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의 고요 속으로 천천히 스며드는 아침
도시와 도시 사이: 여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아, 추워.” 14시간의 긴 비행 끝에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공항에 두 발을 내딛기도 전에 불어오는 찬 새벽바람에 정말 유럽에 도착했음이 실감 난다. 지금은 8월 중순, 지금 내 옷차림은 버건디 반팔 롱원피스에 검정 테일러드 재킷을 걸친 상태로, 쪄 죽을 듯한 한국의 더위와 유럽의 여름은 덜 덥다는 수많은 여행 후기들을 기준으로 나름대로 적절할 것 같은 옷차림을 고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춥다니. 이게 북유럽의 여름인가. 입고 있는 재킷을 한껏 여미며 입국심사대로 향했다. 출국 전, 여행 후기들을 찾아보며 스히폴 공항은 여러 유럽 국가의 경유지라 입국심사 줄이 길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이야기들을 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지. 여러 블로그의 이야기와 다르게, 공항은 방금 내가 타고 온 인천발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과 공항 직원들뿐이었다. 텅 비어 고요한 공간에서, 상대방만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의 작은 목소리로 입국심사를 진행하는 직원들을 보면서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여행을 많이 다니지 않는 사람. 충동적으로 여행을 결정하지만, 겁이 많은 사람인 나는 늘 입국심사가 무섭다. 혹여나 말을 알아듣지 못할까, 랜덤 조사에 걸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들이 머릿속에서 영화처럼 펼쳐져서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상상하게 된다. 게다가 국민 대부분이 큰 키를 가진 북유럽 답게 심사대도 다른 국가들보다 높아서 작은 키를 가진 나의 걱정이 하나 더 추가됐다. 심사대에 내가 가려져서 직원이 나를 못 보면 어떡하지? 서로 말을 못 알아들으면? 그러면 나 입국 못 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한국에 다시 돌아가야 하나. 아, 그건 안 되는데. 한국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무작정 떠나왔는데, 바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 빠르게 돌아가는 머릿속은 그대로 내버려 두고, 우선 다가오는 입국심사를 준비해야 한다. 한국에서 준비해 온 서류들을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낸다. 출국 항공편, 여권 사본, 여행하며 머물 숙소와 반고흐 뮤지엄 티켓까지. “유럽은 처음이에요”라고 티 내듯이 두꺼운 인쇄종이들을 손에 들고 차례를 기다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왔다. “Good Morning.” 어색한 미소로 인사하며 여권을 건넸다. 직원이 여권을 가져가자마자 곧바로 서류들을 전달할 준비를 했다. 동시에 “나 네 질문에 대답할 준비됐어”라는 표정으로 직원을 바라봤다. 이제 어떤 질문이 오든 웃으면서 대답하면 된다. 얼굴이 잘 보이도록 뒤꿈치를 들고.
Goedmorgen(후드모른)! 좋은 아침!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비행기와 빠르게 진행된 입국 수속 덕분에 오전 8시라는 이른 시간에 암스테르담 센트럴에 도착했다. 관광객들이 돌아다니기 꽤 이른 시간, 이미 오픈한 스타벅스와 맥도날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게는 하루를 시작할 준비에 정신이 없다. 거리에는 여행이 끝나고 공항으로 돌아가는 여행객들의 캐리어 바퀴 소리만 들린다. 나는 이제 막 도착했고, 저 사람들은 이제 이 도시를 떠난다. 저 사람들의 여행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내가 조금 전에 지나온 길을 저 사람들이 지나갈 거고, 반대로 저 사람들이 보낸 시간들을 앞으로 내가 보내게 되겠지. 그 시간들은 어떤 모습일까? 일단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 도시는 아주 조용하다. 북유럽은 원래 이렇게 고요한 걸까? 그저 내가 너무 일찍 도착한 걸까? 정답이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건 기회니까. 사람이 적은 틈을 타서 천천히 도시를 걸으며 느긋하게 암스테르담과 인사할 기회. 앞으로 2주간 매일 방문할 곳이니까 지금부터 조금씩 친해져야지.
운하를 따라 걸으며 본 암스테르담은 평화롭고, 정돈됐으며, 자연 친화적이었다. 운하를 기준으로 질서 정연하게 만들어진 골목과 촘촘히 세워진 건물들은 완벽하게 설계된 계획도시 그 자체였다. 지역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여기에서 유학하면 배울 것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공에 큰 관심이 없는 나도 유학 오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도시계획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네덜란드가 유학 가고 싶은 국가 1위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도시를 만들 수 있다면, 14시간의 비행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자전거의 나라답게 넓은 자전거도로를 빠르게 줄지어 달리는 자전거 무리를 지나치고, 보이는 골목은 전부 들어가면서 암스테르담을 배경으로 미로 찾기를 하던 중에 발걸음을 멈추게 할 예쁜 골목을 발견했다. 산책 20분 만에 벤치에 앉아 구글 지도를 켰다. 여기가 어딘지 알고 싶었다. Begijnhof(베긴호프) 뒷골목. 한국에서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가봐야겠다고 저장해 놓은 곳 근처였다. 원래 내일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베긴호프로 입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