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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산산인 Jul 02. 2024

단상, 우즈베키스탄

  15년만에 우즈베키스탄에 다녀왔다. 「지구촌나눔운동」에서 주관하는 우즈벡 시민사회 지도자 세미나에 강사로 초청 받아 간 길이다. 우즈벡은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1998년에 「국가사회건설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Social Construction under the Presidential Office)」란 거창한 이름을 가진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2달동안 국제경제학을 강의했었고, 2008년에는 국립공과대학교 (Tashkent State University of Engineering)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2008년에 갔을 때는 10년동안 일어난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었다. 독립 이래 죽을 때까지 대통령 권좌에 있었던 Islam Karimov 정권은 자국통화로 환산한 1인당 국민소득이 해마다 성장을 계속했노라고 선전하고 있었지만, 미국 통화로 환산한 1인당 국민소득은 10년 전에 비해 줄어든 상태였다. 그러나 지난 15년 특히 2016년 독재자의 죽음 이후 정권을 인수한 Shavkat Mirziyoyev 대통령 임기 중인 지난 8년간의 변화는 매우 가시적이었다. 타슈켄트를 가로 지르는 중심대로가 사통팔달 시원하게 뻗어있고, 그 길 위로 자국산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중심가의 힐튼호텔 주변에는 새로 지은 고층건물이 즐비하여 파리의 라데팡스를 연상 시킬 정도였다. 독재의 사슬에서 벗어난 한 나라경제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1998년 첫 방문한 우즈벡은 소비에트 시절의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한 우중충한 나라였다. 늦은 밤에 도착한 공항은 강 건너 마을을 바라보듯 불빛이 아롱아롱하여 등화관제를 하고 있는 나라가 아닐까 싶은 인상이었다. 군용트럭을 개조한 탑승객용 차를 타고 도착한 타슈켄트 공항 대합실도 컴컴하긴 마찬가지였다. 입국 심사를 받기 위해 서있는 줄이 마치 영화 속 유태인수용소 입소 장면을 연상시킬 지경이었다.


  그리고 시작된 중견 공무원 대상 국제경제학 강의는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사회주의 시스템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공직자들은 자본주의의 기본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한국에서는 그냥 넘어가는 이자율, 인플레이션, 환율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는데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자본시장에 대한 몰이해였다. 도대체 왜 기업이 주식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해야 되고, 그 주식이 왜 증권거래소에서 거래가 되며, 왜 가격이 매일 등락을 하는지 이해를 못했다. 그들의 사고로는 필요한 생산분야는 정부에서 걷은 세금으로 건설하면 그만이었다. 사회주의 시절의 공직자들에게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는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수강생들이 이 지경이니 강사인 나도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좌충우돌 헤매다가 무엇을 가르쳤는지도 모른 채 시간만 때우고 돌아온 것 같다. 그 때 내가 좀더 잘 가르쳤으면 우즈베키스탄의 경제개발이 좀더 앞당겨졌을까? 무망한 생각이 들었다.


  당시 우즈베키스탄은 Republic of Daewoo라고 불렸었다. 길거리를 달리는 승용차의 대종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낡은 러시아산 라다(Lada)였지만, 외양이 깔끔한 새 차의 80%는 대우차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차가 티코였다. 장난감 같이 작은 티코 자동차 위에 달린 택시 팻말이 유난히 크고 무거워 보였었다. 자동차 뿐 아니라 냉장고, 세탁기, TV 등 모든 가전제품도 대우가 독식하던 독점시장이었다. 그랬던 대우가 김대중 정권에 찍혀서 부실기업으로 금융지원이 중단되어 하루 저녁에 도산하고, 우리나라 기업 최초의 글로벌 경영으로 전세계에 깔아 놓았던 그 좋은 부동산과 독점기업을 헐 값에 팔아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심각한 국부유출이고, 대우에서 일하던 국내외 수십만명의 일자리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만든 대참사였다. (내겐 대우 도산으로 최고의 엘리트에서 밑바닥까지 추락한 친구가 있고, 또 나는 그 사태의 주역이면서 아직도 정치권에서 떵떵거리고 있는 철면피 정치인을 기억하고 있다.) 대우 우즈벡은 업종별로 쪼개서 현지 기업인들이 헐값으로 인수하여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기간산업이 된 상태다. 자동차는 GM 시보레의 해외법인 형태로 남아서 회교국가에서 십자가 로고를 달고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강의를 마치고 시내구경을 나서니 낮 최고기온이 42도다. 추억이고 관광이고 도무지 뭘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드는 혹서의 날씨다. 전통을 자랑하는 「우즈베키스탄호텔」앞에서 출발하는 2층 관광버스는 우리 일행 5명이 전부다. 중간 기착지에 내려 구경할 생각을 안하니 버스는 그냥 슬금슬금 도로 위만 달리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래도 어스름 저녁 무렵에 찾아간 Magic City는 별천지였다. 잠실 석촌호수의 롯데월드를 연상시키는 놀이공원이었다. 전세계의 랜드마크를 축약하여 만들어 놓고, 인공호수 건너편에 디즈니랜드의 고성을 만들어서 이를 배경으로 분수 물줄기가 음악과 조명에 맞춰 춤추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우즈베키스탄의 새로운 중산층 가족들을 위한 엔터테인먼트다. 문득 국민들에게 경제발전의 미몽을 심어주기에는 이만한 프로젝트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도시가 밝아지고, 길거리에 마이카가 넘치는 나라가 되었지만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행복과 돈을 맞바꾸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마냥 편하지 만은 않았다.


  출국을 위해 다시 찾은 타슈켄트국제공항은 출국장까지 고가램프도로가 연결되지 않아서 주차장 밖에서부터 짐을 끌어서 입국장으로 들어서야 하는 여전히 낙후된 공항이었다. 그리고 공항 안에는 사우디 아라비아 제다에서 갓 도착한 흰 옷 차림의 무슬림 성도들이 가득했고, 공항 밖에는 평생 돈을 모아서 성지순례 ‘하지(haji)’를 다녀온 어르신들을 환영하기 위해 꽃을 들고 대기하고 있는 수많은 가족들로 붐비고 있었다.

  

  정신은 중세적 종교관에 젖어 있고, 육체는 서구식 물질문명에 젖어들고 있는 점점 양극화되는 21세기의 우즈베키스탄을 목도하고 왔다.

성지순례를 마치고 귀국한 우즈벡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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