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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kyrunner Dec 06. 2024

흰 - 한강소설

책을 읽고 흰 것과 하얗 것에 대한 부작용(2024.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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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7시 20분에 일어났다. 알람이 7시 20분에 울렸다.

알람소리에 스마트폰을 끄며, 지금이 6시 10분쯤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알람을 끄고 2~3번 더 울리면 일어나야지 생각했던 나는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한 시간을 도둑맞은 느낌이다.

아 어제 워크숍을 참석하면서 아침 6시 10부터 10 ~ 20분 간격으로 울리게 해 놓은 알람을 모두 꺼놨구나

만약 이 알람까지 꺼 놓았으면 8시까지 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제 회사 도서관에서 대출받은 한강의 책을 읽기 시작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소설은 예약 대출을 걸어 놓고 어렵게 대출받았다. 

제목은 "흰"

채식주의자는 맨부커상을 받았다고 했을 때 도서관에 빌려서 읽어서 이번엔 그녀의 많은 작품 중에 "소년이 온다" 아니면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싶었지만, 예약자가 많아서 예약 신청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나마 "흰"이라는 소설이 예약 신청이 가능해서, 예약을 걸어놓았다. 거의 한 달 만에 이 책을 대출하게 되었다.


수원 회사숙소에 웬일로 아침부터 흰 눈이 소복소복 내린다. 파주보다 따뜻해서 눈이 이렇게 많이 온 적이 없었는데, 그것도 첫 눈이 제법 많이 내리는 것이다.


간단히 소변을 보고, 다시 침대로 올라와 이불을 어깨 뒤로 두르며 책을 읽는다.

읽으면서 나는 또 하나의 나의 편견에 놀랐다.

채식주의자처럼 묘사가 잘 된 소설이리라 생각했지만, 각 단원별 짤막 짤막한 한 페이지, 내지는 두 페이지 정도로 에세이처럼 적어 놓은 내용들이 이게 소설인지 작가 자신의 생각들을 두서없이 적어 놓은 것들을 정리한 것인지 헛갈렸다.


그동안 책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두 페이지 반은 써야 책의 한 단락이 된다고 생각하고 쓰지 조차 못하고 잠자고 있는 여러 단락들이 생각났다. 그래서 오늘은 그냥 두서없이 적어 보기로 했다. 소설의 한 단락도 A4 반페이지 정도로 끝나는데, 내가 쓰는 에세이 정도가 그보다 짧으면 어떠리...


책의 목차를 보면


1 - 나

---- ---9

문 ---15

강보 ---18

배내옷 ---20

달떡 ---22

안개 ---26

흰 도시 ---29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34

빛이 있는 쪽 ---35

젓 ---37

그녀 ---38

초 ---39


2 - 그녀

성애 ---47

서리 ---48

날개 ---49

주먹 ---50

눈 ---51

눈송이들 ---54

만년설 ---56

파도 ---58

진눈깨비 ---59

흰 개 ---60

눈보라 ---63

재 ---66

소금 ---67

달 ---69

레이스 커튼 ---71

입김 --- 72

흰 새들 ---73

손수건 ---76

은하수 ---77

하얗게 웃는다 ---80

백목련 ---81

당의정 ---82

각설탕 ---83

불빛들 ---85

수천 개의 은빛 점 ---86

반짝임 ---87

흰 돌 ---88

흰 뼈 ---89

모레 ---90

백발 ---91

구름 ---94

백열전구 ---95

백야 ---96

빛의 섬 ---97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98

흩날린다 ---100

고요에게 --- 101

경계 ---104

갈대숲 ---106

흰나비 ---108

넋 ---109

쌀과 밥 ---111


3- 모든 흰

---- ---117

당신의 눈 ---118

수의 ---120

언니 ---121

백지 윙에 쓰는 몇 마디 말처럼 ---123

소복 ---124

연기 ---125

침묵 ---126

아랫니 ---127

작별 ---128

모든 흰 ---129


(목차를 인터넷 어디서 복사해 오려했는 데, 찾아봐도 없어서 내가 일일이 타이핑했다. 보통 yes24에는 목차가 나와 있는데, 이번엔 없었다. )


흰색을 띤 것들에 대한 단편들을 적어 놓았다.

특유의 묘사하는 문체는 나의 머릿속에 그림들을 그려 놓는다.

워낙 짧게 적혀 있어 출근하기 전까지 거의 책 반권 정도를 읽었다.


어떠한 배경지식도 없이 읽는 이 소설은 가끔 머릿속을 몽롱하게 했다.


