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움직이는 나무
바람이 세게 부는 날, 창 밖의 나무를 본 적이 있는가?
햇빛이 비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화창한 날이라면
나뭇잎에 햇빛이 반사되어 나무가 반짝이며 흔들리는 것이 아주 장관이다.
마치 맑은 날, 바람에 찰랑이는 바닷물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차적인 아름다움.
나는 나무를 새롭게 바라보고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하나의 가정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밖에 바람이 불고 있지 않다. 나는, 바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 바람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한다."
- 라고 나 자신을 세뇌시키고, 밖에 흔들리며 반짝이는 나무를 바라본다.
기괴한 느낌이 엄습하기 시작한다.
무언가 이질감이 들기 시작한다 -
나무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스스로가 가지와 잎을 움직이는 동물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줄기와 잎으로 이루어진, 정적이고 딱딱하게만 느껴졌던 나무에서
햇빛을 향해 움직이는, 살랑이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느껴진다.
아마 바람과 식물 - 나무의 개념을 아예 모르는 외계인을 똑같은 상황에 놓는다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이따금 바람이 불어 창밖 나무가 살랑일 때면
수업 중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새로운 아름다움을 즐기곤 한다.
그리고, 최근에 풀었던 7월 교육청 모의고사에서
나와 굉장히 비슷한 경험을 한 법정 스님의 수필이 제시문에 나왔다.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제시문을 감상했다.
당연히 틀리지 않았고.
아래는 올해 7월 국어 모의고사에 출제되었던 제시문이다.
머지않아 숲에는 수런수런 신록(新綠)의 문이 열리리라. 그때는 나도 숲에 들어가 한 그루 정정한 나무가 되고 싶다. 나무들처럼 새 움을 틔우고 가지를 뻗으면서 연둣빛 물감을 풀어내고 싶다. 가려 둔 속 뜰을 꽃처럼 열어 보이고 싶다. 허허, 이 봄날이 나를 흔들려고 하네.
귀는 항시 듣던 소리를 즐거워하고 눈은 새로운 것을 보고자 한다는 말은 그럴 법하다. 음악을 듣더라도 귀에 익은 곡만을 즐겨 듣고, 새것을 찾아 눈은 구경거리의 발길을 멈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귀는 좀 보수적이고 눈은 제법 진보적인 셈.
재작년이던가 여름날에 있었던 일이다. 날씨가 화창하여 밀린 빨래를 해치웠었다. 성미가 비교적 급한 나는 빨래를 하더라도 그날로 풀을 먹여 다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찜찜해서 심기가 홀가분하지 않다. 그날도 여름 옷가지를 빨아 다리고 나서 노곤해진 몸으로 마루에 누워 쉬려던 참이었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서까래 끝에 열린 하늘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모로 돌아누워 산봉우리에 눈을 주었다. 갑자기 산이 달리 보였다. 하, 이것 봐라 하고 나는 벌떡 일어나 이번에는 가랑이 사이로 산을 내다보았다. 우리들이 어린 시절 동무들과 어울려 놀이를 하던 그런 모습으로.
그건 새로운 발견이었다. 하늘은 호수가 되고, 산은 호수에 잠긴 그림자가 되었다. 바로 보면 굴곡이 심한 산의 능선이 거꾸로 보니 훨씬 유장하게 보였다. 그리고 숲의 빛깔은 원색이 낱낱이 분해되어 멀고 가까움이 선명하게 드러나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랐다. 나는 하도 신기해서 일어서서 바로 보다가 다시 거꾸로 보기를 되풀이했다. 이러한 동작을 누가 지켜보고 있었다면 필시 미친 중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캐낼 수 있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 것은 틀에 박힌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알아 버린 대상에서는 새로운 모습을 찾아내기 어렵다. 아무개 하면, 자신의 인식 속에 들어와 이미 굳어 버린 그렇고 그런 존재로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건 얼마나 그릇된 오해인가. 사람이나 사물은 끝없이 형성되고 변모하는 것인데. 그러나 보는 각도를 달리함으로써 그 사람이나 사물이 지닌 새로운 면을, 아름다운 비밀을 찾아낼 수 있다. 우리들이 시들하게 생각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이라 할지라도 선입견에서 벗어나 맑고 따뜻한 ‘열린 눈’으로 바라본다면 시들한 관계의 뜰에 생기가 돌 것이다.
내 눈이 열리면 그 눈으로 보는 세상도 열리는 법이다.
- 법정, 「거꾸로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