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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잡러지영 Jan 05. 2022

철들면 무겁잖아요

당신들만의 어린이


“철들면 무거워~”


며칠 전 엄마 차 안에서 했던 말이다. 신호에 걸려 잠깐 멈출 때마다, 엄마는 룸미러를 통해 나를 관찰한다. 떨어져 살아서 그런지 봐도 봐도 또 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러면 나는 며칠 동안 모아둔 잔망을 방출한다. 여러 가지 방식이 있는데, 제일 쉬운 건 얼굴을 한껏 오므라뜨리며 세상 못생긴 표정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엄마의 눈은 반달이 되고 깔깔 웃음이 터진다. 옆에 탄 아빠가 궁금한 눈으로 슬쩍 뒤돌아보면, 나는 또 다른 초등학생 같은 표정을 선보인다. 부모님은 나의 원맨쇼를 즐기신 후에 귀엽다는 눈으로 “아이고 내 새끼 언제 크려나”라고 말하신다. 그러면 나는 역시나 초딩처럼 답하곤 하는데, 주된 맥락은 ‘저는 아직 여러분의 애기입니다’로 동일하다. 오늘은 그게 “철들면 무거워~”로 발현된 날이었다.


밖에선 어른스러운 척을 잘하는 나이가 되었다. 정확하게는 어른스러워야 할 때가 많아졌다. 그런데 엄마 아빠 앞에만 서면 자꾸 무장해제가 된다. 쟤 나이 앞자리가 3이었던가, 저건 그냥 세 살 아닌가 싶은 어린이가 된다. 예전에는 귀여움 받는 게 마냥 좋아서 어린이가 되었다면, 요즈음은 일부러 어린이가 된다. 동생은 왜 저래 라고 하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다.


언젠가부터 내가 어른이 되어 버리면, 그리고 더 이상 엄마 아빠의 챙김이 필요하지 않게 되면, 갑자기 늙어버리시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걱정이 생겼다.


몇 년 전부터 장 보는데 쓰시라고 명절 전 미리 (조금의) 돈을 보내드리고 있다. 그 말인즉슨, ‘저는 이제 받는 게 아니라 드릴 수 있어요’인데, 그럼에도 부모님은 매번 세배를 받으시고 봉투에 빳빳한 새 돈을 담아 주신다. 어느 날은 “왜 30이 넘었는데도 세뱃돈을 주는 거야?”라고 물었다. 엄마는 잠깐 고민하시더니, “우리 딸이 꼬부랑 할머니가 돼도 엄마 아빠 눈에는 계속 아가야. 그래서 주는 거야”라고 답하셨다. 밖에서 그렇게 어른인 척, 다 큰 척, 괜찮은 척하고 지내왔는데 그 말을 들으니 괜히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두 분 앞에서 더 오래 어린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 방에는 분홍색이 정말 많다. 물론 그중에서 자발적으로 산 것은 정말 단 하나도 없다. 침대 커버, 이불, 커튼, 잠옷, 담요, 베개, 심지어 공기청정기까지 수많은 분홍들은 아빠와 엄마 손에 골라졌다. 한편 내가 산 책상, 책장, 서랍장 등등은 흰색이 주를 이룬다. 물론 이미 사주신 것들도 새로 사서 바꿀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분홍 기물들이 가득한 방을 유지하는 이유는, 어린이가 되기로 결심한 것과 같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분홍색 잠옷을 입고, 연분홍 시트 위에 누워, 분홍 이불을 덮고 있다가 문득 내 모습에 웃음이 나서 끄적끄적 적어본다.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어린이 역할 잘할 수 있으니, 엄마 아빠도 오래도록 건강하게 나의 귀여운 척을 지켜봐 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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