P35 빛이 있는 쪽
이 도시의 유태인 게토에서 여섯 살에 죽은 친형의 혼과 함께 평생을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남자의 실화를 읽었다. 분명히 비현실적인 이야기인데, 그렇게 일축하기 어려운 진지한 어조로 씌어진 글이었다. 형상도 감촉도 없이 한 아이의 목소리가 시시로 그에게 찾아왔다.


이 도시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나는 서울인지, 유태인이 죽었다면 독일인지 몰랐다. 그냥 쉽게 쉽게 읽어가던 책에서 내가 모르는 "게토"라는 단어와 또 "시시로"라는 단어가 보이니 나의 뇌가 각성하는 느낌이다.


게토가 무언지 검색해 보니, 나무위키에 이렇게 적혀 있다.

유대인이 모여 살도록 법으로 강제한 도시의 거리나 구역을 가리킨다. 모로코에도 이와 비슷한 멜라가 있었는데 게토보다는 한결 자유롭고 번화했다.


시시로는

경우에 따라서 가끔. 이라는 뜻과

유의어로 가끔, 때때로, 어쩌다


(時時로)

한자로 때 시 자를 쓰니, 때때로가 맞는 듯한데


다른 곳에는 '스스로'의 방언이라고 나와 있기도 하다.


아무튼 일반인들에게 더 익숙한 형용사를 두고 생경한 형용사로 표현하는 데에는 나처럼 아무 생각없이 읽어 내려가다 문득 생각을 하게 하는 힘이 있는 듯하다.


P39 초

흘러내리는 촛농은 희고 뜨겁다. 흰 심지의 불꽃에 자신의 몸을 서서히 밀어 넣으며 초들이 낮아진다. 서서히 사라진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모처럼 첫눈이 쌓일 만큼 많이 내려서일까?


아니면 아침에 읽은 흰 이란 소설 때문일까?


부작용처럼 나에게는 흰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13층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이 흰 눈에 덮여갔다.


파주에 있었으면, 내리는 눈을 바라 볼 여유가 없었으리라. 그저 눈을 치우기만 바빴을 시간들.

눈이 오는 날에는 으레 지각자들이 많은 게 현실인데, 지하철도 눈 오는 날은 밀리는데 나는 파주에서 근무할 때면 오히려 더 일찍 7시 30분까지 출근을 해야 했다. 눈을 치워야 하기 때문에...


그때는 씻지도 않고 모자를 눌러쓰고 차를 몰고 출근하면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도로 위에 내 뒤로 두 갈래 자동차 바퀴자국을 남기며 출근을 했다. 눈이 내리는 것이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흰 눈을 그냥 치워야 하는 하얀 쓰레기 정도로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은 아마 군대 시절인 듯하다.

군대시절은 아무리 자도 잠이 오고, 아무리 먹어도 허기지고, 아무리 껴 입어도 춥고 동상에 걸렸다.

눈이 오는 날이면 더 일찍부터 눈 치우기를 시작해야 했다. 그래야 간부님들 출근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파주에 근무하면서도 눈이 오는 날은 더 새벽부터 출근해서 눈을 치워야 했다. 그래야 학생들이 미끄러져 다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아침에 읽은 책 때문에 나는 흰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왕뚜껑 컵라면의 뚜껑이 흰 색이었다.


용기는 하얗색, 분말수프의 바탕색도 흰색이다. 

전자레인지는 하얗 색, 콘센트도 하얗 색이다.

라면용 종이컵도 흰 색이고, 라면 끓이는 기기는 하얗 색이다. 

나무젓가락 포장에도 흰 색이 있고, 일회용 숟가락도 흰 색이 있다.

벽은 하얗 색이다.

진열대도 하얗 색이다.

아이스크림 냉장고도 하얗 색이다.

그러고 보니 바닥에도 하얗 색이 들어간 체크무늬 바닥이다.

연기가 흰색이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도 흰 색이다. 

도서관을 올라가는 계단도 거기에 붙어 있는 안내 글씨는 하얗 색이다. 


P59 진눈깨비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 마을,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물큰하게?

내가 모르는 어휘이다. 


네이버에 이렇게 나와 있다.

물큰하다 

갑자기 심하게 풍기는 느낌이 있다.


물렁하게는 알아도 물컹하게, 얼큰하게도 아니고, 물큰하게...

브런치의 맞춤법 검사에도 "물컹하게"라고 고치라고 나온다.

