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류스케, <드라이브 마이 카>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거부할 수 없는 필연이다. 상실은 우리 삶에 들러붙은 그림자와 같다. 때로 우리는 의도치 않은 사고로 누군가를 상실하기도 한다. 남겨진 자들의 고통은 어떻게 치유되어야 하나. 사실 우리는 대략 답을 들어왔다. ‘진실을 직시하고 마음을 털어놓으며 서로를 위로해야 한다’는 치유적 교훈 말이다. 그러나 그 답은 우리 삶에서 어김없이 실패하고 만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영화적 언어로 이 난제를 풀어간다.
연극배우 가후쿠는 아내 오토의 외도를 목격한다. 그럼에도 가후쿠는 어떤 의문도 내비치지 않는다. 진실에 대한 언급으로 부부 관계가 붕괴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괜찮아 보이는 부부 관계는 침묵 속에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아내는 침묵에 작은 균열을 낸다. 그녀는 남편에게 할 말이 있으니 빨리 집에 와달라는 의미심장한 부탁을 한다. 하지만 남편은 일부러 늦게 귀가하고, 집에 돌아온 남편은 (갑작스런 지병의 발병으로) 숨져있는 아내를 발견한다.
드라마 작가인 아내 오토는 섹스를 할 때마다 이야기를 풀어왔다. 다음 날 아침이면 그녀 스스로도 기억 못 하여(혹은 못 하는 척하여) 남편에게 되물어 보는 이야기는 그녀의 무의식을 반영한다. 한 소녀가 소년의 집으로 들어가 물건을 훔치고 증거를 남기는 이야기. 이 이야기에 비추어 봤을 때, 오토의 마음은 무덤덤한 겉과 달리 전혀 괜찮지 않아왔고, 그녀의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외도는 목격되길 기다리는 의도적인 범죄였다. (오토의 외도는 아이를 잃은 상실에 따른 대응이라는 정신분석적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가후쿠는 진실을 두려워 이를 외면해왔고, 결국 아내를 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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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에 빠져있던 가후쿠는 레지던시 아티스트(상주 예술가)로 초청 받은 히로시마로 떠난다. 그곳에서 가후쿠는 아내의 마지막 볼륜 상대였던 젊은 배우 다카츠키와 재회한다. 그리고 그는 다카츠키를 자신이 맡던 주연 ‘바냐‘ 역으로 캐스팅한다. 다카츠키는 가후쿠와 여러모로 다른 인물이었고, 가후쿠는 다카츠키와 대화하면서도 그에게 은근한 반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가후쿠의 질문은 다카츠키를 꺾지 못했고, 다카츠키에서 돌아온 답변은 되레 남편의 정곡을 찔렀다.
예컨대 가후쿠는 다카츠키에게 “어떻게 가벼운 섹스로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냐”고 질책 했으나 사실 가후쿠 스스로가 아내와 소통해온 방식이 그러했다. 다카츠키는 가후쿠에게 “당신은 진실을 직면할 용기가 없었다”고 일침을 놓으며, 가후쿠가 듣지 못한 오토 이야기의 결말을 알려주기까지 한다. 가후쿠는 그렇게 자신과 다른 유형의 인물인 다카츠키를 통해 자신의 실패를 돌아보게 된다.
반대로 가후쿠는 배우 이유나-공윤수 부부를 통해 자신의 좌절된 성공을 내다봤다. 유나는 수화로 연기를 하는 청각 장애인이다. 그러나 장애인 유나와 비장애인 윤수는 수화를 통해 성공적인 소통을 해낸다. 두 사람은 아이를 유산하는 아픔까지 겪었으나 좌절하지 않았고, 오히려 유나는 연기를 통해 상실을 극복하고 있으며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한다. 가후쿠는 두 사람을 보며 ‘저러 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 또는 치유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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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에서 가후쿠는 운전기사 미사키를 만난다. 처음 가후쿠는 자신의 소중한 장소(자동차)에 그녀를 초대하길 거부한다. 그러나 계약상 어쩔 수 없이 미사키를 운전기사로 고용했고, 둘은 서서히 가까워 진다. 매일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오토가 녹음한 <바냐 아저씨>의 대사를 함께 듣는다. 또 자신의 내밀한 상처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마음을 풀어갔다.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은 차분했고, 오가는 말 사이에는 적당한 공백이 있었다. 영화는 ’자동차‘라는 공간 내에서 이뤄지는 정적인 발화의 순간을 카메라에 천천히 담아냈다.
