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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나영 Feb 24. 2022

1. 제비집

 

  어릴 적 우리 집은 처마가 있는 한옥이었다.


  마당과 대청마루를 연결하는 주땀(죽담 또는 기단)이라고 부르던 정사각형의 넓은 돌 마루가 있었는데 크기가 가로세로 5미터 3미터 정도 되는 제법 널찍한 시멘트 단이었다. 식구들은 그곳에 신발을 벗어놓고 대청마루로 올라왔다. 보통 열두어 명의 식구가 북적이던 집이라 항상 신발이 그득했다. 신발이 비에 젖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지붕에서 처마를 길게 달아냈는데 그 처마 아래에 자그마한 제비집이 있었다.


  어느 날 봄에 제비 한쌍이 와서 열심히 집을 지었다. 계속 무언가를 물어와 쌓아 놓고 잠시 쉬다가 또 훌쩍 나가서 나르기를 며칠 하더니 소소하면서 당당한 집 한 채가 생겼다. 그리고 어느샌가 새끼를 낳아서 우리 집만큼이나 북적 거리는 둥지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제비가 집을 지었으니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라며 좋아하시고 고양이나 다른 짐승들이 해코지 못 하도록 쫓아내곤 하셨다.


  어미 제비는 아침이면 일찍 나가서 새끼들 먹을 것을 물어오고 먹이느라 바빴다. 나는 새끼들이 다 같이 목청껏 소리 지르는 통에 아침에 늦잠은 도저히 힘들었다. 특이 여름이면 모기장을 치고 온 형제가 대청마루에서 자곤 했는데 햇살이 마루에 들어오기도 전에 시끄러운 소리로 잠을 깨야 했다. 새들은 건강하고 생존율이 높은 새끼에게 먹이를 먼저 준다고 한다. 새끼들도 그걸 아는지 열심히 목을 빼고 소리를 질러댔다. 어느 날부터 할머니가 제비집 밑에 먹을 만한 것을 놓아두곤 하셨는데 어느샌가 슬그머니 없어진걸 보니 쥐가 물어갔는지 제비들이 먹었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어쨌든 하루가 다르게 목소리도 커지고 털에 윤기가 도는 게 예쁘게 자라고 있었다. 같은 밥을 먹으면 식구라고 하던데 그런 식으로 그 까치네는 우리와 한 솥밥을 먹는 식구가 되어갔다. 그리고 봄이면 어김없이 처마 밑 그 집으로 온 식구를 데리고 다시 돌아와 주었다



  제비집에서 보면 우리 집 대청마루가 훤히 보였다. 그곳은 온 식구가 밥을 먹고 학교 다녀오면 둘레 판을 펴놓고 다 같이 숙제도 하고 저녁이면 모여서 이야기도 하는 거실이었다. 여름밤이면 모기장을 치고 잠도 자는 침실도 됐다. 우리 형제자매가 어릴 때 흔들리는 이빨을 뽑던 장소이기도 했다. “할매, 이빨이 흔들려서 빠질 것 같다”라고 하면 마루에 앉아 긴 곰방대에 담배 잎을 채워서 담배연기를 뿜으시던 할머니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반짝하셨다. 이빨에 실이 묶이고 이마를 탁 쳐서 벌러덩 뒤로 넘김과 동시에 이빨을 묶은 실을 훽 잡아당기시는 기술은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완벽하게 성공하시곤 했다. 그리고 놀라서 우는 우리를 씩 웃으며 쳐다보시고는 그 이빨을 제비가 있는 처마 밑으로 던지셨다. 그래야 예쁜 새 이빨이 나는 거라 하시면서.


  더운 여름이 되고 방학이 찾아오면 우리 집의 대청은 갑자기 텅 비었다. 늘 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우시던 할머니는 더위를 피해 또 시끄러운 손자들을 피해 경로당에 마실 나가시고 다 큰 시누이 시동생은 직장으로 출근하고 나면 우리와 엄마만 남았다. 그때가 비로소 엄마에겐 자유의 시간이었다. 점심 먹고 매미가 지지 울고 햇볕이 따갑게 내리 쬐이면 마당은 이글이글 달아올랐다. 식곤증이 몰려오고 한숨 자고 싶은 그 시간을 엄마는 놓치지 않으시고 우리를 대청마루로 불러 모으셨다. 얼음을 동동 띄운 미숫가루를 타 오셔서 한 그릇씩 나누어 주시면 사카린의 달달한 맛이 너무 좋아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그리고 선풍기 밑에서 남은 얼음을 오독오독 씹어 먹으면 더위가 생각도 안 났다.  


  엄마는 몰래 사서 장롱 이불속에 숨겨 놓았던 과자를 내놓고 우리에게 노래자랑을 시켰다. 많은 시동생 시누이가 있어서  눈치 보느라 먹고 싶다던 과자를 졸라도 잘 사주지 않으시던 때였다. 우리는 작은 선물을 받으려고 열심히 아는 노래를 불렀다. 전부 학교에서 배우는 동요라서 두 살 터울인 우리는 서로 먼저 부르겠다고 난리였다. 아는 노래를 빼앗겨 부를 노래가 없어질까 봐서다. 나는 제일 맏이 인지라 언제나 일등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더 높은 점수를 받으려고 서서 손을 앞으로 모아 쥐고 정성껏 불렀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남동생들은 처음에는 시큰둥하다가 내가 부른 노래에 엄마가 손뼉 치고

“아이고, 우리 나영이 노래 잘한다. 네가 좋아하는 과자 먼저 골라라”

하시면 동생들은 내가 가져가는 과자 봉지를 보고 눈을 반짝이며 손을 들고

“저요 저요”했다.

노래를 끝내고 나면 엄마가 구십 점, 팔십 점 점수를 매겼다. 앞사람이 높은 점수를 받으면 더 열심히 크게 목청껏 노래를 질렀다. 처마 밑의 제비 식구도 한낮의 더위를 피해서 모여 있다가 우리가 노래를 부를 때는 귀 기울이는 듯 조용하였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서너 곡 부르고 나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고 한여름 초저녁의 어스름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경로당 가셨던 할머니가 손에 나물거리 사신 걸 들고 대문을 들어오시면 우리의 노래자랑은 끝이 나고 엄마는 부엌으로 가셨다. 우리는 받은 선물을 쥐고 골목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더위를 피해 있던 제비도 저녁 준비를 하러 나갔다.


 그렇다 나에게 그 제비집은 한창 예뻤던 엄마와 지금은 세 명뿐인 어린 시절의 싱그러웠던 우리 사형제와 시원한 대청마루와 어스름한 저녁 기운과 할머니의 발걸음이 함께 어울려 있다. 훌쩍 커서 그 집을 떠난 제비 형제들에겐 그들이 재미있게 지켜봤던 대청마루 아이들과 엄마의 노랫소리가 기억이 남아있을까. 아이들이 이빨을 뺄 때마다 처마 위로  던지면서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 하던 할머니의 음성을 기억할까. 돌아가신 엄마에겐 이 제비집이 어떤 기억으로 있었을까. 젊은 시절 대 식구와 시집살이의 고단함 속에서 어린 새끼들과 지지배배 함께 지저 겼던 그 순간들이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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