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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산우인 Jun 25. 2024

1950

글 속의 그 차. 당시 우리가 살던 모빌홈 앞에서 찍은 딸 사진. 이 사진이 30여년 후 패션잡지에 실림.


  유학 와서 처음 산 차는 500불짜리 GM 올스모빌이었다. 문짝이 너무 무거워서 아내 혼자 닫기 힘든 탱크같은 구식 차였지만 인생 첫차이기에 좋아하면서 탔다. 1년 반을 타고나니 변속기가 고장 났다. 앞으로는 안가고 뒤로만 간다. 할 수없이 폐차하였다. 두 번 째 차는 좀더 돈을 들여 800불짜리를 샀다. 문도 네 짝이고 훨씬 날렵했다. 그런대로 잘 타고 다녔는데 두어달 전부터 차가 그렁거린다. 새벽마다 운행하느라 혹사를 당했나? 신문 돌리는데 지장이 있을까 걱정되기 시작하였다.

     

   Austin American-Statesman 신문사가 신문돌이들에게 나눠준 T-셔츠엔 회사의 엄격한 고객중심 경영방침이 새겨져 있었다. "Perfect Delivery!! Whatever It Takes." 무슨 일이 있어도 완벽히 배달하라는 직설적인 경구(警句)였다. 그에 맞추어 조금만 지각배달하거나 고객불만이 접수되면 가차없이 감봉조치되었다. 좀 더 믿을만한 차를 사리라 마음먹고 신문광고란을 살피기 시작했다. 신문돌이의 정보력으로 개인 광고는 매주 목요일부터 일주일간 실린다는 걸 알아차리고 몇주 간 목요일자 신문을 살펴보았다. 드디어 하나가 잡혔다. "5년 13,000마일, 상태완벽, 4,000불“     


   어떻게 5년 동안 13,000마일 밖에 안탔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한번 가보기로 했다. 6시반까지 신문배달을 완료하고 1시간 더 기다려서야 전화를 걸었다. 시 외곽지대 숲속마을이었다. 1,000평도 넘어 보이는 큰 집에 백발의 노부부만 살고 계셨다. 차가 다섯대라서 할머니가 타던 차를 팔기로 했단다. 그제서야 비정상적으로 낮은 운행거리가 납득되었다. 매물로 내놓은 차는 과연 외양부터 완벽해 보였다. 500불쯤 깎아서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차 한 잔을 들고 오신 할머니가 날더러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내가 "I'm from Korea."라고 하니 두 분이 거의 동시에 "아~"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곤 자동차 거래는 미뤄둔 채 어떻게 한국에서 유학을 올 수가 있느냐? 자기가 한국전쟁 중 유류보급장교로 인천에서 근무했었노라. 당시 한국 길거리에는 거지와 고아, 몸파는 여자들이 즐비했노라. 한국 사람들 어찌 도둑질을 많이 하는 지 인천에서 급유해서 용산기지에 도착해보면 기름이 반밖에 남아있지 않더라...     

 

   듣는 사람 민망할 만큼 한시간 쯤 빈한했던 전시 한국 얘기를 쉴 새 없이 늘어놓으시더니, 이윽고 거실 저 켠에 가서 스탠드등을 켰다. 정좌하고 한번 숨을 고르시더니  잉크펜을 들어 메모지에 무슨 글자를 써서 몇번 접은 후 내게 들고와서 손바닥에 쥐어주시며 "이거면 어떠냐?"고 하신다. 펼쳐 본 메모지엔 미국식 숫자 표기로 또박또박 "1950"이라고 써있었다. 순간 "왜 하필 1,950불이지?"하는 의아심이 들었지만, 난 너무 기쁜 나머지 "Are you sure? Thank you so much!!"를 연발하며 거래를 마무리했다.     


   지인들이 내가 새 차를 산 걸로 착각할 만큼 그 차는 외양이나 기능이 완전무결했다. 2년을 더 타고 텍사스에서 캐나다까지 북미대륙을 운행하고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귀국할 때 3,000불에 팔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였다. 학교 아파트 광고판에 1,500불 매물로 내놓았다. 첫 방문자로 온 이란 유학생이 한 푼도 안깎고 즉석에서 계약을 했다.     


   그리고 귀국하여 20년이 흐른 후 어느 자리에서 나의 중고차 구입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면서 "그 영감님 성격  참 희한하더구만. 2,000불도 아니고 하필 1,950불에 주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앞자리에 앉으신 분(한국교육개발원의 이찬희 박사)이 "황교수 왜 그랬는지 진짜 몰라요?"하고 물으셨다. 내가 "모르겠는데요?"라고 하니 "그 분이 한국전 참전용사고 한국전이 1950년에 발발했잖소?"라고 말씀하셨다. 순간 내 머리가 멍해졌다. 당시엔 그저 돈 많은 노인이 한국 유학생을 측은히 여겨 싸게 주었고, 나는 그저 횡재했단 기쁨에 감사했을 뿐인데, 그 숫자가 그렇게 의미심장할 줄이야... 좀 더 깊이 감사드리고, 차를 모는 동안에도 그 뜻을 새겨보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았다. 그러나 지나간 세월. 이젠 그 분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제나 이제나, 나는 딸네미에게 '사오정'으로 불릴 만큼 한심스럽게 눈치가 없는 인간이다.

텍사스 주청사 앞에서...

                                                                                                    (2022년 6월 6일, 현충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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