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 대혼란 육아 프로젝트 Part 1. 아기는 저절로 크는 줄 알았지
"6개월, 혹은 그 이상 놀이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아요."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심리상담소를 찾아 검사를 받았고, 하임이의 불안증상에 대해 상담사는 놀이치료를 권했다. 해윤은 아이의 빈뇨와 손 빠는 증상이 불안감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은 막연하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이 자신으로부터 전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이 정도의 불안감도 가지지 않고 유학을 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면서.
하임이는 유난히 예민했고, 유난히 엄마를 좋아했다. 엄마가 행복하면 하임이도 행복했고, 엄마가 우울하면 하임이도 우울했다. 그것이 해윤을 부담스럽게 했다.
해윤은 절망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완벽했는데, 드디어 직장도 얻었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또 다시 아이 때문에 주저 앉아야 하는가. 엄마이기 때문에 이렇게 매 순간 절망해야 하는가.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고 하는데, 엄마가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견디어 내는 이 과정이 아이에게 행복이 될 수는 없는가. 평소에 외가든 친가든 자주 왕래하고 하임이가 엄마 외에 다른 사람과도 깊은 유대를 가졌다면... 지금 같은 시기에 좀 더 쉽게 결정하고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텐데... 이런 자신의 배경이 새삼 서러웠다. 하임이의 모든 것을 자신이 오롯이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해윤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회사일도 더는 예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자신은 이대로 한없이 부족한 엄마일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 그것이 해윤의 인생의 의미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바다 해 海, 빛날 윤 贇. '온 세상을 빛나게 만들라'고 할아버지가 지어주셨다는 자신의 이름이 쓸모없게 느껴졌다. 저 이름 때문에 지금까지 내내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닌지 애꿎은 이름이 원망스러웠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해윤은 몸도 아프기 시작했다. 다니는 병원이 늘어났고, 약도 늘어났다. 그리고 쉽게 지쳤다. 예민한 하임이는 아토피가 생기기 시작했다. 소아과로, 피부과로, 대형병원으로 가뜩이나 지친 해윤은 하임이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녀야 했다. 하임이는 또래보다 키도 작아 정밀검사를 받으라는 판정이 나왔다. 일상에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해윤은 자신이 스스로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막 한 가운데에서 깊은 구덩이에 빠진 느낌이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물도 없었다. 타들어가는 태양빛 아래서 그저 기도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 해윤의 내면에서는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지금까지 해윤의 인생을 이끄신다고 믿었던 바로 그 신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지금 모든 것을 끝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해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이끄신 신의 목소리는 항상 선하셨고, 확실했고, 힘이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들리는 저 목소리도 믿어야 하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저 목소리는 분명 악한 메시지를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지금까지 해윤을 이끄셨던 신도 악한 신이었나?
해윤은 어느 순간 자신이 저 목소리에 이끌려,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하임이를 어린이집에 맡길 때마다 '오늘 저녁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엄마의 눈빛을 읽은 하임이는 정상적으로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하루종일 불안했다.
놀이치료를 위해서는 평일에 시간을 내야했다. 어쩔 수 없이 해윤은 직장을 그만두었고, 상담사의 권유에 따라 별도의 우울증 상담도 정기적으로 받았다. 하임이는 놀이치료 시간을 좋아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냥 노는 시간이었지만, 해윤에게는 '엄마수업'에 가까웠다. 그동안 해윤은 하임이와 제대로 노는 법을 몰랐다. 해윤 자신도 엄마와 놀아본 기억이 없었다. 그저 아이를 잘 먹이고, 씻기고, 건강하게만 해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해윤이 하임이와 놀아주는 모습을 보면서 놀이치료사는 여러가지 코칭을 해주었다. 말로 배우는 것보다 놀이치료사가 하임이와 직접 놀아주는 시범을 보여주었고 해윤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
해윤은 공감표현과 친철한 말투는 장착하고 있었지만, 아이에게 맞춰주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했다, 놀이를 방해했고, 아이의 상상을 무시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해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하임이와 놀아주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 놀아주고 쉽게 지쳤고, 놀이에 집중하지 못했다. 하임이 앞에 앉아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회사일과 유학, 논문, 집안일, 반찬걱정, 장학금 걱정 등등 온갖 생각이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 이런 엄마의 마음을 느낀 하임이는 곧 놀이에 흥미를 잃고 우울해졌다. 이렇게 엄마의 우울이 아이에게 대물림되고 있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이제부터는 하임이는 밤9시까지 어린이집에서 지내지 않아도 되었다. 다른 친구들과 비슷하게 오후 4시면 해윤이 하임이를 데리러 갔다.
"선생님, 엄마 왔떠요. 아직 햇님이 있는데 엄마가 왔떠요!"
하임이는 기뻤다. 그리고 신발을 신고 어린이집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하임이는 집으로 가지 않고 마당에서 친구들과 한참을 뛰어놀았다. 그 모습을 보며 해윤은 발견한 사실이 있었다. 마당 옆에 난 교실 창문에서는 아직 엄마가 데리러 오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 까치발을 하고 창틀에 얼굴을 내민채 부러운 눈으로 밖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깜깜한 밤에도 마당에서 미끄럼틀 한번이라도 더 타고 싶어했던 하임이의 모습과 겹쳐서 보였다.
'하임이가 어린이집을 좋아해서 늦게 나오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어!
환한 낮에 친구들과 밖에서 놀고 싶었던 거였어! 엄마가 일찍 오는 그런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거였어!'
놀이치료를 받은지 한 달만에 하임이의 빈뇨 증세가 사라졌고, 두 달이 지나자 5년간 계속되었던 손빨기 습관이 사라졌다. 직장을 그만두고 놀이치료와 상담을 받으면서 해윤은 자신이 엄마로서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바뀌려고 노력하려는 의지도 강했다. 꿈을 접은 해윤에게 이제 신의 사명이자 삶의 이유는 '엄마'이기 때문이었다. 해윤은 이제부터 하임이의 엄마로서 존재하기로 했다. 앞으로 어떤 꿈을 꾸든, 어떤 일을 하든, 하임이를 0순위에 두기로 했다. 그것이 해윤이 우울증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었고, 살아갈 이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