미사키와 가후쿠는 부녀지간처럼 닮았다. 두 사람은 매사 조용했으며 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상실한 이들이었다. 북쪽 후쿠오카에서 내려온 미사키는 엄마를 떠나보낸 아픔이 있었고 그에 죄책감을 품었다. 두 사람은 생각 정리가 필요했던 날, 후쿠오카로 짧은 여정을 떠난다. 후쿠오카로 가는 차 안에서 가후쿠와 미사키는 각자가 품은 죄책감을 서로 고백한다. 마침내 그들은 미사키의 무너진 집이 있는 하얀 언덕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풀어내며 꽃으로 영혼을 위로한다.
후쿠오카에서 돌아온 가후쿠는 스스로 ‘바냐 아저씨’ 역을 맡기로 결심한다. 그는 두려움 때문에 바냐 역을 거부해왔다. 자신과 바냐의 처지는 너무나 닮았으므로 그 스스로 바냐가 되어 자신의 상처를 직면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후쿠는 그의 차 안에서 오토가 녹음했던 바냐의 대사 - “그야 물론이지. 내 생각엔 진실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든 그렇게 두렵지 않아. 가장 두려운 건 그걸 모르고 있는 거야.” - 를 끊임없이 들어오며 바냐를 연습했고, 언젠가는 스스로가 그 역할을 해내야 했다는 것을 알았을 테다. 그저 용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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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후쿠는 연극에 관한 독특한 예술론을 갖고 있다. 그는 하나의 각본을 다양한 언어로 구성한다. 한 무대에 오른 다국적의 배우들은 각자 다른 언어로 대사를 뱉는다. 대본 리딩을 할 때엔 절대 대사에 감정을 실지 않고, 대사가 그저 입에 정확히 익을 때까지 딱딱하게 읽기를 반복한다 (이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실제 구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고는 ‘무언가 일어나는 마법의 순간’을 준비한다. 뭔가 일어나는 순간,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진실한 교감의 찰나를 빚어낸다. 어떤 침묵과 차이 속에서도 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해낸다.
마침내 가후쿠는 무대 위에서 어떤 순간을 마주하고 스스로를 구원한다. <바냐 아저씨>의 4막 막바지에서 소냐는 이렇게 말한다. (소냐 역을 맡은 유나는 다음 대사를 수화로 말한다.)
“어떻게 해요. 살아야죠! 바냐 삼촌, 우리 살아요. 길고 긴 수많은 낮과 기나긴 밤들을 살아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준 시련을 끈기 있게 참고, 지금이나 나이를 먹은 후나 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다가, 우리 시간이 다가오면 기꺼이 죽음을 맞아 무덤 속에서 우리의 괴로움, 슬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나랑 삼촌, 사랑스런 바냐 삼촌, 우리는 밝고 아름답고 멋진 삶을 보게 될 거고 우리는 기뻐하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감동과 미소로 회상하면서 쉬게 될 거예요.”
암울하지만 희망적이다.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필연에 대한 인정과,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는 희망이 공존한다. 고통이 있음을 인정해야 비로소 그 반대편에 대한 인식도 가능해진다. 우리는 고통을 뒤집어 그 뒷면에 붙어 있는 희망의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어렵다고 하여 포기할 수도, 포기해서도 안 된다. 이 방법만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뭔가 일어나는 순간이 불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무언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우리 어떤 아픔에 관하여 진실히 애도하고 분노하고 고백하자. 함께 소통하고 위로하며, 그래도 살아갈 방법을 찾아보자. 한 사람은 한 세계만큼이나 소중하기 때문에. 순간은 영원만큼이나 아름답기 때문에.
이렇게 진부하고도 어려운 진실을 드러내기까지, 하마구치 류스케가 취한 영화적 표현은 <왜 이 이야기를 ‘영화’라는 수단으로써 드러내고자 했는지>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된다. 왜 소설이나 그림이나 음악이나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였어야 했는지. 영화라는 예술이 어떤 독특한 지점을 가지는지. 하마구치 류스케는 하루키 단편을 새롭게 창조했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새롭게 각색해냈다. 연출에 있어서 자신만의 색깔은 우직하게 밀고 나갔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분명 ‘뭔가 일어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