이 도주한 곳을 요환에게 말하기 위해 그녀는 온 힘을 다했다.
요환은 잠시 고민하다가 셀레나를 대성당 장의자에 눕혀 놓고 서둘러 대성당 첨탑으로 향했다.
대성당 첨탑으로 올라가자마자 그는 쉽게 바이트만 박사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자네였구먼. 3년 만의 재회치고는 꽤 달갑지 않은걸?”
바이트만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요환은 자신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그에게 예의를 표했다.
“박사님. 오랜만입니다.”
“그래. 왓슨이 보내서 왔나? 나를 잡으라고?”
다짜고짜 바이트만은 요환을 몰아세웠다.
“박사님.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박사님을 추궁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박사님께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요환은 말을 하며 서서히 바이트만을 향해 다가섰다.
요환이 다가오자 그는 팔짱을 풀고 한 걸음씩 뒷걸음을 쳤다.
난간까지 몰린 바이트만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난 자네에게 해줄 말이 없네. 자네 역시 바벨의 후예를 버리고 도망갔으니 이제 상관이 없지 않은가? 아니면 자네도 핫산처럼 돈을 원하는 건가?”
바이트만은 바벨의 후예 자금을 가로챈 자신을 왓슨의 지시로 그가 잡으러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요환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박사님. 왓슨 박사님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뭐라고?”
왓슨의 죽었다는 말에 바이트만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셰이먼 박사 기억나시죠? 저희와 함께 블랙홀을 연구했던 젊은 하버드대 심리학 교수요. 그 여자도 블랙홀에 갇혀 죽었습니다.”
요환의 말을 듣자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요환인 바이트만이 두 사람의 죽음과 상관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거짓말하지 마. 내가 믿을 줄 알아? 자네가 죽인 거지? 핫산이랑 짜고 왓슨을 죽인 거 아냐?”
요환이 점점 다가서자 바이트만은 자신의 소매에서 재빨리 무엇인가를 꺼내었다.
주위에 있던 관광객들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바이트만은 요환에게 권총을 겨눈 채 말했다.
“다가오지 마! 한 발자국만 더 오면 쏠 거야.”
바이트만이 총으로 요환을 겨냥한 채 계속 위협했다.
“박사님. 저는 당신이 함부로 사람에게 총을 쏠만한 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총을 보고 조금 당황했지만 요환은 양팔을 번쩍 들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요환의 말을 들은 바이트만은 자신의 검지를 방아쇠에 갖다 대었다.
“오지 마. 경고했어. 정말로 쏠 거야.”
요환은 우선 바이트만을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님. 저는 당신을 믿어요. 전 단지 셰이먼 박사와 왓슨 박사를 죽인 사람을 찾고 싶을 뿐이에요. 에리스의 짓이 분명합니다.”
에리스라는 말을 듣자 바이트만은 더욱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에리스가 자네일지 누가 아나? 자네가 들어온 후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고!”
총을 들고 있는 바이트만의 손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첨탑 입구 쪽으로 사람들이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독일 경찰들이 첨탑으로 도착한 것이었다.
경찰들이 들이닥치자 바이트만은 당황해하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는 재빨리 총을 내리고 첨탑의 난간 위로 올라섰다.
그의 모습을 본 관광객들이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주변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안 돼요, 박사님.”
요환은 두 손으로 바이트만에게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함께 총을 겨누고 있던 독일 경찰들도 바이트만이 총구를 내리고 난간 위로 올라가자 독일어로 그에게 무엇인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난간에 쭈그려 앉아 아래를 한번 내려다보았다.
아래를 내려 보자 그도 조금은 두려웠던지 살짝 몸을 움찔거렸다.
경찰들과 요환도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바이트만은 요환을 한 번 힐끗 보고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는 서슴없이 아래로 몸을 던졌다.
“안 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요환은 다리가 얼어붙은 듯 그대로 서서 소리만 질렀다.
그의 생각에도 마음씨 여린 바이트만 박사가 자신을 절대 총으로 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셀레나 역시 잠시 기절시켰을 뿐 해치지 않았다.
약물에도 능한 바이트만이라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셀레나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난간에 올라가 밑으로 떨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렇게 위협만 하다가 시간을 벌고 순순히 내려올 줄 알았지만, 그의 예상이 멋지게 빗나갔다.
요환은 소리를 지르며 바이트만 박사가 떨어진 난간을 향해 고개를 내밀어 그가 떨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100m가 넘는 높은 첨탑에서 떨어졌으니 그는 즉사했을 것이다.
지면에는 그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