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되지 않은 파리의 오후

어제의 나는 그곳에 남겨두고

by 박나린
도시와 도시 사이: 여름, 프랑스 파리


어제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혼자 카페에 앉아 지루한 여행을 재밌게 만들기 위해 억지로 할 일을 찾던 나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유럽 거리는 다 똑같아"라며 도시 구경에 흥미를 잃어버렸던 나는 눈에 보이는 모든 골목에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다. 파리에 관한 모든 소문은 사람들의 환상일 뿐이며, 실제 모습은 완전히 다를 것이라고 믿었던 나는 지금 그 환상의 실재를 마주 본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소리는 없지만 존재감은 분명하다. 마음이 조금씩 조급해지고,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진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다가 유명 작가들이 즐겨 방문했다는 브라세리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밥을 먹지는 않았지만, 그곳에 앉아 글을 쓰고 토론하던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창작의 영감이 솟구치는 듯했다. 그러다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빅토르 위고. 세계 4대 뮤지컬인 ⟨레미제라블⟩을 쓴 작가가 살았던 공간이 파리에 있다. 뮤지컬을 사랑하다 못해 그 일부가 되고 싶었던 내가 파리에 있다. 이 흔치 않은 기회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나는 그런 바보가 아니니까.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룩셈부르크 정원. 파리 제1대학교를 지나,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노트르담 대성당을 지나, 어딘지 모를 다리와 거리를 지나 드디어 도착했다. 빅토르 위고의 생가에.


생가를 구경하기 위해서는 티켓이 필요했다. 고작 한 시간 전에 이곳의 존재를 인지한 내가 티켓을 갖고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티켓을 현장 구매할지 잠깐 고민했지만, 파리 북부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포기하기로 했다. 잠깐의 기대가 순식간에 사라졌어도 실망하지 않는다. 지금 내 눈앞에 빈티지 카가 주차돼 있으니까. 그것도 햇살을 가득 머금은 채로. 거기서 한 발짝만 방향을 틀면 보주 광장이 보이니까. 홀린 듯 광장 안으로 들어간다. 조금 전에 룩셈부르크 정원에서 본 모습과는 또 다른 여유로움이다. 왠지 이 광장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 더 파리지앵처럼 보인다. 근거는 없다. 그냥 내 눈에 그렇게 보일 뿐. 이번에도 여유를 즐기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기차역에 가기 위해 근처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파리 북부역으로 향하며 지나치는 거리들은 내가 오전에 봤던 깔끔하고 예술적인 거리들과 다소 다른 모습이다. 조금 더 지저분하고, 조금 더 흐리고, 조금 더 현지다운 느낌이었다. 인종도 다양해졌다. 오늘 내가 경험한 파리에서는 못 본 풍경들이다. 쏜살같이 지나간 시간이 더 아쉬워진다. 하루만 더 있었으면 이런 곳도 경험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잠깐 졸다가 눈을 떴을 때는 버스의 출입문이 열려 있었다. 잠결에 안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la gare’라는 단어만 듣고 반사적으로 내려버렸다. 다행스럽게도 그곳은 파리 북부역 근처의 다른 역이었다. 위험하게도 그곳은 파리 북부역 뒤쪽 골목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덜 정돈되고, 더 북적거리는 곳. 알 수 없는 날이 선 분위기가 그 부근을 감싸고 있었다. 곧바로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그 가방을 꼭 안은 채로, 퇴근길인 현지인들 사이에 끼어 그 누구보다 빠른 걸음으로 역으로 향했다.


이처럼 파리는 하루 종일 다채로운 모습을 보였다. 아름답다가도, 순식간에 얼굴을 바꿔 긴장하게 했다. 그 사이를 3만 보 가까이 걸었다. 잃어버린 것은 없다. 나도 소지품도 전부 무사하다. 다만 오늘의 고단함을 버티지 못한 앵클부츠만이 제명을 다했을 뿐이다. 이 신발은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버려지겠지. 하지만 오늘 이곳에서 만난 화려함과 우아함과 북적거림과 잔잔함과 달콤함과 아쉬움은 일기장에 기록돼 계속해서 이 도시를 그리워하고 다시 찾아오게 만들겠지. 안녕, 파리. Au revoir et à bientô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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