문득 평상시 잘 접해 보지 못한 이런 어휘는 영어로는 어떻게 번역할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과연 이런 표현들이 다른 나라에도 하나의 단어로 다 존재할까?


얇고, 짧고 에세이 같은 이 책은 나에게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P106 갈대숲
갈대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늪에 야생오리 한 쌍이 살고 있다. 살얼음의 표면과 아직 얼지 않은 회청색 수면이 만나는 늪 가운데서 나란히 목을 수그려 물을 마시고 있다.
그것들에게서 돌아서기 전에 그녀는 묻는다. 
더 나아가고 싶은가.
그럴 가치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라고 떨면서 스스로에게 답했던 때가 있었다.
이제 어떤 대답도 유보한 채 그녀는 걷는다. 살풍경함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절반쯤 얼어 있는 그 늪가를 벗어난다. 


살풍경하다 (殺風景하다)

1 풍경이 보잘것없이 메마르고 스산하다.

2 매몰차고 흥취가 없다.

3 광경이 살기를 띠고 있다.




P20 배내옷

내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다고 했다. 여덟 달 만의 조산이라 몸이 아주 작았지만 눈코입이 또렷하고 예뻤다고 했다. 까만 눈을 뜨고 어머니의 얼굴 쪽을 바라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어머니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외딴 사택에 살았다. 산달이 많이 남아 준비가 전혀 없었는데 오전에 갑자기 양수가 터졌다. 아무도 주변에 없었다. 마을에 한 대뿐인 전화기는 이십 분 거리의 정류장 앞 점방에 있었다. 아버지가 퇴근하려면 아직 여섯 시간도 더 남았다. 

막 서리가 내린 초겨울이었다. 스무세 살의 엄마는 엉금엉금 부엌으로 기어가 어디선가 들은 대로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했다. 반짇고리 상자를 뒤져보니 작은 배내옷 하나를 만들 만한 흰 천이 있었다. 산통을 참으며, 무서워서 눈물이 떨어지는 대로 바느질을 했다. 배내옷을 다 만들고, 강보로 쓸 홑이불을 꺼내놓고, 점점 격렬하고 빠르게 되돌아오는 통증을 견뎠다.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모에다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가느다란 소리로 우는 손바닥 만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처음엔 꼭 감겨 있던 아기의 눈꺼풀이, 한 시간이 흐르자 거짓말처럼 방긋 열렸다. 그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제발 죽지 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배내옷 이 단원이 이 소설의 핵심 단원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단원을 읽으며, 과연 소설인가? 한강작가 본인의 이야기 인가? 분명 책 표지에는 소설이라고 적혀 있는데...

그러면서 또 한 편으로는 노벨문학작가 헤밍웨이가 떠올랐다. 


그가 썼다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


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

판매중 : 아기 신발, 사용한 적 없음 


노벨문학상 수상한 작가의 특징인가?

짧은 글 속에서도 무언가 생각하게 하는...

그리고 계속 무언가가 떠오르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속에 맴도는 질문들...


왜일까?

헤밍웨이의 가장 짧은 소설을 읽고 나면, 

과연 그 아이는 어떻게 된 것일까? 임신한지 몇 주 안되어서 행복한 출산을 상상하면서 구입한 아기 신발을 갑작스러운 유산으로 부부가 다시 판매 하는 것일까?

아니면 뱃속에서 10달을 키우다가 출산을 하면서 죽었을까?

신발을 파는 것은 아빠일까? 엄마일까? 아이만 잘 못 된 것인가? 산모와 아이가 모두 잘 못되었는데, 홀로 남겨진 아빠가 파는 것일까?


한강의 "흰" 이란 소설도 그녀의 감성속에 흰 색과 하얗 색을 따로 보게 만드는 것 같다.

삶과 죽음의 경계속에 있는 흰 색, 아무 느낌이 없는 하얗 색


입김은 흰 색이다. 들숨과 날숨으로 생기는 이 색은 삶과 죽음이 있다. 

연기도 흰 색이다. 나무가 죽음으로써 생기는 흰 색이다. 

눈도 흰 색이다. 뺨에 닿는 순간 낯선 차가움을 선물하며 살아지는 흰색.

배냇옷도 흰 색이다. 살아있는 아이를 감싸는 흰 색.

컵라면의 뚜껑도 흰색이다. 

전자렌지는 하얗 색이다. 벽도 하얗 색이다. 그것들에는 삶에 죽음이 같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의 소설을 읽고 삶 또는 죽음과 관련 된 것들은 흰 색

그냥 아무 관련 없는 것들은 하얗 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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