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대교지> 123호 (2022년 가을 호)
덧붙이는 글 _ 격변하는 국제질서, 길어진 전쟁
7월이다.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전쟁의 충격은 우크라이나를 넘어 전세계를 흔들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극심한 원자재 공급난은 현재 세계적인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현상을 부추기는 근본적 요인이다.
전 세계 주요 밀 수출국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으로 공급량이 급감하자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식량난에 봉착했다. 일례로 우크라이나 밀의 대표적 수입국인 이집트의 물가 상승률은 전쟁 이후 5%에서 14%로 뛰어올랐으며,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직면해 반정부 시위가 온 나라를 들썩이고 있다. 이러한 원자재 가격 상승은 이제는 우리 밥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이다.
이번 전쟁 전개에 있어 작용한 가장 큰 변수는 ‘에너지’이다.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대한 유럽 사회의 의존도는 매우 높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가스관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저렴한 가격에 가스를 수입해왔다. 러시아는 이러한 가스관을 통해 소련 연방 해체 이후 러시아 경제를 재건했고 이를 지렛대 삼아 전쟁을 감행할 수 있었다.
지난 5월부터 미국은 러시아산 원유 및 천연가스에 대한 제재를 단행했다. 러시아의 자금줄을 차단하면 전쟁을 빨리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 러시아 제재가 생각보다 통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러시아의 전체 수입은 줄기는커녕 도리어 늘어났다. 러시아는 국제시장 가격보다 30달러 더 싸게 원유를 팔기 시작했고 중국, 인도와 브라질 등 국가들이 이를 대량으로 구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제재는 부메랑이 되어 서구를 강타했다. 유럽연합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석탄 화력을 감축해왔는데 천연가스 비중이 줄어들고 연료값이 폭등하자 다시 석탄 화력 발전소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전쟁 전 갤런 당 1달러대였던 휘발윳값이 5달러 이상으로 치솟았다. 전쟁이 멈추지 않는 한 에너지 공급난을 둘러싼 불안은 지속될 것이다.
물론 러시아가 서방의 제재에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은 건 아니다. 러시아는 지난 6월 27일 100여 년 만에 외화표시 국체에 대한 이재를 지급하지 못해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에 대해 ‘강요된 디폴트’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충분한 상환 능력을 확보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전쟁 직후 루블화 가치는 땅바닥을 기는 듯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원상회복하여 고공행진하고 있다. 추세적으로 러시아 경제의 체력은 하락할 수밖에 없으나, 아직은 러시아가 리스크를 적절히 관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재 러시아의 전략은 세계가 전쟁으로 인한 자국민 부담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시간을 끌어 보자는 데 있는 듯싶다.
이렇게 전쟁이 지속되는 배경에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오늘날 국제질서가 존재한다. 현재 국제질서에는 두 가지 힘이 상충하고 있다. 하나는 ‘밀어내는 힘’이다, 중국이 미국 패권에 도전하는 등 탈냉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온 세계화 국제질서에 균열이 가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서로 밀어내는 힘이 작용하는 가운데 러시아는 전쟁을 단행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으로부터 SWIFT 결제망 차단 등 각종 제재를 당했지만, 서방과 거리가 먼 중국을 비롯한 국가들의 시장과는 결합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측면은 그럼에도 세계화 무역 구조는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글로벌 공급망 사슬(Global Value Chain, 이하 GVC)’이라는 개념을 얘기하는데, 이는 세계 여러 국가가 산업 및 무역 네트워크에서 분업 체계를 갖추고 상호의존하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래서 러시아에 대한 제재는 그저 러시아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 영향이 지구 반대편 우리나라에까지 도래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밀고 당기는 힘이 병존하는 상황을 고려하여 오늘날 국제질서를 인식해야 한다. 중국이 미국 패권에 도전하고 러시아가 서방에 충격을 가한 국면에서 탈세계화의 흐름은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얽히고 섥힌 GVC를 재조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최근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주도하고 우리나라가 참여하게 된 IPEF(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 워크)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IPEF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 동맹국을 중심으로 무역 및 산업 분야에서 GVC를 재조정함으로써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방국 중심으로 공급망을 구축하는 흐름을 ‘프렌드 쇼어링’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세계가 맞이하고 있는 변화는 구 냉전 및 탈냉전 시기를 포함한 전후 77년간의 세계질서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미국은 여전히 제1 국가로서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이에 중국, 러시아가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국제질서는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이름 하에 양극화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나, 그 내부의 우호 관계들이 영속적인 동맹이나 이념을 중심으로 단결되고 또 서로 완전히 단절되는 양상은 아니라는 점도 특징이다.
특히 ‘지정학’ 이슈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이는 지리적 위치 관계가 국제질서에 영향 미치는 정도가 더욱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들에서 미국과 중국은 서로 더 많은 우호국을 만들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중동 및 중앙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관계도 수가 복잡해졌다. 터키, 인도, 남아공 등 국가들이 자기가 속한 대륙에서 지정학적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팬데믹이 캠퍼스를 잠재웠던 지난 2년간, 국제질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터닝 포인트를 넘어섰다. 이 시대가 후에 어떻게 규정될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새로운 국면의 초입에 들어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는 중대한 기로 위에 서 있다. 미국과 중국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충돌하는 가운데, 한국은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동시에 중국과의 경제적 의존도도 큰 나라이다. 무엇보다 이런 구도 속에서 북핵 위기와 한반도 평화라는 오랜 과제가 새로운 구도 하에 놓여 있다. 우크라이나와 함께 ‘두 개의 전선’이라 불리는 대만 해협도 우리나라의 국가안보와 직결된 인근 동아시아 지역의 이슈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한국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국제질서에 기여할 수 있는 전략이 무엇인지 고민해 나가야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질서의 구조적 양상과 별개로, 전쟁이 얼마나 잔혹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고통은 전쟁이 일어난 지역 시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시민들의 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다. 모두를 힘들게 만드는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길 바란다. 그리고 종전이 우크라이나의 평화와 자유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맺어지길 기원한다.
*해당 기사는 2022년 7월 작성되었습니다.
*앞선 글: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한 행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